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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90화 (90/176)

90.

쉐이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저 멀리 마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멀뚱하니 서 있는 벤자민이 보였다.

이번 주부터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들러 건초를 챙겨 주거나 잡일을 돕는 시간을 갖기로 약속한 차였다.

지난 명마 예찬론 수업 시간에 비반 오티프 교수에게 언질 받은 대로 말들의 먹이를 챙겨 주며 벤자민과 말들을 친하게 만들 작정으로 만든 모임이었다.

굳이 먹이를 도맡아 챙겨 주지 않더라도 얼굴을 자주 비추기만 해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비반 오티프 교수의 말을 모두가 굳게 믿었다.

사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말들이 저를 두려워할 것이 무서워 마사 앞에 서서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벤자민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왜 여기에 나와 있습니까? 안에 들어가지 않고.”

“놀리지 마십시오.”

놀린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꺼낸 말이었기에 더욱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마사 안의 모습은 지난주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말들은 내게는 호의를 보였고 쉐이든에게는 무감하였으나 벤자민이 곁에만 가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뒷굽으로 바닥을 긁었다.

말들이 벤자민을 보고 이리저리 시야를 피하는 것이 신기한 한편, 걱정스럽기도 하여 그 목을 쓰다듬어 달랬다.

벤자민은 평소 무던하던 얼굴에 한껏 억울한 기색을 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그 얼굴을 보니 녀석이 아직 어린 것이 실감이 났다.

평소 큰 덩치에 묵묵한 표정 탓에 그 나이를 실감하지 못했던 터라 더욱 가여웠다.

“정말 신기하긴 하다. 도대체 미카를 왜 이렇게 잘 따르는 거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원래 동물들이 미인을 좋아한다지 않습니까?”

“아하.”

“⋯음.”

아해들이 지나치게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들끼리 시선을 맞댔다.

허튼소리 하지 말라며 대강 손을 저어 아이들이 떠들어 대려 하는 것을 말리고 빈 말구유를 찾아 건초를 채워 두는 것부터 하기로 입을 모았다.

다들 검술부의 동량지재인 만큼 힘이 좋아 건초 따위를 옮기는 일은 가뿐했다.

내가 아직 옮기는 중인 건초를 향해 고개를 쭉 뻗는 말들을 밀어내는 일만 조금 귀찮았다.

벤자민은 그런 나를 부럽게 보다가 평소보다 어깨가 처진 채로, 그러나 꿋꿋하게 저 할 일을 했다.

하루에 당근을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좋지 않다 하여 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건초뿐이었다.

처음에는 벤자민이 가까이 가기만 하여도 질겁하던 말들 중 몇몇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건초를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말구유를 가득 채우고 나니 할 일이 없어 우리 셋은 괜히 마사 안을 어슬렁거렸다.

“좀 앉자.”

말구유를 채우고 남은 건초 더미 위에 풀썩 주저앉으며 쉐이든이 자리를 권했다.

벤자민이 별말 없이 따라 앉기에 나 또한 바닥에 정좌하고 앉았다.

말들의 시야에 닿는 곳에서 얼굴을 익히게 하는 것이 목적이고, 오늘은 우리끼리 마사에 온 첫날이니 말들과 거리를 두고 머무르는 것이 좋겠다는 쉐이든의 말이 과연 맞게 들렸다.

서로 가까운 이들끼리 마주 보고 앉으니 떠들어 대는 것 외에 할 것이 없었다.

말들을 위협하지 않으려니 검술 시연을 보일 수 없어 자연스럽게 화두는 아해들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 갔다.

말재간 없는 벤자민과 나를 대신하여 쉐이든이 여름 방학 동안 새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왔다.

여러 이름이 지나갔다. 몇은 수업 시간에 익히 들어 알게 된 이름이었고, 또 몇은 쉐이든이 설명을 해 주어 그 얼굴 생김이 떠오르는 학우였다.

다른 학년의 학생들은 고급 검술 시간에 만난 치들 외에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듣는 말마다 신기하기만 했다.

쉐이든은 지난 야영 시간에 마리앤이 끝끝내 말해 주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테너 선배랑 마리앤이 같이 듣는 수업 이름 혹시 들었어?”

“아니, 부끄럽다며 말하지 않던걸.”

“자본의 흐름과 역사! 아니, 아무리 교양이라도 낭만을 찾기엔 좀 특이하지 않아? 무엇보다 마리앤은 역사 수업에는 별로 흥미가 없잖아. 돈이라면 좋아하겠지만, 직접 돈을 다루는 법이야 잘 모르고. 너무 테너 선배 위주의 수업이라 놀랐다니까.”

“으음⋯.”

“좋아하는 상대에 대한 것은 무엇이든 알고 싶어지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교양 수업이라면 아주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벤자민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가 싶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쉐이든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이런저런 말을 떠들어 대더니, 한숨을 폭 쉬며 묘한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나는 마리앤이랑 테너 선배가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어. 마리앤은 엄청 좋아라 하는데⋯ 테너 선배 반응이 밋밋한 게 좀 신경 쓰여서. 마리앤은 쾌활하고 좋은 친구니까, 이왕이면 많이 사랑받는 연애를 했으면 좋겠단 말이야.”

“쉐이든 영식, 혹시⋯.”

“아냐! 여동생처럼, 여동생처럼 좋아하는 거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절대 아니야!”

벤자민의 물음에 쉐이든이 펄쩍 뛰었다.

나 또한 마리앤의 쾌활하고 명랑한 행동들이 보기 좋아 가까이 여기는 탓에 쉐이든의 말에 공감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녀가 사랑을 잔뜩 받아 행복하기를 바랐다.

나와 비도술 수업을 함께 듣는 미역 머리 선배, 올리버 컴바인과 마리앤이 좋아한다던 글로틴 테너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비도술 수업 때에 넌지시 올리버에게 운을 띄워 글로틴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한참을 마리앤과 글로틴 테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하고 마사의 문을 잘 잠가 두고 자리를 떴다.

쉐이든이 말과 조금 가까워진 것 같냐고 장난스레 물었을 때 벤자민이 시무룩한 기색을 보이기에, 이번 학기 동안에는 충분히 말과 친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하며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 * *

고급 검술 시간이었다. 이제 모든 아해들이 앞뒤 좌우 학우들의 검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검로를 뻗는 법을 몸에 익혔다.

간혹 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도 처음보다는 확실히 빈도가 낮았다.

겨우 며칠의 훈련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참 놀라웠으나, 이 모든 상황이 방향의 구분이 확실하고 서로 순서를 미리 익히고 짜 맞추는 덕분인 것을 알았다.

수업 초반 한 시간을 그렇게 보낸 뒤, 이번에는 마엘로 샌슨이 큰 원을 하나 그리고 그사이에 섰다.

원은 바르게 동그란 모양이었는데, 사이에 선 마엘로와 원 사이의 거리가 다섯 보로 일정했다.

“이제부터는 세 명씩 조를 짜서 나와 동시에 대련한다. 날 사이에 두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서 공격할 거야. 여기 이 원을 밟는 것은 되지만, 원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것은 안 돼. 시작점은 열두 시, 여덟 시, 열여섯 시 방향으로.”

마엘로 샌슨이 호명한 셋이 정해진 자리에 가 섰다. 마엘로 샌슨은 그들에게 어떤 검식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일일이 지정해 주었고, 아해들은 그대로 했다.

마엘로는 아이들이 뻗는 검을 반듯하게 밀어내거나 쳐내면서 조언해 주었는데, 그럼에도 몇 번은 아해들의 검이 서로 엉켜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다.

허나 세 명은 적은 숫자였다. 자신이 맡은 방향에만 치중하면 아군의 검이 뒤엉키지 않는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챈 아해들이 수를 쓰자, 마엘로가 한 아해의 검을 밀어 둘이 서로 부딪히도록 했다. 그 수가 오묘하여 절로 감탄이 일었다.

“상대의 움직임에 집중해. 내가 이렇게 하나를, 시계 방향으로 밀면 서로 자리를 바꿀 줄도 알아야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해. 이제부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도 좋아. 원 밖으로 나가지만 않도록 해서 계속해 보자.”

화경의 무인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검을 뻗는 자리마다 길을 막는 검이 있었다.

적당한 완력으로 휘둘러서는 상대하기는커녕 그어진 금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는 것부터가 힘이 들었다.

아해들이 시근거리기 시작하자 마엘로 샌슨은 이들을 멈추게 한 후, 곧바로 다음 학생들을 호명했다.

세 번째 팀을 호명할 즈음 해서, 샌슨 교수가 가까이 선 아해들을 그저 순서대로 부르는 것을 알았다.

하긴 시간이 지나면 다시 뒤섞일 테니 굳이 맞는 조합으로 짝지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을 알아챈 루베르가 루실라와 맷을 두고 나와 짝을 이루고 싶다고 가까이 붙었다.

아이가 이렇게까지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니 맷 니코는 루실라의 벗이지 루베르의 벗은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삼십 분에 세 명씩, 그렇게 아홉 팀이 돌았다.

나는 벤자민과 루베르를 옆에 끼고 다섯 번째 순번으로 마엘로 샌슨에게 덤볐다.

많은 아해들을 상대하며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데도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는 그가 존경스러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샌슨은 다음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수련을 한 뒤 다섯 명, 열 명으로 수를 늘려 가며 합격진을 연습한 뒤 자유롭게 합격진을 짜는 방도를 가르치겠다고 했다.

매 학기 같은 방법으로 훈련에 임할 학생들을 떠올렸다.

마엘로 샌슨 이전의 검술 교수도 같은 방법으로 교습했다면, 시어런의 무인들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기만 하면 곧장 합격진을 짜 적을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샌슨에게 사사한 이들은 서로의 합을 맞추는 시간 없이도 서로의 검의 간격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을 알았다.

중원에서도 악독하여 꼭 해치워야 할 강한 적을 상대할 때에는 인해전술을 주로 썼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라도 사람이라면 잠을 자고 먹어야 살 수 있었다. 앞서 덤빈 이들을 전부 죽인다고 하더라도 백 번째, 천 번째로 휘둘린 칼에 맞는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조리 같은 검식을 사용한다면 파훼 또한 쉬울 것이라, 대부분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목표를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다.

일단의 무리들을 어느 곳으로 보내겠다 하는 것을 책사가 정해 주기는 했으나 그도 남궁세가와 모용세가가 합격진을 펼쳐라 명할 수는 없었다.

불가능을 주문하는 것은 책사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정마대전 또한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수의 정파인을 끌어다 모아 무작정 천마를 향해 돌격하며 거추장스러운 마인들을 죄다 때려죽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모두 다른 검식을 사용하면서도 서로의 뒤를 떠받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내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부질없는 생각은 이내 떨쳐냈다. 일찍이 선인이 깨달아 익힌 것을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야 할 일이었다.

일정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검을 휘둘러 훈련하는 것보다 작은 깨달음으로 벽을 넘어서는 일이 왕왕 있었다.

깨달음의 조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 채 마엘로 샌슨이 아이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눈에 선명히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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