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102화 (102/176)

102.

서늘한 유리 돔 안은 잎이 작고 뾰족하여 겨울을 잘 견딘다는 사철나무로 그득했다. 우리는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 죽 걸었다.

어느 순간부터 달큰한 꽃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혀 시선을 돌렸다.

탁, 발에 닿는 감촉이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단단한 돌바닥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폭신하고 보드라운 흙이 밟혔다.

봄꽃 온실. 크게 쓰인 있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으니 데미안이 웃는 낯으로, 이제야 어린아이 같다며 흰소리를 했다.

간판을 소리 내어 읽은 것이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저기 화려하게 틔운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난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저 높은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모두 사람의 손이 닿아 있는 것인지, 유리를 보석처럼 조각하여 꽃들 사이사이에 매달아 놓은 것이 반짝반짝 빛났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 이런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빨리 피어나고 빨리 지는 꽃들을 잘 솎아 내어 다발을 만들어 파는 노점이 있기에 한 다발 사서 제니의 품에 안겨 주었다.

제니는 보답이라며 손바닥만 한 화분 하나를 사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화분에 흙만 있고 풀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고 있자니 상인이 싹싹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랜덤 화분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것을 잘 가꾸면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나는데, 어떤 꽃이 피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걸 기다리는 게 또 재미 아니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하였으되 내 손으로 풀 한 포기 길러 본 적이 없어 바로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쉐이든이 간간이 들여다보며 함께 길러 주겠다고 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화분을 손에 쥐었다.

화사한 봄꽃을 끌어안고 빙글빙글 도는 제니가 무척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저녁 식사는 제니가 먹어보고 싶다는 생화 정찬 코스를 먹으러 갔다.

잎이 넓고 화려한 꽃을 무더기로 얹어 둔 샐러드, 크림과 우유를 듬뿍 넣어 끓인 스프가 애피타이저로 나왔다. 곁에 흙을 닮은 가니쉬가 얹어져 있고 위에 허브와 생화로 장식한 스테이크가 본식이었다.

가니쉬를 포크 끝으로 찍어 맛보니 감자에 베이컨과 색이 어두운 치즈를 잘 섞어 색 밝은 흙처럼 꾸민 것이었다.

접시 위에 화원을 꾸려놓은 것이 신기해 바로 고기를 자르지 못하고 한참을 구경했더니, 쉐이든이 문득 옛일을 꺼내 왔다.

“여기 있는 꽃들은 다 식용이라서 먹어도 돼. 등꽃은 못 사주지만, 여기서 많이 먹어.”

“등꽃이요?”

“언제 적 이야기를.”

“아직 일 년도 안 됐거든? 먹어라, 했다가 먹지 말아라, 했다가. 얼마나 어이없었다고.”

화사한 얼굴로 꽃잎 하나를 집어 우물거리던 제니가 의아한 듯 물었다. 쉐이든은 웃으며 내가 등나무꽃을 볶아 먹고 싶다 했던 일화를 잔뜩 과장해 아해들에게 들려주었다.

대꾸하지 않고 내 몫의 요리나 한입 크기로 잘라 입에 넣었다.

도란도란 흩어지는 여러 이야기를 듣다가 몇 마디 첨언하기도 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에른하르트 가의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나보다 쉐이든과 데미안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멋쩍었다.

이 자리에 있는 아이들 모두 아는 꽃 이름이 많았다.

나는 이제 꽃의 이름을 익히고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 약초와 독초 감별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꽃의 이름자를 외우는 일은 가인에게나 어울린다 여겼던 과거를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영 수업을 들은 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그 꽃들의 이름을 알아볼 생각을 않고 있었다.

에른하르트에 심어진 꽃의 이름만 듣고도 그 색을 유추해 낸 제니가 흰 꽃과 분홍 꽃이 가득히 산들거리는 모양새를 상상하여 참 예쁘겠다, 하기에 언제 한 번 초대하겠다 공수표를 날렸다.

이야기를 들은 이반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에, 내가 아니라 내 어미를 생각하고 심은 꽃이라고 딱 잘라 알려 주었다.

내가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와 메이지 볼더를 만나 화요일 오후에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도마 위에 올랐다.

데미안은 1학년인 내가 교수와 독대하는 자리를 가지는 것이 대단하다며 감탄했으나, 쉐이든은 나의 내공심법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나중에 볼더가 제대로 보고서를 꾸리면 한 번 보여 주겠다 언질만 주었다.

학술부와 경영부, 법학부에서 요사이 어떤 과목을 수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각기 이야기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었다.

제니는 황궁 서무부를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역사학, 그중에서도 민생에 대한 것에 꾸준한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다.

이반은 수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데미안은 구시대의 없어져야 할 법률과 새로 제정되어야 할 법률에 대해 열띤 어조로 논설했다.

“그러려면 일단, 졸업 때까지는 지금 성적을 유지해야죠. 3학년이 되면 취업 압박 때문에 다들 미친 듯이 공부하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졸업하자마자 황궁 관리로 뽑힐 수 있다고?”

“그야⋯. 보통 아카데미 졸업하면 열여덟 살이니까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데미안이 보다 상세히 일러 주었다.

“열다섯 살에 사교계에 데뷔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죠?”

“음. 그야 많이 들었으니.”

“시어런 제국에서는 태어난 그 해에 한 살이 되고, 해가 지나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도?”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하하, 혹시나 해서. 어쨌든 그런 셈법으로 열다섯이 되면 혼인이 가능한 나이가 됩니다. 민간에 공표된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매해 12월 첫째 주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에요. 12월 셋째 주에 합격자 발표를 하고, 1월에 있는 데뷔탕트 행사 초대장을 배부해 주어야 하니까요.”

“음.”

“물론 미카엘은 아직 나이가 되지도 않았고, 아카데미 입학시험 대신에 친족의 추천장으로 입학하였으니 모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지만요.”

과연 그랬다.

계절이 지나고 나이를 셈하는 것은 당연히 알았으나, 아이들이 여름에 다 같이 무도회에 갔다 티파티를 했다 떠들어 대는 것이 지난 1월에 이미 시작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열다섯 살부터 혼인 신고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조기 졸업이나 졸업 유예, 유급 등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열여덟 살에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일이 많아요. 그 이후에 2~3년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론이니까, 모두에게 통하는 말은 아니지만요.”

소년이 덧붙인 말이 내 부모를 의식한 것을 빤히 알았다. 이번에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가 냉큼 그 말에 끼어들었다.

“데미안이 말한 건 아무래도 작위를 가진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고, 일반 영지민들의 경우에는 열일곱, 열여덟 살만 되어도 단출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함께 사는 일이 많아요. 각 영지에서 결혼식장을 대여해 주고 있어서 결혼식 자체에는 돈이 많이 들지 않거든요.”

“그럼 제니도⋯?”

“전 열심히 돈 벌어서 부모님 모시는 게 꿈이라니까요. 아직 제 삶에 남자가 없네요.”

하기야 중원에서도 열다섯이면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즈음이면 사내아이는 사내 태를 내고, 여자아이는 여인 태를 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이들이 전부 무인이라 가정을 꾸리는 일보다 자기 수양과 단련을 중요히 여겨 늦되기는 하였으나, 혼인 생각이 있는 이들은 지학(*15세)을 넘기자마자 분주해지고는 했다.

제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민가의 아이들은 열두 살부터 제 밥벌이를 시작한다느니,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않아도 자작가나 남작가에는 열다섯부터 취업할 수 있다느니 하는 둥의 이야기였다.

나는 아해가 상세하게 민가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후에 황실의 관리가 되고 싶다 하는 높은 가문의 아해들이 그 이야기를 무척 진지하게 듣는 것도 좋게 보았다.

남궁세가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세간에서 남궁의 무인들을 높일 때 대남궁세가라 칭하는 것도 당연했다. 직계와 방계의 혈족들을 모조리 합치면 수백이 넘고, 고용한 무인과 부리는 종들까지 다 합하면 일천을 쉬이 넘었다.

남궁정연 시절의 내가 일찍이 무예에 재능을 보여 아무렇지 않게 종들을 부리고 살았으니, 다시 태어나서도 사용인을 부리는 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종과 하인의 위계가 다르고 귀족 가문에서 일을 구하기 위해 어떤 절차를 밟는지 이제야 알았다.

시종과 시녀는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에 필요한 것을 알아 챙기며 보좌하는 것이고, 작위가 있거나 지식을 많이 쌓아야 하는 일이라는 설명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데미안이 제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다.

“제가 하고 싶은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정확히는 황제의 비서실에 있는 법률 자문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법무부에 취업해서 삼 년간 실무를 익히고, 그 뒤로 두 해마다 치르는 승진 시험에 합격해서 네 단계는 승진해야 하겠지만요.”

“⋯허어. 이 년씩 네 번이면.”

“한 번도 미끄러지는 일 없이 승진해도 스물아홉은 되어야겠죠. 승진 시험 한 번에 한 단계만 승급할 수 있으니까요.”

시어런 제국이 워낙에 넓어 그렇게 사람을 뽑아도 인재가 많이 모인다는 설명을 한 뒤, 데미안이 빙긋 웃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얼결에 나 또한 허리를 세워 앉으며 소년을 마주 보았다. 소년은 짓궂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뭐, 저는 미카엘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음?”

“승진 시험에는 추천서를 받으면 가산점을 얻을 수 있거든요. 아무래도 황궁에서 일을 하다 보면 고위 귀족과 연줄이 있을 때 실무에 도움이 되는 일이 많아서요. 나중에 정말로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면 저 추천서 하나만 써 주세요.”

“⋯어어?”

“참 성실하고, 바르고, 올곧은 친구라고.”

“헉, 그럼 저도요! 저도 추천서 필요해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데미안의 말에 제니와 이반도 소란스레 지저귀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렸다.

황궁에서 근무하고 싶어 하는 세 아이 모두에게 꼭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되어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을 아이들이 더 먼저 앞다투어 응원해 주는 것이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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