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오늘도 볕이 좋았다. 드높은 하늘의 어느 구석을 보아도 맑고 푸른 빛이 가득하여 산책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운 바람이 머리를 쓸고 지나가, 다시 한번 복슬복슬한 머리칼을 쓸어 넘겨야 했다. 거추장스럽게 시야를 가리는 것을 보니 한 번 자를 때가 왔나 싶었다.
말을 하는 것보다 몸을 쓰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루베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동안 소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보다는 저 멀리서 재잘거리는 아해들의 웃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렸다.
뺨에 흘긋 와 닿는 시선을 알았다.
경지에 오른 무인은 잠깐의 시선도 또렷하게 느낀다는 것을 모를 아해가 아닌데도 아주 짧은 시간 내 얼굴을 훑어보다가, 시선이 마주칠 것 같으면 얼른 고개를 바로 하는 것이 우스웠다.
눈치만 보며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하는 루베르를 대신하여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늦게 잤습니까?”
“어? 음⋯. 아니, 그냥⋯. 오늘 꿈에.”
“꿈에?”
“⋯좋은 꿈을 꿔서, 일어나기 싫었던 것⋯ 같아.”
녀석의 목소리 끝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디에서 이런 목소리를 또 들은 것 같았는데, 싶어 생각하던 중 마리앤 필로덴도르의 해맑은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마리앤이 글로틴 테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꼭 이렇게 꿈꾸듯 축축한 목소리를 했다.
궁금한 마음이 일어 루베르의 뺨을 올려다보았다. 화들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눈가가 붉었다.
처음 산책을 나서던 길보다는 붉은 기가 가신 얼굴이었으나 수줍은 기색은 여전했다.
“좋아하는 사람?”
“아니!”
녀석이 크게 부정하며 펄쩍 뛰어 깜짝 놀랐다.
“아니면 아닌 게지, 왜 소리를 지릅니까.”
“아, 아냐. 좋아하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좋은 꿈이었는데요.”
루베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손으로 제 눈가를 눌러 가리며 웅얼거렸다.
“⋯검술 수련을 했는데⋯.”
“아.”
그런 것이라면 꿈속에서 정인을 만나는 것보다 일어나기 싫을 법도 했다.
중원에서도 종종 꿈의 형태로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다. 크게 수긍하여 경지에 도움이 되었느냐 물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꿈속의 일을 여러 차례 상기하는 것도 수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어쩐지 루베르 안티 시어런이 또다시 시름시름 시든 꽃 같은 표정을 했다.
볕이 좋아 도로 도서관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하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한 벤치에 앉아 유인물을 펼쳤다.
노트 필기를 정돈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었으나 유인물을 한 장씩 넘겨 가면서 루베르의 설명을 듣는 것도 좋았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의 수업은 글월을 외는 듯 핵심만 딱딱 짚어 주는 식인 반면 루베르는 이런저런 부연 설명이나 여러 예시를 곁들여 주니 더욱 그랬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리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나이가 들면 구름을 보아도 제 자식 생각이 나고, 먹을 것을 보면 제 손주 생각이 나는 법이었다.
마리앤이 제 혈육은 아니지만 근래 어여쁘게 굴며 애교 있게 재잘거리는 일을 잘하다 보니 그 아이의 일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앤에게 글로틴 테너를 소개받고 싶다고 넌지시 한 번 떠본 적이 있었다.
마리앤은 처음에는 좋다더니, 나중에는 부끄러워 안 되겠다며 저와 글로틴이 더 가까워진 뒤에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만들겠다 선언했다.
그 전에는 따로 찾아가거나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다짐을 받기까지 했다.
그 탓에 홀로 글로틴 테너를 찾아가지도 못하게 된 나는 손주 사윗감의 평판을 알아보는 조부처럼 전전긍긍했다.
루베르에게 글로틴 테너에 대한 일을 묻자 아이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 그 둘이⋯.”
“그래, 테너 영식에 대해서도 잘 압니까?”
“모르지는 않지. 아무래도 종종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그 아이가 참 착하고 좋은 녀석이라고는 하는데,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어 어떤 이인지 궁금합니다.”
“음⋯. 그건 내가 좀 더 알아보고 말해 줘도 될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어서.”
고마운 일이었다.
쉐이든의 말로는 루베르 또한 사람 보는 눈이 좋아 좋은 사람들을 곁에 잘 둔다 했다.
이 기회에 글로틴 테너가 루베르의 눈에 든다면, 나중에 마리앤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제 뜻을 펼치는 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있었다.
묵묵히 내 말에 맞장구를 치던 루베르가 문득 이상한 것을 물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
“정인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거나 하는⋯. 그런 거 없어?”
“글쎄. 전 혼인 못 할 것 같은데요.”
“어?”
“음?”
아해가 지나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에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서글서글한 눈이 왕방울만 해진 것이 우스워 피식 웃었더니 얼굴을 붉힌 녀석이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노트와 책 따위가 와르르 떨어졌다.
당황한 녀석이 주섬주섬 떨어진 것들을 줍는 동안 말이 멎었다. 나도 도왔다.
“아, 아니. 좀 놀라서. 왜⋯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해?”
“글쎄요.”
지금 내 몸과 정신의 나이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어 입을 닫았다.
지금 내 몸의 나이가 열셋이었다. 시어런의 풍습에 따라 정인을 고르자면 위아래로 열 살 터울 이내가 적당할 터인데, 겨우 스무 살 남짓한 처자들과 혼인할 자신이 없었다.
더 어린 시절에는 나이 들어 혼인을 하고 자손을 보는 것이 장손으로 태어난 의무라고 여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른하르트의 이름을 미하엘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려면 나는 자손을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내 답을 기다리는 루베르의 낯이 울그락불그락한 것을 보며 녀석 또한 지학의 어린 청년임을 알았다. 딱 좋을 때지. 그런 마음이 들어 자연스럽게 웃는 낯이 되었다.
“일단⋯ 제가 연모의 감정을 잘 모르는 까닭입니다. 받은 사랑을 그대로 돌려주지 못할 테니까요. 제가 미숙한 탓에 곁에 둔 상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결혼 생각이 없는 거야?”
“아마도.”
얼굴 모를 어린 것을 옆에 끼고 은애한다 사랑한다 속삭이는 저를 생각만 해도 민망하고 머쓱한 마음이 들어 학을 뗐다.
다 늙어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을 것이다. 그런 대죄를 저지른다면 면벽동에 들어가 석 달 열흘은 벽곡단만 먹고 찬물에 몸을 씻어내야 할 것이라 여겼다.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자, 아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설마 남자를⋯.”
“예? 무슨 그런 말을.”
“아. 아, 미안. 아니, 그⋯. 혹시나 했어.”
놀라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동시에 이곳 시어런에서는 연모의 감정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루베르를 보고 알았다. 여인과 혼인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 혹여 남자를 좋아하느냐 묻는 아이의 태도가 스스럼없었다.
중원에서도 단수라 하여 사내끼리 정인을 맺는 일이 있다고는 하였으나, 가까이에서 본 일이 한 번도 없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게는 현무나 기린에 대한 이야기처럼 아득하니 먼 일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물음에 곤혹스러웠으나, 루베르가 몇 번을 연거푸 사과하기에 괜찮다 달랬다.
“그러는 선배는 이상형이 어찌 되십니까?”
“나? 나는⋯. 예쁘고 강한 사람이 좋은 것 같아.”
“하기야,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이면 강인한 사람이 좋겠군요.”
“응⋯.”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하고 어깨를 도닥여 주었더니, 녀석이 부끄러운 낯을 가리려는지 양손으로 얼굴을 폭 덮었다.
그 귀가 또 발갛게 달아 있는 것을 보고 웃지 않으려 애썼다.
날이 어둑해질 즈음 해서는 아이와 함께 도서관으로 돌아가 미진한 노트 정리를 마저 했다.
루베르가 집중하여 공부하는 동안 고개 한 번 드는 일이 없기에, 녀석이 훌륭한 황제감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흡족했다.
* * *
학기가 시작하고 벌써 삼 주차 월요일이었다.
오늘도 초급 검술 시간에는 형과 식을 연습했다. 어느 아해가 언제까지 검식의 형을 바로 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대경했다. 검을 수련하는 일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가르치는 입장이었다면 크게 꾸짖었을 터였다.
다섯 살에 검을 처음 잡아 마흔이 넘도록 매일같이 검을 손에서 뗀 적이 없는 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내 검이 옳은 선을 그리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르고자 하면 끝없이 바르고, 삐뚤고자 하면 끝없이 삐뚠 것이 검이었다.
게다가 이곳 시어런 아카데미의 검술부 수업에서는 한 가지 검법만 익히지 않는다. 여러 검법을 두루 보아 몸에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니만큼 검식의 완성은 더더욱 막연했다.
검기상인(*검기를 만드는 기술, 초절정 혹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면 사용할 수 있다)에도 이르지 못한 아해가 어찌 끝을 논한단 말인가.
당연히 죽는 날까지 갈고 닦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여 기분이 상한 나와 달리 마엘로 샌슨은 다정히 대꾸했다.
“다음 달이 되면 이제 지금처럼 훈련한 검식을 사용하여 대련하는 법을 배워야겠지.”
“대련이요? 교수님이랑요?”
“나랑 싸우고 싶어?”
“아니요!”
질색하는 아해의 반응에 다른 아이들이 와르르 웃었다. 나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비슷한 수준을 가진 검사들끼리 많이 대련해 봐야 보는 법도 늘지. 대련 상대를 바로 옆에 두고 어디에 한눈을 팔아? 서로의 검식을 잘 보고 익혀 둬. 옆에서 보는 검과 앞에서 보는 검이 많이 다를 테니까.”
“예!”
질문한 아해가 싹싹하게 대꾸하고 처음처럼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풀렸다.
아직 나이가 어려 생각의 깊이가 얕은 것을 가지고 일일이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을 삼키고 나 또한 내 검을 바르게 긋는 데 열중했다.
고급 검술 수업 시간에 이미 신물 나게 대련을 경험해 본 나였다. 과연 옳은 가르침이었다. 특히나 삼류, 이류의 하급 검수들을 이끌어 가는 방법으로 아주 훌륭했다.
체력을 먼저 기르고, 검법을 다듬고, 대련을 하고, 합공을 배우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무척 매끄럽고 본받을 만했기에 나 또한 단단히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에른하르트 가의 목련기사단을 훈련할 적에 참고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