104.
아카데미로 돌아와서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팔월의 마지막 주였다.
위르겐 카이저 교수의 수업 시간에는 전투용 아티팩트 구입 허가서를 작성하는 법을 배웠다.
마탑이 여러 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위치마다 특성과 파는 물건이 다르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시어런 제국에는 총 다섯 개의 마탑이 있는데, 그 중 제1 마탑과 제2 마탑은 수도에 위치한다.
아카데미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높이 서 있는 두 마탑은 마법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모아 제대로 된 마법사로 기르는 것을 주력으로 했다.
때문에 아이들이 연습 삼아 서툰 실력으로 만든 아티팩트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내가 구입했던 병아리 인형도 어린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앤의 손에 쥐여 준 뒤로 잊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제3 마탑은 숲의 위드로 공작령에, 제4 마탑은 평야의 발렌티아 공작령에, 제5 마탑은 강의 옐디더스 공작령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일 산맥과도 맞닿아 있는 위드로 공작가는 오웬을 건너 바로 섀턴 사막에 도달할 수 있는 험지였다.
주거지와 먼 공터가 많은 덕에 험한 실험을 하기 좋아 전투 마법사가 많고, 전투용 아티팩트의 가짓수 역시 가장 많다고 했다. 간혹 실험적인 마법사들이 불완전한 아티팩트를 팔기 때문에 인증 마크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는 말을 필기해 두었다.
발렌티아 공작가와 옐디더스 공작가에서는 돈이 많이 드는 실험도 비교적 흔쾌히 지원해 준다고 했다. 강과 너른 평야를 끼고 있어 부유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평화를 원하는 많은 수의 마법사들이 제4 마탑과 제5 마탑에서 여생을 보내며 실생활용 아티팩트를 제작했다.
아티팩트뿐 아니라 주력 마법 자체도 그러한 지역 특색을 따를 것이 분명하여, 외가가 있는 제4 마탑에 언제 한 번 들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굳게 했다.
화요일에는 메이지 볼더가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각 혈의 학명과 기능에 대하여 옮겨 적어 온 인체 해부도를 보며 머리를 싸맸다.
내공심법을 한 단계 위로 가꾸기 위하여 본래 있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이었으나, 제가 직접 단전을 만들어 보겠다며 도와달라 애걸하는 모양새는 견디기 어려웠다.
중원 천지를 다 뒤져 보아도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 새로 심법을 배워 익힌 양민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마나와 내공의 성질이 다른 것은 내가 몸으로 배우고 익혀 이미 알았다. 마나는 가볍고 빠르지만 내공은 무겁고 느린 성질의 기운이었다.
마나를 다루듯 내공을 다룬다면 전신의 기혈이 산산이 부서질 것이 빤했다.
그러한 연유로 몇 번을 거절하였는데도 메이지 볼더는 학구열이라는 이름의 떼를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에른하르트 영식이 도와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요? 그 등 뒤에다가 대고 기운을 넣어 주었던 것처럼요. 내공이라는 것도 어떻게 잘하면 여차저차⋯.”
“그게 여차저차 같은 것으로 되는 것이었으면 개나 소나 다 단전을 품었을 겁니다. 진기도인은 내공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에 그 도를 두고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독기를 몰아내고 기운을 북돋는 일입니다. 기를 쌓기에는 걸맞지 않은 방식이에요.”
“그럼 순환을 하다가 중간에 딱 하고.”
“어찌 흐르는 것을 중간에 멈추게 한단 말입니까? 그런 말을 하는 데서부터 틀렸습니다. 해 본 일 없고, 해 드릴 일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더글라스 머스탱이 문득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에른하르트 영식. 저는 어떻게 안 되겠어요?”
“예? 교수님까지 어째서.”
“난처한 것은 알지만, 아직 영식이 직접 실험해 본 것도 아니잖아요. 영식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몸에 단전이란 것을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심법이 마나를 끌어 몸 안의 혈도를 깨우고 강화하는 법이라는 것도 알았고, 그 길도 이미 익혀 두었고, 무엇보다.”
“⋯.”
“메이지 볼더와 저는 이미 비물질 세계를 보고 있으니까요. 시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잘 되면 에른하르트 영식의 심법을 업그레이드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일단 표본이 영식 하나뿐이라는 것도 불안하고.”
머스탱 교수의 마지막 말이 깊게 박혔다.
내 몸에만 계속 실험을 하는 것이 싫으니 저도 시도해 보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걱정이 담긴 그 말에 작게 침음했다. 이미 수천 년을 이어 온 심법이라는 이야기는 그에게 통하지 않을 터였다.
나이 오십이 넘어 내공심법을 수련하는 일은 확실히 경우에 없었으나, 마법 수련자들이 내공심법을 연구하게 된 일도 중원 역사에 없었으니 확답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폭 내쉬며 허락했다.
“⋯대신 위험한 것 같으면 조금 다치시더라도 기의 흐름을 끊겠습니다.”
“고마워요, 영식.”
“아니, 저랑 머스탱 교수님이랑 똑같은 말한 거 아닌가요? 이 차별 뭐지?”
볼더가 따지고 들었으나 그에게 쓸 심력이 없었다.
더글라스와 볼더에게 차근히 운기조식의 구결을 약식으로나마 알려주었다. 제대로 번역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인체 도해를 보며 몇 번이나 고쳐서 설명하느라 시간이 퍽 오래 걸렸다.
그 둘의 학습법이 중원의 것과 달라 외우고 익힌 뒤 내 앞에서 운기조식을 시도해 보겠다 하여 허락하였다.
제국의 계보 수업에서는 역대 황제들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한 것을 보고 배웠다.
어느 황제의 부인이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었다는 속설을 강의한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언제나처럼 비실비실한 목소리로 해설을 덧붙였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드래곤으로 의심하기에 카르젠티아 황비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거든요. 그녀는 마법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강하지 않았고, 정령을 부린 기록도 없습니다.”
“⋯.”
“그럼 어째서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설이 나왔느냐. 학계에서는 이것을 신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귀천상혼, 즉 격이 다른 혼인을 정식으로 성립하기 위하여 당대 황제가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작위가 없는 일반 백성과의 혼인은 지지 세력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사랑 하나를 위해, 첩실을 두지 않고 일부일처를 유지하기 위하여 드래곤과 신화의 권위를 빌려 왔다는 설명이었다.
식물원에 가기 전의 나였으면 가문에 해를 끼치면서까지 전전긍긍하는 사내를 이해하지 못했을 터였다.
지금은 그저 당대의 황제도 자신의 황비를 마리앤과 같은 눈으로 보았을지가 궁금했다.
금주의 명마 예찬론 시간에는 드디어 벤자민이 멋들어지게 말을 타는 데 성공했다. 이번 주에도 내내 마사에 들러 계란으로 저글링을 하고 당근으로 말들을 유혹해 낸 덕분이었다.
흑마 빅토르가 벤자민을 받아 준 뒤로, 다른 말들이 벤자민을 크게 꺼리거나 달아나는 일이 줄었다.
그 탓에 무척 신이 난 벤자민이 나를 답싹 껴안고 번쩍 들어 빙글빙글 제 자리에서 몇 차례나 돌았는데, 아해가 내 강인함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탓에 우악스러운 손아귀 힘을 자제하지 않았다.
나는 풍등처럼 휘둘리다 내려진 뒤로도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해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으나 밤이 되어 몸을 씻을 때 보니 어깨와 허리에 시퍼런 멍이 선명했다. 그나마 근골이 단단하여 뼈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용하다 싶었다.
다음 날 고급 검술 시간에 내 몸이 불편한 것을 혼자 눈치챈 루베르가 크게 걱정하기에, 그 이유를 슬쩍 귀띔해 주었다.
벤자민이 기뻐 날뛴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하지 않을 줄 알고 한 말이거늘 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내 어깨를 손끝으로 훑는 모습에 가슴이 뜨끈해졌다.
“정말 괜찮습니다. 별로 아픈 것도 아니고.”
“⋯오늘 오후에 비도술 수업 있는 거 아니야? 괜찮아?”
“음⋯. 안 괜찮으면 어쩌겠습니까.”
동무들과 조를 지어 마엘로 샌슨에게 덤벼들었다가, 기운이 쪽 빠져서 털레털레 돌아온 벤자민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 아무 일도 없다고 답했다.
실전 비도술 수업에서는 이제 10m 표적을 노릴 때 비도가 허튼 곳으로 날아드는 법이 없었다. 간혹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 방향이 틀어지더라도 과녁 모서리에 꽂히는 것을 보면 절로 가슴이 부풀어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비도술에 적절한 심법을 알지 못하여 느린 호흡으로 갈음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와 메이지 볼더에게 말해 내공심법을 창안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목요일 저녁,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내가 지난주에 제니에게 받아 온 화분에 물을 제대로 주고 있는지 검사하러 온 쉐이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비도술에 조금 익숙해진 것을 자랑하는 것을 들으며 잘했다 잘됐다 칭찬하던 쉐이든이 문득 제 손을 주무르며 이런 소리를 했다.
“나는 손이 얼얼해서 죽겠어. 그래도 제시간에 다 쓰긴 했는데, 뺄 건 뺐는데도 20페이지 꽉 채우게 되더라고.”
“⋯음?”
“어? 뭐야, 왜 그런 표정이야. 세드릭 교수님한테 제출하는 보고서, 넷째 주잖아. 이번 달 과제는 내일 오후 한 시까지 제출인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핑계를 댈 일은 많았다. 지난주에 연금술 수업이 끝나자마자 식물원에 놀러 가기도 했고, 그 뒤로 한 주 내내 오전을 개인 훈련과 운기조식, 샌슨의 수업에 할애했다.
오후에는 각 교과 수업으로 바빴으며 수업이 끝난 뒤 벤자민을 위해 마사에 들르기도 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개인 훈련을 하고 나면 시간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에 둔 유인물과 야영 수업 때 들고 다니던 노트를 꺼냈다.
다행히도 제니가 미리미리 노트를 보여 주어 옮겨 적었던 것도 있고, 지난 연금술 수업 때에는 나도 매 과정을 꼼꼼히 적어 두었기에 당장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쉐이든은 허어, 하고 혀를 차더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지금이라도 말하길 잘했네. 지금부터 쓰면 내일 제출 시간에는 늦지 않을 테니까. 한 시까지 연금학과 과사무실 조교님께 제출하면 돼. 가는 길은 같이 가줄 테니까, 내일 초급 검술 수업 전까지만 써 둬.”
“⋯그래, 고맙다.”
“힘내, 미카. 화이팅.”
애교스러운 응원이 얄밉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여즉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머리를 쥐어 싸고 골몰했다.
한 차례 빈 종이에 써야 할 것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그것을 줄글과 도표로 바꾸어 정해진 보고서 용지에 작성하는 데 꼬박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