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메이지 볼더는 지난주에 허락받은 항목과 허락받지 않은 항목을 구분하여 대체할 방안을 몇 가지 짜내어 왔다.
나는 그것을 차근차근 읽어 본 뒤 석불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더글라스 교수를 바라보았다.
더글라스는 이미 확인한 내용이라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메이지 볼더가 원망의 말을 쏟아 냈다.
“아니, 뭐예요. 지금 스승과 제자가 눈으로 말하고. 저를 따돌리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음. 시작하겠습니다.”
더글라스 머스탱은 상냥하게 대꾸해 주었으나, 나는 굳이 볼더를 달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대강 대답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린 아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떼를 쓰는 모양새에 어울려 주기가 어려웠다.
자고로 성인 남자라면 더글라스처럼 묵묵하고 듬직한 맛이 있어야 마땅한 것을. 혀를 차지 않는 것만 해도 내 인내심은 충분히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더 칭얼거리려는 놈을 두고 운기조식 자세를 잡았다.
기의 흐름을 알아챈 볼더도 떠들던 것을 멈추고 눈을 빛내며 펜을 쥐었다.
운기조식 중에는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며, 말을 하거나 움직이는 둥 기를 흐트러뜨릴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없음을 사전에 이야기해 둔 덕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양 무릎에 힘 뺀 손을 얹어 느슨히 두었다.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몸의 혈도를 따라 내공을 천천히 굴리며 그 덩치를 부풀리는 것을 축기라고 부른다.
기가 흐르는 통로는 그대로 피가 흐르는 길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단련할수록 단단해지는 피부나 근골과 달리 몸 안에 심어진 혈은 단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중원의 고수들은 칼에 맞는 놈들만큼이나 주화입마로 죽는 놈들이 많았다. 기가 폭주하거나 역류하여도 견뎌 낼 수 있을 만큼 혈맥을 다스려 두는 것이 작금의 내 목표였다.
남궁의 모든 법도가 하늘을 향해 있으니, 남궁의 심법인 창궁대연신공은 독맥의 단련에 그 근간을 둔다.
인체의 하늘은 머리에 있다. 아이의 첫 숨이 트이는 곳, 정수리 백회혈로 받아들인 기운을 호흡으로 삼켰다. 뒷머리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천주혈을 짚고, 폐부를 가득 채운 기운이 양 날개뼈 어림의 천종혈 양측을 차근차근 타고 돌았다.
꼬리뼈 아래 장강혈까지 내달렸던 기운이 단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백회로 오른다.
시냇물이 강물을 부르고, 강물이 바다를 부르는 것처럼 힘은 힘을 불렀다.
어린 몸이어도 백회가 닫히기 전에 임독양맥을 타통해 둔 무인의 신체였다. 따라붙는 내공의 힘이 작지 않았다.
상한 기맥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기를 쌓는 축기를 목표로 한 행동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낙낙하였기 때문에 일주천을 하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열린 백회혈로 쏟아져 들어오는 기운이 달았다.
머리와 코로 들이마신 숨은 피부와 입으로 내쉬었다.
청량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온몸으로 기운을 느꼈다.
한 바퀴, 두 바퀴⋯.
이어진 내공의 흐름이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질 만큼 거대해지기 전에 단전을 열어 인도했다.
신이 나 한 길로 달음박질치던 양 떼가 건초를 잔뜩 깔아 둔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열린 단전으로 차곡차곡 들어온 기운이 열기로 시근거리는 몸을 식혔다.
차분히 감았던 눈을 떴다.
“1시간 22분 43초. 아니, 이전에는 더 짧게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수업 시간이었잖습니까. 지금은 아니고.”
“아, 그래서⋯! 어쩐지 지난번보다 많은 마나를 사용하는 것 같더라니. 그럼 지금 멈춘 이유는 뭐예요? 제가 기다리고 있어서?”
“그 이상 끌어오는 것은 아직 제 몸에 무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
“어떻게 아는데요?”
“⋯그냥?”
메이지 볼더는 무어라 더 따지는 대신에 화제를 바꾸어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답해 주려 무척 노력했다.
창궁대연신공의 오묘하고 드넓은 이치를 내가 아는 이곳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지만, 나름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듣는 이가 영특하다 하더라도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은 확실했다.
창궁대연신공은 하늘의 기운을 받는 심법이었다.
기운을 받을 적에 가슴을 넓게 펼치고 주변을 휘도는 기운을 호흡으로 쓸어 담았다. 높고 가벼운 기운을 무겁게 삼킨다는 마음가짐으로 운기해야만 했다.
남궁의 무인들은 해당 구결에 대해 의문을 품어 본 일이 없었다.
“가벼운 기운을 왜 무겁게 삼켜요?”
“⋯다른 형태로 작동하는 심법들이 많다고 하지만, 제가 알기로 세상의 힘은 하늘에서 온다고 합니다. 때문에 기운을 받아들일 때는 머리 위쪽에서 끌어들이는 일이 많고⋯.”
“하늘에서 끌어오는 마나와 땅에서 끌어오는 마나가 다른가요?”
“⋯모릅니다.”
내가 배운 것이 남궁의 심법뿐인데 그걸 어찌 알겠나.
첫 질문부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땅의 기운을 끌어와 보지 않겠냐는 말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답했더니, 볼더는 곧장 다른 것을 물었다.
“마나가 흐르는 길을 일정하게 정해 둔 것 같던데, 좀 설명해 줄 수 있어요?”
“아. 그건⋯ 여기 백회혈부터 시작해서.”
“빼휘시에⋯? 그게 뭐예요?”
“⋯정수리에서부터 시작해서.”
혈도의 명칭에 대한 것부터 통하지 않으니 말 한마디 떼기가 무척 어려웠다.
손짓, 발짓을 통해 차분히 내가 운기한 길을 알렸다.
내가 의학서에 통달하였거나 먹물이 좀 더 들어 있는 놈이었다면 볼더를 붙잡아 중원의 글을 익히게 했을 터였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걸음마를 떼자마자 수십 년을 익혀 온 심공이었다.
중원에서는 어지간해서 남궁의 후인들이 이것을 모르겠다 물었을 때 말문이 막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 볼더가 묻는 것들은 그 긴 평생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들이라 대답을 짜낼수록 머리에 열이 올랐다.
“왜 받아들인 기운을 구태여 배꼽까지 끌어내려 보관해야 합니까? 그곳에 특별한 기관을 갖춘 것도 아니잖아요. 혹시 여성의 자궁을 의식한 생명의 태동 뭐 그런⋯.”
“갈!”
“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 미안해요.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본 거니까 화내지 말아요. 아니, 진짜 미안하다니까요?”
질색하여 화를 내긴 했으나 단전이 왜 거기에 있는지는 생각해 본 일이 없어 기분이 요상했다. 단전은 단전이기에 단전인 것인데 그것이 왜 단전이냐고 묻는 것인가⋯.
그 외에도 메이지 볼더는 몸의 앞에서 뒤로 이어지는 혈도에 팔다리가 포함되지 않는데 굳이 다리를 그렇게 꼬고 앉는 이유는 무엇이냐, 팔다리의 기경팔맥에도 흐름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어떤 식이냐 물었다.
운기조식을 할 때 가부좌를 트는 것은 상식이었다. 중원에서 이런 것을 따져 물었다면 내 광인의 별호를 받았으리라 싶었다.
운기조식을 할 때 푸른 기운이 몸 주변을 도는 이유는 무엇이냐, 운기조식을 끝마칠 때 눈에 푸른 빛이 도는 것은 무슨 의미냐, 내공의 색이 변하기도 하는 것이냐 따위를 묻기도 했다.
내기가 몸 주변을 돌지 않으면 틀린 것이고, 몸 주변에 기운이 번지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옳은지 따져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전부 내가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한참을 입씨름한 끝에 나는 결국 강수를 두었다.
“직접 해 보시겠습니까?”
“예? 네? 제가요?”
“예. 메이지 볼더, 당신이.”
진기도인(*내공 운행이 원활하지 않은 상대의 운기를 도와주는 행위)을 할 생각이었다.
중원에서도 몇 차례 해 본 일이 있었다. 비록 지금 내가 지닌 내공이 일천하다 하나 내공을 섬세하게 운용하는 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물론 메이지 볼더가 마법사가 아니라 일반 양민이었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행위였다.
그러나 이미 외부의 기운을 중단전에 받아들이는 법을 꾸준히 몇십 년 수련한 이의 몸이고, 혹여 문제가 생기더라도 일전에 앤젤라 스팅이 그러했던 것처럼 리커버리인가 뭔가를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 몸에 단전을 만드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으나 운기조식을 대강 한 차례 경험해보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그의 질문을 받아 주는 것이 진기도인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정말요? 제가요? 아니, 어떻게요?”
“제가 당신의 몸에 기운을 전달하면 됩니다. 그 느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받아 적는 것이 입으로 운기조식을 설명하는 것보다 정확할 것 같으니⋯.”
“그게 가능하단 말이에요? 해 본 적 있어요?”
“예.”
“언제요?”
“⋯기억이 안 납니다.”
전생에 해 봤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볼더는 의외로 손쉽게 가부좌를 틀었다.
그 나이에 비해 유연한 몸이 신기하여 까닭을 묻자 스트레칭인가 하는 그 해괴한 동작을 자주 한다고 했다.
마법사들은 책상에 앉아 연구하는 일이 많아 평소 운동을 해둬야 한다나. 비로소 그가 제대로 된 마법사라는 것을 실감했다.
우선 볼더에게 눈을 감은 채 호흡을 단정히 하라 일렀다. 이어 절대 입을 벌리지도 움직이지도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는 그 뒤에 앉았다.
그의 등에 양손 장심(*손바닥의 가운데)을 얹었다. 긴장한 몸이 뻣뻣한 것을 느끼고 하 웃음을 삼켰다.
“몸이 긴장하면 혈도가 좁아져서 못 씁니다. 몸에 힘을 빼세요.”
“아니, 어떻게 긴장을 안 해요⋯?”
“하지 말까요?”
“아뇨, 아뇨, 아뇨. 잠깐⋯ 잠깐만요.”
“목욕물에 들어앉았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허리는 곧게 펴고. 예. 눈 감고, 숨은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는 겁니다. 차분하게. 호흡이 정돈되면 시작하겠습니다.”
진기도인을 할 때는 외부의 기운을 끌어오는 것보다 이미 길이 잘 든 내공을 쓰는 것이 편했다.
단전에서 시작된 기운을 장심을 통해 볼더의 몸으로 밀어 넣었다. 차분히 살펴보니 임독양맥이 막혀 있는 보통의 신체였으나, 그 혈도가 단단하고 질긴 것이 마나를 수련한 이의 몸은 이렇구나 싶었다.
구태여 예민한 혈도를 건드리지 않고 우회하며 천천히 기운을 돌렸다.
딱 삼주천. 세 바퀴를 돌고 나서 다시 내공을 단전으로 되돌린 뒤 손을 뗐다.
어느새 벌떡 일어나 눈을 부릅뜨고 이켠을 바라보는 더글라스가 보였다.
끝난 것을 알았을 텐데도 메이지 볼더가 말이 없기에 그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까?”
“악!”
갑자기 냅다 소리를 지르기에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