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92화 (92/176)

92.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볼더의 옷자락이 축축했다. 나는 메이지 볼더가 놀란 것이 그 탓이리라 추측하여 차분한 어조로 그를 달랬다.

“운기조식을 하여 노폐물을 피부로 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저 씻으면 되는⋯.”

“아니! 아니, 아니! 이게 어떻게 돼요! 이게 어떻게!”

“⋯뭐가?”

“어떻게 마나가 살아 있어요? 어떻게!”

“⋯그럼 죽어 있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말로 듣지.

내가 어지간히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볼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훑어 노트와 펜을 손에 쥐었다.

“잊기 전에, 이걸 잊기 전에 적어야 해요. 말 걸지 말아요.”

“아니 말 건 게 누군데⋯.”

볼더의 펜이 신들린 듯 휘갈기는 글자와 그림들이 내가 인도한 혈맥의 흐름과 똑같은 것을 얼핏 봐도 알았다.

과연 마법을 하는 이들은 기억력이 비상하다 싶어 고개를 주억거리는 찰나에 내 옆에 선 더글라스 머스탱이 떨리는 목소리로 저도 가능하느냐, 진기도인을 받을 수 있느냐 물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의 몸을 잠시간 살피다가 손목을 잡아끌어 맥문을 짚어 보았다.

“충분합니다. 다만 제 지금 경지로는 하루에 둘은 무리라⋯. 다음 주 이 시간에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물론 좋습니다. 미리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요?”

“글쎄⋯. 아.”

나는 중요한 것을 물었다.

“가부좌 틀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저처럼 앉는 거요.”

몇 차례 가부좌 틀기에 실패한 더글라스 머스탱이 다음 주까지는 어떻게든 가부좌를 틀어 보겠다고 하기에, 열심히 하라 응원해 주었다.

* * *

오늘도 벤자민을 위해 마사로 향했다.

마사 앞에 세 명이 서 있기에 찬찬히 보니, 미리 약속한 쉐이든과 벤자민 외에도 조막만 한 녀석이 하나 붙어 있었다.

마리앤 필로덴도르, 활발하고 기운찬 필로덴도르 남작가의 차녀였다.

금요일 야영 수업에도 다시 얼굴을 볼 사이였으나 일단 반갑게 맞이했다. 여기 있는 까닭을 묻자, 이렇게 재미있는 일에 저를 빼놓을 수는 없다며 당돌하게 종알거리는 것이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오늘은 네 명이 함께 마사에 들어섰다.

마리앤은 벤자민이 주는 건초를 거부하는 말을 보며 삿대질까지 하며 깔깔 웃었다.

마리앤은 제 말을 가지고 있어 말을 돌보는 법을 잘 안다고 했다. 열 살에 선물 받은 망아지를 직접 먹이고 돌보며 애지중지하여 훌륭한 명마로 길러냈다며 우쭐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평소 진중하고 얌전하기만 한 벤자민이 약이 오른 듯, 비장의 무기랍시고 당근을 꺼내 왔으나 역시나 별 소용이 없었다.

우리 넷은 어제 그랬던 것처럼 말들의 시야가 닿는 곳에 건초 더미를 두고 푹신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이때 마리앤이 우리를 찾아온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글쎄, 남자 마음을 잘 모르겠더라구요.”

요사이 시간이 날 때마다 글로틴 테너 영식을 자주 만났는데, 그의 태도나 행동 따위가 수줍은 것도 같고 떨떠름한 것도 같아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남자 중 이반은 이런 것을 전혀 모를 것 같고, 데미안은 여학우들과 지나치게 친하니 제 기준 제일 무뚝뚝한 벤자민과 나를 골랐다고 한다. 글로틴의 속내를 알아보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절로 탄식이 나왔다.

말을 마친 마리앤이 새치름하게 제 귀밑머리를 귓바퀴 뒤로 넘겼다. 그제야 마리앤의 머리 위에 못 보던 리본이 붙어 있는 것을 알았다.

무어라 얘기를 할까 하다가 소녀의 꾸밈새에 말을 얹는 버릇이 없어 입을 닫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쉐이든이 문득 물었다.

“아니, 저는 왜 빼요?”

“쉐이든은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요. 엄청 바람둥이일 것 같아요.”

“뭐요?”

“아, 됐어요. 그래서 미카엘, 미카엘은 어때요? 서로 사귀자 하고 만나기 시작한 여자가 자꾸 먼저 찾아오면요.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제가 좀 더 기다리면서 얌전한 척 구는 게 좋을까요? 하지만 난 솔직한 연애를 하고 싶은데!”

나 또한 아해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진중하게 생각했으나, 답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정인이 없어 봐서 그런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묻는 거예요. 글로틴 테너 영식도 저 이전에 다른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다고 했거든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글리 오빠가 차분하고 얌전한 타입이니까 나처럼 활발한 애가 적극적으로 구는 게 또 잘 맞는 것도 같고.”

“⋯글리?”

“애칭이에요! 제가 지었어요. 글로틴이니까 글리! 오빠네 가문에서는 어릴 때도 애칭으로 부르지 않고 풀네임으로 불렀다지 뭐예요. 그럼 너무 정 없는 것 같잖아요.”

얼이 빠져 벤자민을 돌아보았다. 소년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의외로 오래 고민하다가 좋은 답을 내주었다.

“전⋯.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는 건 기쁜 일이니까요. 제가 같은 입장이었다면⋯. 먼저 찾아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혹 방해가 될까 걱정되어서요. 그러니 상대가 제 생각을 자주 해 주고, 자주 보고 싶어 해 주면⋯. 행복할 것 같은데.”

“역시 그렇죠? 으응, 수줍은 것도 너무 귀여워. 어떡해.”

마리앤은 여전히 꿈꾸는 듯 어여쁜 표정이었다.

말한 것은 벤자민인데, 글로틴에게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그래서 얼마나 자주 만나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느냐 슬쩍 물었다.

손녀의 연애담을 듣는 것처럼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고, 혹 단비 그 녀석처럼 문란하게 군다면 꾸짖을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앤은 헤헤 웃는 낯으로 수줍게 어깨와 몸을 비틀며 대답했다.

“으으응, 아직 손도 못 잡아봤어요.”

“잘 생각했습니다. 원래 혼인 전에는 옷깃 스치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법입니다.”

“예? 그런 법이 어딨어요!”

“그런 법이 있습니다.”

내 말에 쉐이든이 큰 목소리로 웃으며 끼어들었다.

“에른하르트 가의 가풍이 그런 모양이에요. 하지만 쉬운 스킨십은 저도 반대예요. 마리앤은 손 한 번 잡는 데에도 가슴 떨리고 두근거리고⋯. 그런 낭만적인 사랑을 원하는 거잖아요. 사실 그런 건 상대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모를 수 없는 신호를 주거든요.”

“신호요?”

“나란히 걷는데 손끝이 움찔거린다든가, 괜히 눈이 자꾸 마주친다든가, 목이 마르다든가.”

“어머! 어머어머!”

“그러니까 그때까지 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와, 쉐이든 진짜 선수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해요. 여자 많이 만났죠!”

“무슨 소리예요. 그냥 여자인 친구가 많을 뿐이에요.”

그러나 나 또한 쉐이든이 새로이 보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쉐이든은 한참을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혼인할 상대가 정해지면 정말로 잘할 생각으로 이런저런 이론을 익혀 둔 것이다, 사랑도 공부가 필요하다 하는 등의 말을 늘어놓았다.

사람의 수가 적어 그런지, 아니면 너무 벅차 어디에라도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난 탓인지. 마리앤이 상기된 얼굴로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내게는 낯설고도 신기한 것들이었다.

내 주변에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 내는 사랑을 한 것은 제갈 아무개 그놈 하나뿐이었다.

그마저도 중원의 법도에 따라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이느라 애를 먹거나, 내가 모용연화와 말 한 번 섞은 것을 가지고 저를 배신한 것이라느니 믿을 놈 하나 없다느니 헛소리를 쭝얼거리곤 했다.

삿대질을 하고 볏 세운 수탉이나 집 지키는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꼴은 몇 번을 보아도 우습고 하찮았다.

중원의 문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저와 모용연화의 사이를 달과 우물에 빗대거나 꽃과 나비에 빗대어 지은 연정 시를 귀가 닳도록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정인이 그 눈에 어찌 보이는지 따위를 세세하게 묘사한 일은 없었다.

마리앤은 글로틴을 볼 때 그의 얼굴 뒤에서 후광이 비쳐서 그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기 어렵다고 했다.

눈을 깜박일 적에는 별이 깜박이는 모습을 보는 것 같고, 제 말에 대답해 주려 입을 슬쩍 벌릴 때는 그 숨이 달아 현기증이 인단다.

마주할 때마다 절로 잘생겼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데 그것을 참기 위해 매번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떠들어 댈 때 쉐이든이 문득 장난스럽게 물었다.

“미카도 잘생긴 걸로 유명하잖아요. 아직 면역이 안 됐어요?”

“미카엘은 연하잖아요. 저는 연상이 좋아요. 차분하고 진중하고 섹시하고 아련한, 안경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어야 한다구요. 게다가 미카엘은 너무 강하고 단단해요. 제가 밀면 안 밀릴 것 같아.”

“아니, 그치도 사내라면 마리앤의 손에 밀리지는 않을 텐데.”

“글리 오빠라면 밀려 줄 것 같지 않아요?”

내가 그 놈팡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이 있나. 그러나 쉐이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테너 영식이라면⋯. 마리앤이 미는 대로 밀려 줄 것 같긴 하죠.”

“미카엘은 절대 안 밀려 줄 것 같고.”

“그것도 맞아요.”

쉐이든과 마리앤이 장단이 맞아 떠들어대는 것을 듣자 하니 기가 막혔다. 내 편을 들어 줄 이를 찾아 벤자민을 돌아보았더니, 벤자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냉큼 입을 열었다.

“저도 잘 밀려 주는 편입니다.”

“그걸 저한테 얘기해서 뭐 해요?”

“그냥, 남들에게 그렇게 소문내 달라고.”

묵묵한 벤자민의 말에 마리앤이 까르르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그 단단한 팔뚝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쳤다.

저번에 쉐이든이 두드렸을 적에도 굳건하던 일류 무인 벤자민이 그 여린 주먹에 아픈 척을 하며 주춤주춤 물러나는 꼴이 기가 막혔다.

“허.”

“봤어, 미카? 이럴 때는 좀 밀려나 주는 거야.”

“전혀 모르겠다.”

“으응, 미카엘은 좀 몰라도 돼요. 그대로만 자란다면 괜찮을 거야.”

웃음소리가 마사를 가득 채웠다.

말들이 기웃거리고 쫑긋거리는 사이에 주저앉은 채로 시간을 잊고 한참을 떠들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아슬아슬한 때에야 서둘러 일어나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돌아가는 길에도 마리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랑. 내겐 아직 어려운 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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