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수요일 오전 초급 검술 수업은 이전처럼 형과 식을 가다듬는 데 주력하여 특별한 일이 없었다.
팔월의 햇볕이 아직 뜨거워 쉐이든을 포함한 몇몇 아해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으나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제국의 계보 수업 또한 크게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
오늘도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의 목소리가 푹 쉬어 있었다. 날이 더워 저렇게 골골대는 것인지⋯.
하도 안타까워 아티팩트 교수인 위르겐 카이저가 사용하는 음성 증폭기라도 사다 주고 싶다 이야기했더니, 쉐이든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왜 안 되는 것이야. 교수에게 선물을 하면 안 된다는 법도가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음성 증폭기는 안 돼. 절대 안 돼.”
“왜?”
“교수님이 목이 맛 간 건.”
“간 건?”
“⋯안 된다면 안 돼. 내가 너한테 안 좋은 일을 시키겠어?”
“알았다.”
아해가 나를 붙잡고 이렇게까지 당부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저 고개를 까딱이고 머릿속에서 그 일을 지웠다.
명마 예찬론 시간에는 여러 종류의 안장과 재갈을 늘어놓고 그것들의 상태를 분간하는 법을 배웠다.
최하급품부터 최고급품까지의 안장과 재갈 모두가 같은 종류가 두 점씩 있었는데, 한 점은 오래 사용하여 낡은 것이고 한 점은 포장만 갓 뜯은 새것이었다.
비반 오티프가 안장의 생김과 구조, 그리고 각 부분의 쓰임새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을 열심히 받아 적었다. 노동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필기구를 갖고 오지 않아 학우 중 하나가 빌려주었는데, 제 것을 내게 내어 주면서 무척 기뻐하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어런의 안장과 재갈은 중원의 것과 그 생김이 달랐다.
다른 것들은 말을 타고 다닐 일이 거의 없어 몰랐다 치더라도, 어린 아해들을 위한 등받이 달린 말안장 따위는 다시 보아도 무척 생경했다.
엉덩이가 덜 아프도록 쿠션이 조금 더 두툼한 것도 있었고, 사내용과 여인용이 따로 있기도 했다.
최고급 안장 중 어떤 것은 치질 환자를 위해 가운데를 파 두었다는 소리에 허어, 탄성을 흘렸다. 그런 질병을 앓는 이가 말은 왜 탄다는 말인가⋯.
기가 막혀 실소를 흘렸더니 비반 오티프 교수가 정색을 하고 지적했다.
“웃으면 안 돼. 시어런 제국은 워낙 넓다 보니 말을 타고 이동할 일이 무척 많아서, 그런 질병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그러니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말을 탈 때는 중간중간 꾸준히 쉬어 주는 것이 중요해. 또 조금이라도 징조가 보이면 바로 의사를 찾아가고. 안 그랬다간 정말 평생 고생한다.”
“그건 경험담인가요?”
“그런 사람을 참 많이 보기는 했지. 간접 경험이다, 임마.”
짓궂은 질문에 더욱 짓궂게 낄낄거린 뒤, 비반 오티프는 이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안장을 직접 채워 보라고 했다.
재갈을 찬 말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말에게 안장을 먼저 보여 준 뒤 등 위에 얹는 식이었다.
고삐를 쥔 비반 오티프가 옆에서 지켜보며 차분히 말로 설명해 주었기에 처음 안장을 얹어 보는 아해들도 차분히 해낼 수 있었다.
안장을 얹었다가 벗겨내는 일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한 뒤, 비반 오티프가 그 말을 다시 마방에 넣어 두고 다른 말을 꺼내왔다. 의아하여 그 까닭을 물었더니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 아무래도 서툰 손으로 안장을 채웠다 풀었다 하는 건 말들에게 즐거운 일이 아닐 테니까? 그냥 쟤들이 착해서 참아 주는 거지.”
“⋯음.”
“싫은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하는 건 사람도 그렇지만 말에게도 짜증 날 거 아냐. 다섯 번이면 많이 했다고 칭찬도 많이 해 주고, 당근도 먹여 주고, 쉬라고 우리에 넣어 주는 거야.”
나는 비반 오티프가 무척 다정한 표정을 한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는 새로 데려온 말의 뺨을 쓸어 주며 말을 이었다.
“이 친구들이 살아 있는 생물이라는 것을, 생각을 할 줄 알고 감정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도록 해. 그러면, 말은 배신 안 해.”
“네에.”
곱게 대답하는 친우들 사이에서 나 홀로 묵묵했다.
시어런이 사람을 온화하게 대한다는 것은 알았으나 짐승을 다루는 일에도 그러는 줄은 몰랐다.
부러 난폭하게 굴 필요야 없겠으나, 이렇게 사소한 것에도 정을 쏟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중원에서의 짐승은 가축이었다.
좋은 혈통의 명마야 좋은 건초를 먹고 금으로 장식된 재갈과 안장을 찼으나, 그래 봐야 짐승이었다. 전쟁통에 달아나는 것들을 쉬이 붙잡기 위해 우마의 목을 먼저 베는 일이 흔했다.
그리 좋은 태생이 아닌 말과 소는 죽을 때까지 노역을 하다가 늙으면 고기로 삼았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늙은 말로 만든 육포는 질기다 못해 돌처럼 딱딱했다. 침에 불려 뜯어 먹던 육포의 씁쓸하고 짭짤한 맛이 입안에 감도는 듯했다.
하긴, 사람도 그랬다. 다섯 살에 처음 검을 배울 때 나는 처음 잡은 검을 천 번씩 휘둘러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가만히 서서 안장을 채웠다 내리는 것으로 잘했다 장하다 칭찬을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만도 했다.
이 녀석들도 감정이 있는 것을 잊지 않으면 배신하지 않는다고. 비반 오티프의 말을 곱씹으며 가만히 큰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말이 곱게 히힝,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말 몇 마리가 아이들 앞으로 나왔다가 마구간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나와 쉐이든도 무사히 주어진 과제를 끝마쳤다. 벤자민은 가장 마지막 순번이었다. 긴장한 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깊고 묵직했다.
“키힝.”
“워, 워. 괜찮아, 괜찮아. 잘 참아 놓고 왜 이러지?”
비반 오티프가 말의 목을 쓸며 진정시키려 노력하였으나, 벤자민이 말과 세 걸음 안쪽으로 다가선 시점부터 말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말이 두려워하니 다른 아해들도 겁을 집어먹고 벤자민을 유심히 살폈다.
말이 뒷걸음질 치며 투레질했다. 그 탓에 비반이 꽉 쥔 고삐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큼직하게 뜨인 말의 눈에 핏발이 선 모습을 들여다본 비반이 목소리를 낮추어 명했다.
“⋯클라우디안 영식, 잠깐 더 다가오지 말고 두 걸음만 뒤로 가 볼래?”
“⋯예.”
벤자민이 뒤로 물러났다. 말은 두어 차례 투레질을 하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그러나 힐긋대며 눈치를 보는 것이 말을 잘 모르는 우리의 눈에도 선히 보였다.
비반 오티프는 망설이지 않고 그 말을 마구간에 돌려놓았다. 대신에 좀 더 크고 우람한 말을 꺼내왔다.
“클라우디안 영식이 검술부라고 했지?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어?”
“이제 소드 익스퍼트 상급입니다.”
“그래?”
비반과 벤자민이 잘 이해되지 않는 대화를 나누었다. 검술의 경지와 말을 다루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말굽에 채여도 괜찮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싶어 마냥 의아했다. 비반은 자신의 손으로 능숙하게 새로 온 말에게 안장을 채웠다 풀어 주고, 그 말이 안장의 냄새와 모양을 충분히 살펴보도록 한 뒤에 안장을 벤자민에게 건넸다.
“천천히 와. 조심해서, 그래. 안장도 살살 잡고. 말의 뒤나 옆이 아니라 앞쪽으로 걸어서.”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한껏 숨을 죽인 채 시키는 대로 했다.
새로 온 말도 벤자민이 가까이 올수록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킁, 숨을 삼키며 앞발로 바닥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래도 조금 전 마구간으로 돌아간 암말보다는 잘 참아내는 기색이었다.
벤자민이 말의 머리에서 두 걸음 앞, 비반 오티프의 반걸음 뒤에 서자 비반이 칭찬했다.
“좋아, 잘했어. 그 채로 안장을 들어서 보여줘. 내가 했던 것처럼.”
“⋯예.”
벤자민은 다시금 시키는 대로 했다. 말은 벤자민이 내민 안장을 흘긋 보고, 벤자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비반 오티프는 고삐를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 말이 도망가고 싶어 할 경우 뒷걸음질 칠 수 있도록 여유를 주기 위함이었다.
한참을 벤자민을 보던 말이 그 안장에 코끝을 대고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슬쩍 들어 시선을 피했다. 비반이 희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옆으로 가도 되겠다. 허락해 줬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어 봐.”
벤자민은 긴장하여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말의 곁에 섰다. 그 뒤로는 수월했다. 벤자민은 다른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의 등에 안장을 얹고 매듭을 묶었다. 말은 간간이 비반 오티프의 어깨를 머리로 떠밀거나, 약한 투레질을 하는 둥 불안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안장의 일부를 잡아당겨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열을 세고 다시 역순으로 안장을 풀어 내리는 것까지 모조리 성공했다.
풀어낸 안장을 다시 제 두 손에 쥔 벤자민의 얼굴에 서린 기쁨이 손에 잡힐 듯 뚜렷했다.
“완벽해. 잘했어. 그럼 클라우디안 영식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볼까? 나는 칭찬 좀 해 주고 갈게.”
“예.”
“오구 잘했어, 아이고 이뻐. 어쩜 이렇게 씩씩해? 응? 완전 대단해~.”
불안한 것을 잘 참아낸 것이 기특하다며 비반이 말을 얼렀다.
나는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앉았다.
비반이 말의 콧잔등을 쓸어 주고, 탄탄한 목을 두드려 주고, 당근을 세 개나 건넨 뒤에야 말도 기분을 푼 모양이었다.
와삭와삭 시원한 소리를 내며 당근을 다 먹어 치운 말이 흥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비반은 다시 한번 말을 큰 소리로 칭찬한 뒤 마구간에 되돌려 놓았다.
나도 저런 식으로 말을 다뤄야 하는가? 잠시 생각했지만, 마음에 닿지 않았다.
말을 돌려 두고 혼자 돌아온 비반 오티프가 짝 소리 나도록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알았어. 벤자민 클라우디안 영식이 왜 말을 못 다루는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벤자민이 반색하며 물었다. 비반은 허허, 소리 내어 웃고는 답했다.
“클라우디안 영식, 동생 없지?”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클라우디안 후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나는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싶어 의아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이들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벤자민 역시 당황하여 어어. 하고 눈을 끔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