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몇 가지 요리가 순서대로 줄줄이 이어졌다.
모든 접시에 갖가지 꽃들이 장식으로, 혹은 중한 식재료로 쓰였다. 후식으로는 작은 꽃잎을 흩뿌린 상큼한 샤베트가 나왔다.
이렇게 먹고 나니 입에서도 꽃내음이 돌고, 몸에도 꽃향기가 돌았다.
마리앤을 뒤쫓고자 하는 짓궂은 마음에서 온 식물원이었으나, 아해들과 우르르 나와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있으니 기분이 무척 흐뭇하여 기꺼웠다.
다음에도 또 식물원에 오자 말을 꺼내니 모두가 웃으며 그러자 입을 모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른 온실들을 구경하다가 하나둘 조명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이 시원했다.
꽃의 정원 테라스라 명명된 야외 정원은 탁 트인 것이 온실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고즈넉한 정원에 잔잔한 음악이 멀찍이서부터 들려왔다.
잘 닦인 길을 따라 걸었다. 내내 웃고 떠들던 아해들도 숨소리 발소리를 신경 쓰며 찬찬히 걸었다. 포르르 반딧불이가 무리 지어 달아났다가 기웃기웃 제 자리로 돌아오는 광경에 눈이 부셨다.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앉은 어둠이 이 땅만은 비켜 가는 듯했다.
어찌 인세에 이런 황홀경이 다 있단 말인가. 세 걸음을 걷고 쉬고, 두 걸음을 걷고 쉬었다. 독촉하는 이가 없어 이 풍경을 가슴 가득 담았다.
잘 가꾸어진 꽃들이 바람이 산들거릴 적마다 제 향기를 뽐냈다.
일순 숨이 멎었다.
시야 먼 곳에서 익숙한 보랏빛 머리의 여아를 발견했을 때, 아해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별을 끌어다 그 눈에 박아넣은 듯했고, 인세의 모든 행복을 끌어다 제 품에 그러안은 듯했다. 머리 위에 얹은 장식이나 잔뜩 꾸며 입은 옷태보다도 그 아이의 미소가 두 눈에 단단히 틀어박혔다.
사람이 사람을 저런 눈으로 볼 수가 있구나.
내가 갑작스럽게 마리앤 필로덴도르를 여인으로 보게 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 착각을 할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다만 보는 이조차 말을 잃게 만드는 미소에 크게 놀란 마음을 쉬이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리앤이 재잘대는 소리는 노랫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으나, 그 앞에 앉은 소년이 주의 깊게 마리앤의 이야기를 듣다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말간 웃음을 쏟아 낸 마리앤이 상대의 어깨에 제 손을 얹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보았다.
돌아가자 말도 없이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겨 얌전히 자리를 피했다.
돌아가는 길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행복이란 감정에 모습을 덧씌운다면 딱 저런 모양이겠구나 싶었다.
나 홀로 천만대산에 올라 마교주의 목을 쳤다 하더라도 저만치 기쁘게 웃지는 못했을 터였다.
저런 것이 사랑이라면, 나 또한⋯.
나는 처음으로 연정이라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가 궁금해졌다.
경애와 존중은 내 머리로도 닿을 수 있는 감정이었으나, 연정. 그 숨 막히게 덥고 빛나는 감정을 내 일평생 조금도 알지 못했음이 못내 서러워졌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의 감상이었는지 야외 정원에서 나오는 길이 조용했다.
교향악단의 노랫소리가 한결 가까워지는 큰길까지 나와서야 아이 하나가 툭 목소리를 냈다. 나는 여즉 얼떨떨하고 어안이 벙벙하여 곧장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리앤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봤어요.”
“저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렇구나. 사랑을 하고 있구나아.”
상대가 별로인 사내라면 훼방을 놓으려고 했는데, 저래서야 가당치 않겠다며 수선을 부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귓전으로 흘려들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저도 연애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상대를 찾기가 어렵다느니, 서로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느니 하는 말이 왁자하게 오갔다.
아이들이 손목을 잡아끄는 대로 걸어 까만 정원을 좀 더 걷다가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도 얼떨떨하여 우스운 농담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누군가 농담 삼아, 내게도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 재잘거렸다.
농담에 웃음을 돌려주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 *
토요일. 나는 여즉 어제 보았던 소녀의 얼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다소 멍한 기색이었는지 도서관에서 만난 루베르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아해가 걱정하는 것을 알아 괜찮다 말하며 다시 유인물을 펼쳐 들었다.
지난 생에 여인을 가까이 둔 적이 없어 나 홀로 몰랐던 것이고, 정인을 둔 이들은 전부 그런 행복을 주고받고 살았던 것인가 싶었다.
인생을 허투루 산 것 같다는 생각이 삐죽삐죽 못난 모습으로 튀었다.
문득 루베르에게 물어볼까 싶었으나, 이 아해도 따로 정인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민망하고 객쩍어질까 우려돼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은 집중이 잘되지 않아, 오후에는 검을 수련할 생각입니다.”
“아. 나도 그럴까 했는데⋯. 같이 대련이라도 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루베르가 금세 솔깃해하여 함께 할 것을 청하기에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덕분에 식사를 간단하게 마치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대련을 한다 하니 주변을 오가던 아이들이 비켜 주어 너른 공간을 둘이 사용할 수 있었다. 루베르의 실력을 익히 알고 있기에 뻗는 검에 망설임이 없었다.
쏘아 내달리고, 부딪치고, 힘으로 눌렀다가, 또 밀려나 바닥을 굴렀다. 몸을 낮추고 크게 베었을 때 맞은편에서 같은 방식으로 부딪쳐 오는 검이 묵직하고 단단했다.
그렇게 오후 내내 땀을 흘리고 나니 심란한 마음이 조금 가셨다.
숨이 차도록 검을 휘두른 탓에 폐부 깊숙하게 뻐근한 감각이 좋았다. 내 지난 삶은 이렇게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온전한 기쁨이었다.
나는 내가 정인을 만들지 않아야겠다 다짐하여 일생을 홀로 지낸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야만 바르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계 아닌 자손으로 남궁의 이름을 달고 태어난 탓에 드높은 곳을 바라보며 검을 수련할 수 있었으나, 넉넉한 돈주머니는 평생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하늘을 천장 삼고 맨땅을 침상 삼아 야숙한 일은 더러 있어도 하늘을 찌를 듯 높고 화려한 누각에 들어서서 흥청망청해본 일이 없었다.
그저 꾸준하고 묵묵하게 검을 닦아 웃어른들의 칭찬을 받는 것이 기쁘던 어린 시절을 지나, 나의 검에 호감을 느끼고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는 또래를 만나, 협객의 길을 걷는 동안 세인들의 칭송이 객잔에서 객잔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람이자 긍지로 삼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않는 삶이 바른 것이라 여기고 살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당치도 않다. 그렇게 여겨 진작에 포기하고 있던 마음을 이제야 돌아볼 수 있었다.
몇 번을 스스로에게 미혹되지 말아라 되뇌며 돌아보았다는 것은 언젠가 미혹된 적이 있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좋은 옷, 좋은 음식이 부럽지 않을 리가 있었겠는가. 내가 갖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미리 겁을 낸 것이지.
시어런의 연인들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뽐내고 싶어 한다지.
과연 그럴 만했다.
내가 검에 긍지를 가지고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 연무대 위에 나섰던 것처럼, 이토록 아름다운 감정을 만났을 때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버텨 내는 것은 평범한 이가 할 일이 아니라 여겨졌다.
나는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는 것이 내게 마땅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거뒀다.
내 당장에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수는 없겠으나, 더운 감정이 찾아온다면 팽개치고 돌아보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을 했다.
숨을 헐떡이고 있자니 루베르가 물과 수건을 챙겨 주어 감사 인사를 했다.
혼란한 마음을 닦아내기 위한 대련이었던 만큼, 봐주는 것 없이 매섭게 검을 휘둘렀는데도 약간의 싫은 내색도 없이 모조리 받아쳐 낸 소년의 묵묵함이 위안이 되었다.
하늘빛이 맑고 푸르렀다. 눈이 따갑도록 쏟아지는 햇살을 그제야 알아챘다.
점심나절부터 세 시간을 검을 휘둘렀는데도, 지친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는 루베르의 흰 낯과 목덜미에도 땀이 흥건하였다.
“⋯이런.”
“이제 좀 괜찮아졌어?”
“⋯예. 감사합니다.”
루베르는 무슨 일이 있었냐 묻는 대신에, 잠시 쉬어가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소년을 옆에 달고 익숙한 나무 그늘을 찾았다. 루베르가 짧게 웃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검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으며 대꾸했다.
“예전에도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었던 게 생각이 나서.”
“음.”
이번처럼 마음이 혼란하였을 적에, 삼재의 도에 따라 검을 긋던 바로 그 연무장이 바로 이곳임을 새삼스럽게 알았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밝은 낮이고, 연무장의 가장자리에 겨우 서서 홀로 버텨 내는 대신 한가운데에서 거하게 대련을 벌인 것만 달랐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 위를 가린 나뭇가지와 푸르게 빛나는 잎새를 올려다보고 있자 묵묵하던 소년이 맥없이 웃으며 제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잠시 쉬어가는 동안에도 모습을 단장하는 모습이 정말 제 깃 고르는 까마귀같이 어여쁘단 생각을 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한 학기나 지난 뒤에 물을 일이 아니라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읽어낸 것인지, 루베르가 왜 그러냐며 먼저 말을 꺼내 오기에 순순하게 답했다.
“그때, 선배가 왜 심란하였는지가 문득 궁금해져서요.”
“⋯아, 그때. 그냥⋯.”
아해는 어물어물하다가 웃으며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나는 삐딱하게 앉아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 생각하던 루베르는 손 틈 사이로 빙긋 웃었다. 실없는 대답에 무게가 없었다.
“글쎄,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렇습니까.”
나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았다.
과거의 그때에는 조금도 궁금하거나 서운하지 않던 것이 지금은 궁금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이 심란할 적마다 곁에 붙어 살갑게 챙겨 주는 아이에게 정이 붙은 게지. 괜히 채근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내가 곧장 대답하지 않자 루베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상한 농담을 툭 던졌다.
“별이나 보다 들어갈까?”
“이 낮에요.”
“낮에도 별은 그 자리에 있다고 들었거든. 저기 잘 보면⋯.”
아해가 나를 달래려 아무 말이나 뱉고 보는 것을 알았다.
나도 결국엔 웃으며 그러지요, 하고 대답했다. 둘이 한참을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종 오가는 학생들이 인사하는 것을 웃는 낯으로 받아 주었다.
땀을 씻고 나서도 자꾸만 부러운 마음이 들어 싱숭생숭했으나 루베르가 충분히 달래 준 덕분에 오전보다는 나았다.
어차피 당장에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다음의 언젠가로 미뤄 두고 잊기로 했다.
덕분에 일요일에는 별일 없이 무탈하게 공부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