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마엘로 샌슨의 말이 길어지자 아해들이 여기저기 털썩털썩 맨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큼직한 덩치의 마엘로 주위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은 아해들의 얼굴이 천진했다.
조금 전까지 죽을 듯 달려들던 무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랑 특수제국기사단에 자원했지. 지원금도 지원 물품도 넉넉하고, 유일 산맥을 경험해 본 숙련된 기사들과 함께 이동해서 개인 토벌보다는 안전하다고 들었거든. 내 인생 최대로 즐겁게 고생했지. 몇 번을 죽을 뻔했는지⋯.”
“⋯.”
“유일 산맥에 들어가기 전에는 사망 동의서와 유서를 작성하는 절차가 있거든. 말린다고 안 갈 놈들이 아닌 건 아니까, 미리 유서에 뭐라고 써 둘지 고민해 두라고.”
“중도 포기도 되나요?”
“되겠어? 혼자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다른 기사들이랑 불침번을 서가면서 서로의 등을 지켜주는 게 더 나아. 한 번 산맥에 들어가면 정해진 일정을 다 수행하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어서 못 볼 꼴도 많이 봤지.”
마엘로 샌슨이 갑자기 제 왼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한여름에도 살이 타는 것을 막겠다고 긴소매를 입는 샌슨이었다. 때문에 그의 맨팔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쭉 뻗은 왼팔의 하완이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이건 유일 산맥 삼 년 차에 얻은 훈장이지.”
“어떤 몬스터에게 당한 상처인가요?”
“나한테.”
“예?”
마엘로 샌슨은 껄껄 웃었다.
그 웃는 모양새가 묘하게 연금술과 야영 교수인 세드릭을 닮아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 둘이 친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엘로 샌슨이 목소리를 낮추어 아이들의 집중을 모았다.
“유일 산맥에서의 토벌은 보통 여덟 명이 한 조를 꾸리고, 두 조나 세 조가 함께 이동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정찰을 위한 이동을 할 때는 보통 두 명에서 세 명이 이동해. 몬스터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본진으로 되돌아가서 보고해야 하고.”
“⋯.”
“그런데, 삼 년쯤 되면 사람이 건방져진단 말이야.”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제 실력을 과신하여 큰일을 당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 어떤 사냥꾼이 토끼에게 잡아먹힐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해가 넘도록 무탈하게 몬스터를 사냥해 왔던 어린 마엘로 샌슨은 자만심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트롤에게는 재생 능력이 있긴 했으나, 그들은 보통 무리 지어 돌아다니지 않았다. 당시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던 마엘로 샌슨은 시간만 들인다면 트롤 한 마리 정도야 혼자서도 충분히 토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트롤 중에서도 무리 생활을 하는 부족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지 뭐야. 순식간에 동굴이며 나무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같이 간 친구랑 다른 방향으로 도망을 쳤어. 그놈은 본진 쪽으로 잘 찾아갔는데, 난 친구랑 반대 방향으로 뛰어간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절벽 앞이더라고.”
“⋯.”
“어쩌겠어, 무작정 뛰어내리면서 손가락을 절벽에 박아 넣었지.”
그 서슬에 팔이 부러졌는데, 어쨌든 살겠다고 부러진 팔로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고 했다.
절벽 중간에 있는 빈 동굴을 발견한 것은 천운이었다. 그 당시에는 의료용 아티팩트가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처 회복에 시일이 걸렸고, 그동안 트롤 무리를 격퇴한 기사단 일행은 주변을 돌다가 마엘로 샌슨이 사망했다고 추정하여 약식 장례까지 치렀다고 했다.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돌아본 샌슨이 씩 웃으며 이어 말했다.
“너희들도 가지 말라고 해도 유일 산맥에 기어들어 갈 것을 알아서 하는 말이야. 만약 절벽에서 뛰어내릴 일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는 손을 박아 넣도록 해. 그때 내가 오른팔이 부러졌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예.”
“또, 미리 유일 산맥에 어떤 몬스터가 있는지 알아두고 그 부족적 특성에 대해 미리 배워두는 것도 좋다. 아카데미 수업 중에 몬스터학 개론이나 몬스터 일람, 뭐 이런 게 있을 테니까 찾아봐.”
“예!”
과연 참스승이었다. 다음 학기에 들어야 할 수업 하나를 마음속에 굳게 정해 두었다.
* * *
점심 식사를 끝마치고 더글라스 머스탱의 교수실로 향했다.
오늘은 더글라스에게 진기도인을 해 주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정좌하고 앉는 것이 어색하니 차라리 무릎을 꿇으면 안 되겠냐 애걸하던 머스탱 교수였다. 그가 제법 능숙한 자세로 바닥에 정좌해 앉은 것을 보니 무척 귀엽고 흐뭇했다.
다 큰 어른을 보며 놀리면 안 될 것 같아 웃음을 꾹 눌러 참고 그의 등 뒤에 앉았다.
메이지 볼더가 그 옆에서 필기할 준비를 마치고 눈을 빛냈다.
흘깃 보니 지난번 진기도인을 하며 함께 적은 것을 저 홀로 연구하고 설명을 추가해 보고서로 꾸며 온 모양이었다. 머리를 쓰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 굳이 말을 덧대지 않고 나 할 일이나 했다.
더글라스 머스탱은 메이지 볼더보다 몸 안의 혈도가 잘 닦여 있어 내공을 수발하는 일이 훨씬 쉬웠다. 기맥이 탄탄하고 근골이 강건하여 내친김에 대맥이 아닌 세맥으로도 천천히 기운을 이끌어 주었다. 그 탓에 운기가 끝났을 때는 볼더보다 더욱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러니까, 이게⋯.”
“신체 내부에 쌓여 있던 탁기가 밀려난 것입니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야, 저는 매일 아침 운기하고 있으니까요.”
신체가 강건하고 깨끗해야 더 높은 경지를 볼 수 있기에, 나는 다시 태어난 후 매일 한 번 이상은 꼭 시간을 두어 내부를 관조하고 있었다.
지난 생의 어릴 적에는 몸이 지치고 끈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중원의 친구들이 십 년만 젊었어도 꼭 이렇게 하겠다, 하고 염불처럼 되뇌던 일을 꾸준히 실천하는 중이니 더글라스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더글라스는 노폐물을 닦아 내기 위해 샤워실에 가는 내내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이 둘에게 먼저 실험해 보니 운기조식법을 가르치진 못하더라도 시어런에서 내가 친애하는 이들에게 진기도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메이지 볼더가 이런저런 사담을 걸어오는 것도 불편하지 않았다.
기의 흐름과 움직임에 대한 것은 더글라스 머스탱이 와야 함께 토론할 수 있어 대부분 상대적으로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볼더가 개발한 아티팩트의 품목, 특기로 삼은 마법,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그저 묵묵히 듣다가 메이지 볼더 또한 유일 산맥에 가 본 적이 있다는 말에 관심을 보이니, 볼더가 소리 내어 하하 웃었다.
“역시 에른하르트 영식도 검술부원은 검술부원인 모양이에요. 지금까지 했던 얘기 중에 가장 좋은 표정이었어요, 방금. 뭐가 궁금해요?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해 드릴게요.”
“음. ⋯산맥 주변은 꽤 위험하다고 들었는데요.”
“시어런 제국과 유일 산맥 사이는 위드로 공작가와 그림스베인 공작가가 단단히 경계를 지키고 있어서, 시어런 제국의 국경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그럭저럭 괜찮아요. 게다가 저는 전투 마법사가 아니라 연구 마법사라서, 보통 전투가 일어날 때는 용병들 사이에 숨어 있었거든요.”
“몇이나 고용했기에?”
“열 명 정도가 보통이죠. 저는 안전 제일주의라서 열다섯 명까지는 고용해 봤어요. 유일 산맥에 갈 정도의 용병은 몸값이 높아서 그 이상은 힘들거든요. 요즘 시세는 잘 모르겠지만.”
볼더가 이런저런 예시를 들며 용병을 고용하는 비용과 방법을 설명해 주길래 듣긴 했으나, 지난 생에서도 호위가 필요하지 않았던 나였다.
표사를 고용해 본 적이 없으니 이 땅에서 사람값이 비싼지 헐한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금액 따지는 일에 약한 모습을 보이자 볼더는 곧 화제를 바꾸었다. 제가 가 본 위험 구역들에 대한 설명이었다.
말이 많은 이들 중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볼더는 목소리를 흉내 내거나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실감 나게 이야기하는 것을 무척 잘했다.
볼더가 함께 여행한 용병단의 이름은 흰사자 용병단이라고 했다.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볼더는 자신이 만난 용병들이 얼마나 사내답게 사는지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그중 어떤 친구는 무려 석 달을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수염을 깎지 않았다니까요. 식사할 때마다 이게 빵을 먹는 것인지, 수염을 뜯어 먹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요. 수염을 기를 적에도 그 모양을 잘 잡아서 맵시 있게 다듬어야 맞는 것인데.”
“석 달 뒤에는 깎았습니까?”
“네에, 마을 들어오는 길에요. 그 이유가 또 웃기다니까요.”
“음?”
“산맥에서는 털을 좀 길러야 짐승처럼 보여서 몬스터가 저를 잘 못 본다나. 아니, 키가 이따만하고 어깨가 이따만한데 그걸 어떻게 못 보고 지나가요, 어떻게. 웃겨가지고.”
과장된 목소리와 몸짓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메이지 볼더는 마법사로서도 우수한 인재겠지만, 이야기꾼을 한다면 천금을 벌었을 것이다.
한참을 흰사자 용병단원들의 막되어 먹은 행태에 대해 떠들어대던 볼더가 섀턴 사막에 다녀온 이야기를 꺼낼 무렵 더글라스가 돌아왔다.
한 번 씻은 걸로는 몸에서 냄새가 다 가시지 않아 여러 차례 닦아 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기에 괜찮다 답해 주었다.
나는 볼더가 가져온 인체도 위에 선을 그어가며 내가 운기조식을 할 때 내공을 돌리는 혈도와 볼더와 더글라스에게 진기도인을 해 줬을 때 사용한 혈을 대강 짚어 설명해 주었다.
내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두 머리 좋은 사내가 함께 궁리하니 답을 찾는 일에 진전이 있었다.
둘은 운기조식의 원리는 이해했으나 내가 직감적으로 사혈(*내공을 실어 짚으면 죽는 혈도)을 피해 내공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신기하게 여겼다.
반쯤은 직감이 맞았으나, 또 반쯤은 이미 점혈법(*인체의 특정한 혈도나 경락을 짚어 적을 무력화하거나 고문하는 무공)을 배운 덕분임을 알렸다.
메이지 볼더가 겁도 없이 자신의 몸에 실험해 달라 조르기에 아혈(*내공을 실어 짚으면 말을 하지 못하는 혈도)을 짚어 주었더니 또 좋아 까무러치는 것이 기가 막혔다.
손에 내공을 실어 혈도를 점하는 모습을 열심히 지켜보던 더글라스 머스탱이 곧잘 따라 하는 모습에는 적잖이 감탄했다.
남은 시간 동안은 인체 도해에 내가 아는 혈도의 이름과 기능을 빼곡하게 채워 넣느라 바빴다.
가까이 앉은 더글라스 머스탱에게서 기분 좋은 비누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