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겉껍데기에 지글지글 기름이 끓도록 익힌 햄을 큼직한 전용 곡도로 뭉텅뭉텅 썰어낸 이반이 내게 접시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일전에 키아드리스와의 대련에 이겼을 때 얻어먹은 적이 있던 시어런 전통 음료도 데미안이 챙겨 왔다며 한 잔 넘치게 따라 주었다.
얼른 입에 댔는데도 손가락 사이로 진득한 액체가 차게 흘러내렸다.
달달한 포도 과즙 사이로 흠씬 스미는 계피와 정향, 육두구의 향이 혀끝에 서걱이며 와닿았다.
일렁이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앉아 감칠맛 나게 뜨끈한 고기와 살얼음이 언 음료를 마시고 있는 여름 저녁이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기웃기웃 구경하러 온 세드릭 교수에게도 한 접시 크게 덜어 주었으나 고기가 한참 남았다.
나중에는 고기 냄새를 맡고 온 학우들이 청하길래 그 큰 돼지 뒷다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잘 익은 부분을 골라 내민 접시에 얹어 주었더니, 저들도 은혜를 갚겠다며 단호박 타르트나 초코 퍼지 따위의 디저트를 내밀어왔다.
우리는 사양하지 않고 전부 받았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거렸다.
마리앤이 자꾸만 아이들의 연애사를 캐묻는 것을 보니 무어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여, 네 이야기나 해 보라고 운을 뗐더니 얼른 몸을 사리는 것이 우스웠다.
“아, 그치만 부끄럽단 말이에요. 어쩐지 이런 모닥불 앞에서 얘기하면 더 보고 싶어질 것 같아서 싫어요. 말 안 할래요.”
“보고 싶어요?”
“와, 지금도 보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
“오늘은 왜 머리에 리본 안 매고 왔어요? 테너 선배가 없어서?”
“이 사람들이 정말!”
평소 조용하던 이반까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입을 모아 놀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더니 마리앤이 내 어깨를 퍽퍽 두드렸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프지 않아 그냥 두었다.
식기를 씻고 정리를 하는 것도 여럿이 하니 금방이었다.
데미안과 마리앤이 그릇을 씻으러 갔고, 나는 노지에 버려도 될 것들을 맡았다.
야영지 근처에 살점 붙은 뼈다귀를 버리면 들개나 야생 짐승이 찾아올 수 있다고 세드릭이 미리 조언해 준 덕분이었다.
이반이 함께 가겠다 하는 것을 걸음이 느려 안 된다고 거절했더니 5년이면 되겠냐고 물어 어리둥절했다가, 지난 학기에 이반이 내게 경공을 배우고 싶어 했던 것을 스치듯 떠올리고 한참 고민했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이반이 한숨을 쉬며 취소하기에 나 또한 없던 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뼈다귀를 멀찍이 버리고 돌아오니 잘 준비가 다 끝나 있었다.
같은 조 아이들과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자리에 누웠다.
지붕 없이 침낭에 쏙 들어가서 잠드는 일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세드릭이 지난 학기에 자신했던 그대로 포근하고 안락한 침낭이었다. 침낭은 얼굴 부위가 트여있고 서로 요철이 완전히 맞물리는, 여밈으로 닫는 형식이었다.
나비 고치 같은 것에 몸만 집어넣은 채 잠을 청하니, 푹신한 침상 위에 누운 것처럼 따뜻하여 서늘한 주변 기온에도 조금도 춥지 않았다.
드넓은 초원에 드러누워 올려다보는 밤하늘에는 낯선 별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시어런에 와서 이렇게 많은 별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중원에서의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먼 길을 내달렸기에 밤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많았다. 일찍이 별자리를 익힌 덕분에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별을 보고 방향을 정하는 일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하늘 한켠에 드리운 화려한 빛의 강과 붉고 노란 색으로 번뜩이는 커다란 별, 그 사이에 둥글게 떠 있는 두 개의 달은 몇 번을 보아도 낯설었다.
아니, 이제 이것 또한 배워야 할 일이었다.
전생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의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을 알았다. 아카데미에 와서 배운 것 중 가장 중하고 장한 일이 이것이었다.
배움에 대한 두려움을 잊는 것.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하며 잠을 청했다.
먼 곳에서 밤새가 우엉우엉 일정한 박자로 우짖었다.
풀벌레 소리,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아해들의 목소리, 타닥이며 저 홀로 타오르는 모닥불 소리 따위가 귓전에서 함께 잠이 들었다.
새벽같이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나를 깨우려 손을 뻗던 데미안이 웃는 낯으로 속삭이며 아침 인사를 했다. 나 또한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졸린 눈을 한 데미안이 다시 침낭으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보다가 불쏘시개로 쓰던 막대로 모닥불을 한 번 뒤적여 불씨를 키웠다.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불침번의 마지막 자리를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은 터였다.
푹 자고 일어나 아침 이슬 내려앉은 풀잎과 멀리 동이 트기 시작하여 희끗희끗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대자연의 정기가 폐부 깊숙이 스미는 듯하여 좋았다.
검을 쥐고 일어서서, 아해들이 자는 자리를 피해 섰다.
창천무애검법의 제1식을 바로 펼쳤다. 문득 메이지 볼더가 내게 물었던 것이 심상에 걸렸다. 하늘의 기운을 품는데 땅의 기운은 품을 수 없느냐 하는 말을 처음 들었을 적에는 얼척이 없었으나, 지금 생각하기로는 합당한 의문처럼 느껴졌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꽂듯 하던 검식을 역순으로 펼치려 하니 쉽지가 않았다.
단단히 쥔 검을 좌에서 우로 반듯하게 빗겨 치고 다시 한번 자세를 잡았다.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려다 보니 검식 하나하나가 느리고 조용했다.
멀리 휘두른 검에서 쏘아진 검풍에 드러누운 풀잎들은 상한 기색 없이 산들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나둘 등 뒤에서 잠 깨는 소리가 들리기에 뛰놀던 것을 멈췄다. 약하게 내공을 발산하여 땀을 식히는 것을 본 아해들 중 몇이 박수를 치기에, 장난치는 것을 알아 피식 웃고 말았다.
모두 잠에서 깨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위해 짐 정리를 했다.
마차로는 세 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한 길인데, 어린 아해들이 구보로 걸어가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아해들은 세드릭이 상태를 보고 마차에 탈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는 했지만, 이 구보 행진까지도 태도 점수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아득바득 걸어가기를 택했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아이들의 짐을 모아 들게 되었다. 저 먼발치에서 나와 똑같이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쉐이든을 보았을 때는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웃어요, 미카엘?”
“다른 검술부 학생들도 다 짐꾼이 되어 있기에.”
“어어, 정말.”
“그중에서 미카엘이 제일 안 힘들어 보이네요⋯.”
“힘들지 않으니까요.”
이제 요령이 생겨 차곡차곡 생존 배낭 두 개에 모든 짐을 넣는 데 성공한 내가 양어깨에 가방을 하나씩 메고, 약초 상자를 앞으로 들자 마리앤이 또 살갑게 달라붙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대체 왜 괜찮지? 이건 연구할 필요가 있어요.”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세요.”
“으응. 조용히 걸을게요.”
그러나 아카데미로 가는 길 내내 조금도 조용하지 않았다.
아해들이 재롱을 부리는 것이 하도 어여뻐 몇 번을 연거푸 웃었다.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적에는 하도 웃어 양 뺨이 당겼다.
* * *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처럼 간단히 단련을 하고 운기를 마친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루베르 그 아이가 문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 있었다.
안에 들어와 있나 싶어 큼직한 테이블이 있는 자리로 향했으나 그 자리에도 없었다.
공부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도 못 할 짓이라 자리에 앉았다.
책장을 다섯 페이지쯤 넘긴 뒤에 헐레벌떡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부터 달려 온 것인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루베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뭘 그렇게 급하게 오십니까?”
“아니, 헉, 미안. 늦잠을⋯. 늦잠을 자서.”
“괜찮습니다.”
연거푸 사과하기에 곁에 앉으라 손짓했다.
애초와 그와 나는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기숙사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삼십 분이면 충분히 닿았다. 게다가 미리 공부하고 있었기에 낭비한 시간도 전혀 없었다.
그러한 탓에 별로 기다리지 않아 괜찮았다고 아해를 달랬더니 또 금방 시무룩해지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생긴 낯에 침울한 기색이 어렸다. 그를 달래는 대신 화두를 돌리는 것을 택한 나는 책을 펼쳐 궁금했던 부분을 짚었다.
“그나저나, 선배가 오면 물어보려고 표시해 둔 것이 있는데⋯.”
“아, 그래. 봐줄게. 어떤 거야?”
“철의 그림스베인의 후계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 음. 이거. 이건 어디에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전에 내가 다섯 공작가가 시어런의 토대를 다시 쌓은 이야기까지는 했었잖아. 그때 그림스베인은⋯.”
과연 예상했던 대로, 아해는 희고 말간 얼굴에 금방 진지한 표정을 담아 내 노트에 필기한 것과 유인물을 대조하여 한참을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주억이며 듣는 동안 가까워진 루베르의 눈이 반드르르하게 까만 것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늦잠을 잤다고 했나. 귓불과 뒷머리 일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동경에 보이는 앞모습만 서둘러 정돈하고 나온 사정이 빤했다.
우스운 마음이 일어, 그 축축한 목덜미 위를 검지로 톡 짚었다.
“헉. 왜, ⋯왜?”
“머리는 다 말리고 나오지 그랬습니까. 감기 들려고.”
“아, 아. 아아아⋯. 그렇, 그렇구나. ⋯안 말랐어?”
“예.”
계절이야 한여름이었지만, 시어런 아카데미 도서관 안은 사시사철 약간 서늘한 편이었다.
책을 보관하고 있어서 그런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방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여리고 연약한 아이를 젖은 그대로 앉혀 놓기에는 새삼 걱정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잠시 나가서 좀 걷고 들어올까요. 머리 마를 때까지만.”
“⋯어어? 응, ⋯응. 좋아. 그러자.”
유인물과 노트를 다시 가방에 넣어 한 손에 챙겨 들었다.
허둥지둥 자리에 앉았던 루베르도 옆에 팽개치듯 내려놓았던 가방을 도로 챙겼다.
흘깃 보니 이번에도 루베르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기에, 녀석이 더 열이 오르기 전에 햇볕을 쬐자 말하길 참 잘했다 싶어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