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벤자민이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비반 오티프가 그 손에 들고 있던 당근 하나를 쥐여 주었다.
소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당근을 조심스럽게 잡자, 교수는 방긋 웃는 낯으로 지시했다.
“그걸 으깨 봐.”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그렇게 했다.
단순히 힘을 주어 두 동강을 낸 것이 아니라 큰 손아귀로 당근의 긴 위아래를 한 번에 잡아 압축하듯 으깼다.
벤자민의 손아귀에서 으깨진 묽은 즙이 손목뼈를 따라 팔꿈치까지 흘렀다. 완전히 으스러져 동그랗게 뭉친 당근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당근 하나 정도 으깨는 일은 일류 무인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손이 작아 아직 당근의 위아래를 한 번에 쥐지 못하여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비반 오티프는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휘둥그레한 눈을 하고 바라보는 사이 교수가 다시 냉큼 물었다.
“클라우디안 영식은 말에게 가까이 다가갈 때 무슨 생각을 해?”
“예? 별생각⋯. 없는데⋯.”
“다시 생각해 봐.”
“⋯저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벤자민은 또 한참을 생각하다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치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거야!”
짝,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여 멀거니 보고 있었는데, 쉐이든은 바로 알아들었는지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어리둥절한 아해들과 경탄하는 아해들이 뒤섞여 순식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비반 오티프는 나와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벤자민을 향해 차분히 설명을 덧댔다.
“클라우디안 영식은 힘을 조절하는 법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 같아. 검술부 학생 중에 가끔 그런 친구들이 있어.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보다 약해 본 적이 없는 녀석들.”
“⋯예?”
“봐, 클라우디안 영식은 말에게 다가갈 때 이런 표정을 하고 속으로 이렇게 되뇌는 거야. 난 널 부수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으깨버릴 수도 있어⋯. 아니야, 나는 너를 부수지 않을 거야⋯.”
비반 오티프 교수가 지나치게 익살스러운 표정과 말투였기 때문에, 그제야 이해한 나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벤자민을 위협적으로 느껴본 적이 없어 생각도 하지 못한 이유였다.
벤자민은 얼빠진 얼굴로 제 손에 쥐어진 당근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워낙 예민한 짐승이라서 그걸 알아채고 도망가는 거지. 지금은 나도 있고, 며칠 얼굴을 보아 익숙해지기도 했고, 클라우디안 영식이 정말정말 조심하면서 다가와서 어느 정도 참아 준 거지.”
“⋯.”
“방금 클라우디안 영식 표정은 내가 봐도 무서웠단 말이야. 아니, 나라도 어디서 호랑이 하나가 어슬렁 기어들어 와서 야, 안 잡아먹어. 하고 툭 치면 으악! 하고 도망부터 치겠다.”
“무슨, 그런⋯.”
“농담인 것 같아?”
무어라 반박하려던 벤자민은 제 손을 한 번 보고, 오티프 교수를 한 번 보고, 다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비반 오티프가 재차 물었다.
“말이 그렇게 으깨질 것 같아?”
“⋯.”
“맞아. 그런데, 정말 으깨질 수도 있겠다.”
“⋯예?”
“그 정도 힘이면 충분히 말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야. 내가 보기에 클라우디안 영식은 지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네. 대련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거 있잖아. 온전히 힘만 겨뤄서 지는 것.”
“⋯온전히 힘만⋯.”
“팔씨름을 하거나, 손을 꽉 쥐어도 으스러지지 않을 상대와 힘겨루기를 하면서 사람이나 동물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수 있는 악력의 정도를 찾는 게 해답이야.”
벤자민은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벤자민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와 급이 맞는 무인이었으며, 아직 몸이 작아도 근력과 완력을 꾸준히 수련했다.
아해와 팔씨름 좀 한다고 으깨어질 몸은 아니었다.
내가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벤자민의 시선을 따라 그 모습을 본 비반 오티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네. 그럼, 잘해 봐. 스스로 힘을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어 두려운 마음을 없앤 뒤에는 말들도 그렇게 무서워하진 않을 거야.”
“예, 교수님.”
벤자민 클라우디안이 한결 밝아진 낯으로 깍듯하게 인사했다.
비반 오티프는 벤자민에게 손 닦을 수건을 건네주며 한 차례 응원의 말을 쏟아 낸 뒤 수업을 마쳤다.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는 중에도 그 자리에 서서 손을 닦고 선 벤자민을 보았다.
나는 몇 날 며칠을 두고 보아도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가장 대단하고 위대한 스승은 마엘로 샌슨이었으나, 다른 교수들 각각이 모두 배울 점을 지녔다.
이 아해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어찌 읽었을지 생각하니 참으로 신기하고 우스웠다.
쉐이든이 벤자민의 어깨를 툭 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아니,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보다 약해 본 적이 없어요?”
“⋯그게⋯.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벤자민 영식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는 걸 본 적이 없네요. 누구 손목을 잡거나, 어깨를 이렇게 건드리거나⋯. 아니, 이제 보니까 아예 먼저 접근하지 않는 것 같은데. 치면 부서질까 봐? 진짜 그랬어요?”
“⋯어어. ⋯예.”
미리 약속했던 일이 있어 우리 셋 모두 마사에서 바로 나서지 않았다.
요 며칠 익숙해진 대로 건초 더미에 앉아 말을 이었다. 이쪽을 넘겨다보는 말들의 둥근 시선들 사이에서 벤자민은 더듬더듬 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클라우디안 후작 부부는 둘 모두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했다. 시어런 식으로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였다.
검을 취미이자 특기로 삼은 둘의 아이들이 강건한 무골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벤자민은 삼 형제 중 셋째였는데, 그 위로 있는 두 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첫째가 이제 서른다섯 살이고, 둘째가 서른셋이라 하였으니 첫째와 무려 스무 살 터울이었다.
일전에 가족 자랑을 할 적에 벤자민이 자신의 집에서는 먹는 것 하나만큼은 잘 챙겨 준다 하고 말을 아끼기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무뚝뚝하고 근골이 단단한 가족들이 모조리 검을 훈련하다 보니 벤자민이 그 영향을 짙게 받은 모양이었다.
“⋯벤자민 영식이 가족 중에 가장 키가 작다고요?”
“예. 형 말로는 제가 아직 어려서 그렇다고⋯. 스무 살 중반까지 키가 더 클 것이라 합니다.”
“허어⋯.”
벤자민이 이미 육척장신(*180cm 어림의 큰 키)이었는데 여기서 더 큰다 하니 관우와 장비가 울고 갈 지경이었다.
우뚝하게 선 가족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였을 자그마한 벤자민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벤자민은 묵묵하게 저 할 말을 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넘어지려면 혼자 넘어져라, 옆 사람을 붙잡지 말아라, 우린 넘어져도 안 다치지만 우리가 잡으면 사람 팔이 부러진다⋯.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형들이 이미 겪어 본 일이라 하기에 저도 그런 줄 알았고⋯. 뭐만 건드리면 부서져서.”
“뭘 건드렸기에 부서져요? 화병 뭐 이런 거?”
“⋯책상이나. 테이블 같은 것들이 주로.”
“⋯그게 부서져요?”
“예.”
쉐이든이 벤자민에게서 한 걸음 멀어져 내 곁에 와 붙어 앉는 것을 보았다. 아해가 장난치는 것이 빤히 보였건만, 벤자민은 어쩐지 서운한 기색으로 또 양 눈썹을 끌어내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벤자민이 누군가를 먼저 건드리는 것을 거의 본 적 없었다.
그나마 내 어깨는 몇 번 두드린 일이 있어도 늘 손끝으로 톡 건드리고 물러났던 것이 생각났다. 소년은 늘 무뚝뚝한 얼굴로 석불처럼 앉아 주변을 바라보고는 했다.
쉐이든이나 마리앤처럼 살가운 아해들이 두드리고 건드려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끔은 뒷짐까지 지면서 그들을 내려다보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나는 그런 벤자민을 보다가 웃는 낯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린 짐승들이 제 발톱을 숨길 줄을 몰라 가릉거릴 적에는 원래도 사고를 많이 치는 것이 당연했다.
강골을 타고나서 타인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애쓴 세월이 지금의 그를 빚었다.
놀리거나 걱정할 거리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 다 해결이 되는 문제인 것을 알아 마음이 편했다.
벤자민이 조심스럽게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는 것에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팔씨름이나 한판 할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예. 도와드리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에른하르트 영식은.”
“손이 작다고 해서 힘이 없지는 않습니다. 필요하면 오러를 쓰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면 테이블이 무너질 것이라 하기에, 마사 짚단 위에 엎드린 채로 팔씨름을 했다.
다섯 번을 겨뤄 한 번을 이기고 네 번을 진 벤자민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녀석을 안 지 몇 개월이 지났으나 이리도 환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첫 한 판은 내가 녀석을 얕보아 진 것이었다.
내 중원에서 그렇게 많은 힘겨루기를 해 보았지만 이렇게 힘이 센 놈은 팽가 놈 이후로 처음이었다.
힘이면 다 되는 줄 알고 머리 쓰는 법을 모르던 그놈이 산적 떼를 해치우겠다고 산봉우리를 뚝 떼어다 아래로 굴렸던 날이 생각났다. 흙무더기에 깔려 죽을 뻔한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 녀석만큼은 그리 키우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했다.
사실, 두 판째부터는 단전의 내공을 끌어 어깨부터 손끝까지를 단단히 강화한 덕에 이길 수 있었다. 혈맥과 근맥이 철심보다 단단해진 뒤에도 녀석이 꽉 쥔 손의 피부가 벌겋게 일었다.
내공은 오러와 성질이 달라 몸속에 도는 것이라 벤자민의 안법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방금, 오러를 사용하지⋯ 않으신 겁니까?”
“예.”
소년이 놀란 기색이기에 시침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벤자민은 두 번을 연거푸 더 물어보았고, 나는 똑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아해의 웃는 낯을 보니 내공을 돌려 근골과 근력을 강화한 것이 후회되지 않았다.
아직 벤자민의 나이가 열다섯인데 이런 힘을 지녔으면 검보다는 도나 도끼가 어울리지 않나 생각했으나, 시어런에서 도법과 부법이 어떤 위상을 지녔는지 몰라 샌슨에게 먼저 말해보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검법보다 부법이 천시받는 세상이라면 굳이 도끼를 쥘 필요가 없었다.
“확실히, 벤자민 영식의 힘이 좋긴 합니다. 무인에게는 대단한 강점이니, 가끔 여러 방면으로 악력을 조절하는 법을 연습해 봅시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손아귀가 얼얼하여 수저를 드는 일이 어려웠으나 티 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