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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96화 (96/176)

96.

마리앤과 글로틴이 만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텐데, 그걸 어찌 훼방을 놓으려 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자 올리버가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별일 아니라는 투였다.

“⋯그런데 마리앤 걔가 나보고 글로틴 괴롭히지 말라고 뭐라고 하더라고. 와, 이래서 남 연애사에 끼는 거 아닌데.”

“음.”

“뭐, 그냥 그렇단 소리야. 오늘 점심시간에도 둘이 같이 식사하던데 마리앤 혼자만 계속 말하고 있어서 좀⋯. 그렇더라고.”

“글로틴 테너가 나쁜 놈은 아니란 말이죠.”

“어어. 그렇다니까.”

“알겠습니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사실 마리앤과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 나도 입을 열기 쉽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여 주어도 혼자 세 시간을 떠드는 녀석 아니던가.

마리앤이 말하는 것을 뿌리치지 않고 얌전히 다 들어 주는 것만 하더라도 꽤 괜찮은 놈이 아닌가 싶었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흠결이 없다면 내가 막을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올리버 컴바인이 마리앤에게 묘하게 구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일었으나, 곧 당돌하고 똑 부러진 마리앤이 알아서 하겠지 싶어졌다.

약속이 있다 말하고 자리를 파했다.

벤자민과 쉐이든을 마사에서 만나 이 얘기를 했더니 벤자민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쉐이든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며 웃음을 참더니, 오늘 이 자리에 마리앤이 끼지 않아서 참 다행이란 말을 했다.

내 생각도 그와 같았다.

* * *

금요일. 한 주가 지나치게 빠르게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좀 더 소중히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초급 검술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찾아온 루베르가 이번 주말에 시간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이번 주에는 야영 수업 현장실습이 있어 확답을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크게 실망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웃는 낯을 숨기지 않고 일요일에는 도서관에 나가겠다 약속했다. 서운해하던 얼굴이 밝게 개는 것을 보고 그 어깨를 다정히 도닥여 주었다.

이놈에게도 괜찮은 친구를 만들어 주어야 할 텐데, 어떤 놈이 잘 맞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점심 식사를 끝마친 뒤에는 야영 수업을 위해 짐을 바리바리 챙겼다.

첫 번째 야영지는 평야 지대라 챙겨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조 아해들이 신이 나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던 것이 생각나 대충 챙길 수가 없었다.

아이들 나누어 줄 간식을 먼저 챙기고, 아이들이 벌레를 보면 깜짝 놀랄 수 있으니 벌레 기피제도 따로 구해 챙겼다.

혹여 밤바람에 감기 드는 아해가 있을까 걱정되어 담요도 챙기고 2형 손난로도 챙겼다.

보온과 유지 마법식이 든 아티팩트의 크기가 제법 컸기 때문에 나 아니면 챙길 이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출발 장소에 도착했더니, 지난번에는 양고기를 챙겨 왔던 이반이 무려 제 몸통만 한 훈제 돼지 뒷다리를 들고 서 있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신이 난 마리앤이 호들갑스럽게 박수를 짝짝 치며 이반의 준비성을 칭찬했다.

“완전! 먹을 것에 진심인 이반! 참된 지식인의 자세예요! 훌륭해요! 대단해요!”

“가는 길은 마차를 사용한다고 해서 챙겨 봤습니다.”

“이거 몇 kg짜리예요? 딱 봐도 엄청난데.”

“7kg이라고 들었어요.”

“와⋯. 미쳤다, 진짜. 이게 야영이지. 이게 맞지.”

잘 포장된 것을 껴안듯 들고 있는 모양새가 힘겨워 보였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돼지 뒷다리도 내가 들고 가기로 했다.

잘록한 부근을 몽둥이처럼 한 손에 쥐었다.

기름을 잘 먹인 종이 포장 겉면에 커다랗게 웃는 돼지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이 정말 우스웠다.

아무리 보아도 다섯이 먹을 분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조 아해들이 이쪽을 흘긋거렸으나 이반은 무척 담담한 표정이었다. 부끄러운 기색도 없었기에 다른 조에서도 이 정도는 하나보다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과연 그 추측이 맞았는지, 출발하기 전 다른 조 아해 몇몇이 찾아와 내게 먹을 것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꾸러미에는 작은 쿠키나 캐러멜 등 단 주전부리가 담겨 있었다. 날 위해 특별히 챙겨 왔다기에 기쁜 마음이 들어 크게 칭찬했다.

야영지까지는 조별로 같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마차는 여섯이 넉넉하게 탈 수 있는 크기였다. 덕분에 돼지 뒷다리를 포함한 짐들을 구석 자리에 밀어 넣고도 자리가 남아 좋았다.

마리앤이 가는 길 내내 흥겨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제니가 화음을 넣어 노래에 꾸밈새를 더하고, 데미안이 장단을 가지고 온 물통을 통통 맞부딪치며 장단을 맞췄다.

재잘대는 아해들과 다 같이 소풍이라도 가는 양 마음이 풍족하고 즐거웠다.

햇살이 따사롭게 푸르고 넓은 들판 위를 고루 덮었다.

세드릭 교수가 고심해 골랐다는 야영지는 아주 너른 들판이었다.

너른 땅에서 양이나 소를 기르는 이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가축들을 몰아 풀이 더 많은 곳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목축을 했다.

가축이 한 차례 뜯어 먹고 지나간 뒤의 풀밭은 막막할 만큼 넓어서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당황한 것은 이번에도 나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신나서 깔깔거리는 아해들이 자리를 어디 잡으면 좋을지 이리저리 삿대질을 해 가며 고심했다. 그 서슬에 휩쓸려 더 평평한 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물가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땅이 평탄하여 손을 대 보았을 때 버석하게 마른 흙이면 좋고, 평평하고 단단한 돌이나 바위 따위가 아래에 깔려 있으면 더욱 좋다고 수업 시간에 배운 바 있었다.

물을 피하는 이유는 여럿이었다. 우선, 갑작스러운 폭우로 물이 불어나거나 야영지에서 물이 샘솟으면 곤란해진다. 또 수원을 찾아오는 여러 짐승에 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또 단단한 바닥을 찾는 것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해충을 막기 위함이었다. 무른 바닥 아래에는 수많은 벌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먹이를 찾아 기어 나온 벌레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야영지를 고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썩 괜찮아 보이는 자리를 찾아 아해들에게 말을 붙였더니, 제니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너무 돌이 많아서 안 돼요, 미카엘. 침낭을 깔고 눕는다고 해도 이 정도면 침낭이 찢어질지도 모른다고요.”

“이런 것은 좀 옮겨 치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불을 피울 때 그 주변을 빙 둘러 둬도 좋을 것이고.”

“그럼 저기 저 바위는요?”

“자르면 됩니다.”

“저걸요? 어떻게요?”

“⋯.이렇게?”

별로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검을 빼 튀어나온 바위의 윗부분을 반듯하게 갈랐다.

아직 검기를 낼 수는 없었으나 오러를 순간 집중하면 이렇게 무른 바위를 평탄하게 깎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아해들이 크게 소리 지르며 박수갈채를 치는 것을 말리는 일이 더 어려웠다.

소란에 찾아온 세드릭 교수가 깔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봐,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하지 않는다니까? 우리 에른하르트 조를 본받아서, 다른 조들도 각 조의 검사와 마법사들을 제대로 활용해 보자. 이 정도 꼼수는 봐줄 테니까.”

“아, 저걸 어떻게 따라 해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해야지. 연금의 기본 정신, 잊었어?”

다른 조 아해들이 도와 달라 청하기에 바위 몇을 더 잘라 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어 해가 지기 전에 제니가 적어 둔 내용을 따라 필요한 약재를 채취하러 갔다.

잎사귀 색이 노랗고 길쭉한 풀은 낙세트등풀이고, 갓이 조그마하고 바닥에 납작 붙어있는 버섯은 율솜버섯이고, 무릎께까지 오는 덤풀에서 피는 꽃은 민돌란꽃이고⋯.

이리저리 떠들며 지시하는 대로 습한 평지를 찾거나 썩어가는 나뭇등걸을 찾아 넓고 평탄한 들판을 헤맸다.

지난 학기에는 아카데미 내에 마련된 온실에서 약재를 채취하였기에 이런 일이 없었으나, 자연적으로 피어난 약재를 채취하려 하니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 찾아내더라도 원하는 만큼의 양을 얻을 수 없다 보니 다른 조 아이들과 맞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뭐야, 다 가져가면 저흰 어쩌라구요.”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따기 시작했잖아요. 다른 곳에서 더 찾는 게 맞죠.”

“아니, 습지가 엄청 넓은 것도 아니고⋯. 민돌란 꽃은 한 병에 한 송이만 들어가도 되는 걸 빤히 아는데 어떻게⋯.”

“무슨 일입니까?”

“미카엘!”

한켠이 소란스럽길래 찾아갔더니, 억울한 표정을 한 제니가 날 보자마자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자세히 묻고 따져 보기 위해 다가서자마자 고수머리를 한 소녀가 조금 전까지 토라져 움켜쥐고 있던 꽃 중 한 묶음을 냉큼 내 쪽으로 건넸다.

손톱만 한 붉은 꽃이 올망졸망한 것이 퍽 어여뻤다.

“⋯음? 제게 주는 겁니까?”

“네에. 그, 에른하르트 영식이랑 꽃이 참 잘 어울려서요.”

“음.”

민돌란꽃이 이상 출혈에 효능을 보이는 꽃이던가.

꽃을 건넨 녀석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으나, 제니가 고개를 주억거리기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말았다.

까닭이야 모르겠어도 옆에 서 있던 제니의 손에 꽃을 쥐여 주었다.

고수머리 아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제니에게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씩씩거리는 제니의 어깨를 도닥여 주며 위로했더니, 제니가 금세 밝게 웃으며 괜찮다, 다 잊었다 대꾸했다.

저 아해가 내게 고분고분한 것이 내 이름에 붙은 후광 탓인가 생각하니 어쩐지 입이 썼다. 제니에게 더 잘해 주어야겠다 속으로 다짐했다.

약재를 모두 채취하고 돌아오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저만치에서 뉘엿뉘엿 해가 지는 방향을 따라 발그스름한 노을이 켜켜이 쌓였다. 기기묘묘한 모양새를 한 구름이 붉은빛을 받아 꽃처럼 피어났다.

새로 사 온 마법 장작 위에 마리앤이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야영 수업에서 야무지게 써먹기 위해 불과 물을 사용하는 마법을 유난히 열심히 연습했다며 뽐을 내기에 크게 칭찬해 주었다.

고기를 굽는 것은 이반과 데미안이 번갈아 했는데, 내가 손을 대려고 해도 말리기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하기야 이번에 이반이 가지고 온 것은 향신료를 넣어 이미 훈제한 것이었다.

시어런에 와서는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고, 중원에서의 나라면 그냥 뜯어 먹기만 해도 만족했을 터였다.

아이들이 고기를 굽는다 곁들이를 준비한다 하는 것을 얌전히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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