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볼더와 더글라스를 뒤로하고 아해들과 약속한 대로 마사로 향했다.
나는 벤자민과 팔씨름을 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신에 그와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일에 익숙해졌다. 종종 아이의 손에 힘이 들어갈 적마다 마주 움켜쥐며 쓰읍, 하고 꾸짖는 소리를 내면 곧장 멈추는 것이 귀여웠다.
큼직하고 충직한 개를 기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새외 무림 세력 중에 남만야수궁이라고 하여 갖가지 짐승을 다루는 곳이 있었다.
맹수를 본뜬 무공을 사용하는 그들은 동물들과 대단한 교감을 나누었다. 호랑이며 공작이며 코끼리 따위의 신기한 짐승들을 줄줄이 이끌고 무림맹에 와 손님 대접을 하라 호통친 일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남만야수궁의 궁주가 데리고 온 흑호가 참 부러웠는데, 이제 와 보니 그 주인도 고생이 많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인 벤자민이 이렇게 귀찮게 구는데, 진짜 짐승을 다루는 일은 더 할 터였다.
간간이 내 손을 대신하여 벤자민에게 날계란 따위를 쥐여 주었다.
처음에는 손에 쥐는 족족 계란을 깨트려 낭패를 보던 벤자민은, 내가 몇 번 계란을 높이 던졌다 받는 것을 시범을 보여 주니 곧잘 따라 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는 것을 보고 서커스에 입단하라며 박수를 치던 쉐이든도 끼어들어, 수업이 끝나면 마사에 둥그렇게 앉아 계란을 가지고 놀았다.
벤자민은 간간이 비장한 표정으로 당근을 손에 쥐고 일어나 마사를 순회하며 당근을 받아먹을 말을 골랐다.
그 덕분일까. 수요일 명마 예찬론 시간에는 말 한 마리가 벤자민의 어깨를 콧잔등으로 먼저 툭 건드리는 일이 있었다.
벤자민이 안장을 채우도록 허락해 주었던 검은 수말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어도 벤자민이 구걸하듯 당근을 내밀자 한숨을 폭 내쉬며 히힝 소리를 내는 것이 꼭 사람 같았다.
벤자민은 그 수말의 이름을 빅토르라고 짓고 하루 내내 그 이야기를 했다.
가까이 다가올 때 호흡이 어떠했다느니, 제게 친근하게 구는 걸 보니 마음을 연 것이 분명하다느니 하고 흥분한 것을 구태여 진정시키는 대신 고개나 끄덕여 주었다.
목요일 비도술 수업에서는 이제 요령을 찾아 5m 과녁을 제대로 맞힐 수 있게 되었다.
월턴 로버츠 교수는 10m 과녁 사용을 허락해 주며 손에 힘을 분배하는 법에 대해 다시 한번 충고해 주었다.
* * *
매달 셋째 주 금요일의 야영 수업에서는 연금술 실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바로 지난주에 들판으로 현장 실습을 나가 구해 온 재료들이었다.
평야에 자라는 수십 가지 약초 중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하고, 그렇게 채취한 재료로 제조할 수 있는 연금약을 직접 찾아내 완성하는 것이 이달의 목표였다.
데미안과 제니가 머리를 맞대어 만들어야 할 약을 미리 정해 온 덕에 순서대로 재료를 빻고 으깨고 잘라 섞기만 하면 됐다.
나는 아이들이 옮겨 적어 온 제조법을 꼼꼼히 살폈다.
이전에는 여린 재료들을 괜히 망칠까 겁이 나 못하겠다고 뒤에 앉아 아이들이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벤자민도 힘 조절을 하느라 매일 애를 쓰는데, 나잇살 먹은 내가 아이들에게 일을 다 시켜두고 노는 것이 마뜩잖았던 탓이었다.
실제로 손을 대 보니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나는 끓는 물에 유리병을 넣어 소독했다.
민돌란꽃은 이상 출혈을 잡는 데도 사용되었지만, 얼굴이나 손에 바르는 크림의 재료이기도 했다.
다시 태어난 이후 내내 분이나 크림 따위로 얼굴과 손을 곱게 가꾸는 일을 보아 왔기에 내게도 그리 낯설지 않았다.
약초로 사용할 때는 꽃을 잔뜩 모아 꽃잎째로 사용하였으나, 화장품을 만들 때는 그 즙을 짜서 사용한다고 제조서에 적힌 것을 읽었다.
다만 해당 재료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모양을 낸 꽃잎을 병 안에 동봉하는 것이 규칙이란다.
그리하여 꽃잎을 정해진 규격의 크기에 맞춰 소독된 유리병 안에 넣는 일도 내가 맡았다.
붉은 꽃잎이 워낙 작고 여린 편이라 손가락보다 조금 긴 나이프를 사용하는데도 쉽게 찢어졌다.
세드릭에게 물어보니 오러나 마나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재료라 하여, 실처럼 가느다란 오러를 뽑아내어 사용했다.
내 칼 놀림을 본 데미안이 크게 경탄하며 여러 모양을 만들 것을 주문하여, 꽃 모양, 나뭇잎 모양, 별 모양, 고양이 모양, 새 모양 따위로 꾸밈새 있게 도려내었다.
꽃과 별은 쉽게 알아본 아해들이 고양이와 새를 두고 사자다 용이다 허튼소리를 하기에 웃어넘겼다.
장난치지 말라고 세드릭에게 혼이 나 다시 약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다행스럽게도 제시간에 만들기로 한 것들을 다 만들 수 있었다.
우리 조는 민돌란꽃을 사용한 로션과 낙세트등풀과 율솜버섯을 섞어 만든 배탈약을 만들어 제출했다.
몇몇 조는 시간이 오래 걸려 수업 시간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제니가 그들을 돌아보며 의기양양해했다.
“일부러 처음부터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은 약물 레시피는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만드는 데도 오래 걸리고, 실수라도 하면 완성도가 떨어질 게 분명하니까.”
“과연.”
“이제 뭐 해요, 미카엘? 다음 야영을 위해 같이 장 보러 갈까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내가 제니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마리앤이 가방을 챙겨 들고 벌떡 일어났다.
아직 뒷정리가 조금 남았지만 아해가 꼭 있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어쩐지 급하게 일어서는 기색이라 말리지 않고 배웅했다.
놀러 가자는 데에 빠질 녀석이 아니라 잠시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제니는 그런 마리앤의 뒷모습을 보며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앤은 오늘 글로틴 테너 영식이랑 선약이 있대요.”
“글로틴이면.”
“네, 이번에 마리앤의 피앙세가 된 그분이요.”
우리처럼 쉬운 제조법을 골라 제시간에 약물 배합을 마친 쉐이든이 나를 부르러 다가오다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
녀석의 손이 책상 위를 탁 내리치는 서슬에 비커 하나가 떨어질 뻔하여 얼른 잡아 세웠다. 쉐이든의 앳된 얼굴에 장난기가 흠씬 스며들었다.
“그럼 우리, 마리앤 구경 갈까요?”
“예? 그래도⋯ 괜찮을까요?”
“뭐 어때요. 어디 가는지는 알아요?”
“식물원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냥 우연히 식물원에 놀러 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오늘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니까, 다 같이 나갈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래요?”
데미안과 이반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나 또한 마리앤의 정인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몰래 뒤를 밟는 것이 저어하여 내키지 않아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해들이 머뭇거리자 쉐이든이 자, 자. 하며 테이블을 탕탕 두드렸다.
떨어지려는 샬레 하나도 잡아 도로 올려 두었다.
“그럼 거수로 정해요. 다들 눈 감고, 한 번 가 보자 하는 사람 손 들기.”
“⋯.”
찬성만 다섯 표였다. 만장일치로 아해들 모두가 시어런 국립 식물원에 가게 되었다.
시어런 제국의 땅덩이가 중원과 비견하게 드넓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간혹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건물을 보면 깜짝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이 국립 식물원도 시어런 아카데미처럼 그 크기가 유난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었다. 노을빛을 받아 유리로 된 온실 여럿이 반짝이며 사방으로 빛을 뿌렸다.
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니와 쉐이든이 신난 얼굴로 표를 사 와 아해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손목에 감게 되어 있는 종이띠 모양의 출입증을 처음 매 보는 내가 헤매자, 곁에 서 있던 이반이 도와주었다.
식물원의 입구는 마차 여덟 대가 동시에 지나다닐 수 있도록 넓게 터 두었는데, 오른편은 들어가는 길이고 왼편은 나가는 길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 방향으로 걷도록 되어 있어 이토록 사람이 많은데도 혼잡한 것이 덜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마리앤을 찾으려고.”
“자, 보자. 국립 식물원에는 걸어 다닐 온실이 여럿 있지만, 앉아 쉴 곳은 정해져 있단 말이야. 온실 두 군데를 들리고 바로 여기 레스토랑 거리가 있잖아. 식사하던 중에도 마주칠 수 있을걸. 만약 레스토랑에서 못 만나면 그다음에 여기. 여기 가 보자.”
언제 챙겨온 것인지, 조그마한 지도를 쫙 펼친 쉐이든이 어느 한 곳을 짚었다. 아해가 무척 신난 것이 보여 헛웃음이 샜다.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린 이반이 곧장 대답했다.
“꽃의 정원 카페테라스군요. 좋은 생각입니다.”
“그걸 어찌 알아?”
“마법 조명 장치가 유난히 많은 곳이거든요. 해가 진 다음에 그 풍경이 무척 예뻐서, 데이트 필수 코스라고 들었습니다.”
“와⋯. 한 번 가 보고 싶긴 했는데, 이 멤버로 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니가 까르르 웃으며 쉐이든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았다.
처음 와 보냐고 물었더니, 입장료가 비싸 시험공부 중에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니의 반응을 보아하니 식물원의 입장료는 쉐이든이 전부 계산한 듯했다.
곳간이 넉넉하니 인심 또한 좋았다. 나도 부모의 후광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오니 좋군요. 저녁 식사는 제가 사도록 할 테니, 제니 좋은 곳으로 갑시다.”
“네? 와, 정말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이런 곳은 저보다 제니가 더 잘 알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내 뜻을 알아챈 다른 아해들도 곧장 수긍하여, 함께 온실을 돌아보다가 식사를 하고 나서 마리앤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얼떨결에 따라왔으나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짙은 풀 내음이 훅 끼치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메뉴를 고심하는지, 제니가 지도 뒷면의 레스토랑 목록을 보며 데미안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다.
데미안은 조곤조곤 이 음식은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어떻게 조리하는 것인지 제니에게 설명해 주었는데, 서로 스스럼없는 모습이 어여뻐 좋았다.
첫 번째로 들어선 유리 돔 내부는 서늘했다.
사철 푸른 나무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맵시 좋은 나무들 앞에 네모난 팻말이 하나씩 걸려 있었는데, 각 식물의 이름과 학명, 생김새와 서식지 따위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었다.
실제 나무와 설명표를 번갈아 볼 수 있으니 알아보기가 쉬워 무척 좋았다. 나는 한 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내가 이 공간을 무척 좋아하게 될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