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금요일이 되었다.
이번 한 주 동안 초급 검술 시간마다 꾸준히 체력 훈련을 한 덕분인지, 아니면 다들 시간을 내어 따로 훈련을 한 덕분인지 수업 시간 중에 뒤처지는 학생이 한 명도 없어 큰 칭찬을 받았다.
다들 나이가 어려 회복이 빠른 것을 부러워했다가, 지금의 내 몸 또한 마찬가지인 것을 문득 깨닫고 흐뭇해졌다.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 시간에는 익숙한 동무들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세드릭 교수를 맞이했다.
지난 학기에는 서로 어색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닫고 아해들의 눈치만 살폈었으나, 그들과 모두 친해진 지금은 궁금한 이야기가 많아 입이 근질거렸다.
“아이고, 다 아는 얼굴들이네. 우리 꼬른이들 방학은 잘 보냈나?”
세드릭 교수는 언제나처럼 유쾌한 태도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서 학생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내게는 낯선 아해들의 얼굴도 몇 보였으나,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보면 지난 학기에 다른 요일의 수업을 들은 아해들이 저들의 조를 그대로 옮겨 온 모양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한 번 확인이나 해 본다는 듯한 어조로 세드릭이 각 조의 조장을 불러 조원들의 이름을 옮겨 적게 했다.
모든 조원이 같은 시간대에 수업을 신청하지 못한 학생들이 몇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아해들을 모아 다시 조를 만드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세드릭이 조장들을 불러다 놓고 지난 학기 조원 명단과 새로 작성한 조원 명단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는 동안 남은 아해들은 저들끼리 밀린 이야기를 수군대기에 바빴다.
개중에 특히 마리앤이 한번 만나 보기로 했다던 그 소년과 교양 수업 하나를 같이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무척 흥미진진했다.
마리앤이 슬쩍 운만 띄우고 수줍다며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아 제니의 애간장을 녹였다. 다른 소년들도 듣지 않는 척 귀를 기울이는 것이 우스웠다.
한창 좋을 나이였다. 나비가 꽃을 찾고 꽃이 벌을 꾀듯 자연스러운 모습이 흐뭇했다.
제니가 마리앤의 소매를 움켜쥐고 흔들며 앙탈을 부리다 못해 토라질 무렵, 세드릭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해들의 소란을 잠재웠다.
“그만, 그만. 이제 조장들은 새로 조원이 된 친구들을 인솔해서 자리로 가자. 오늘은 간단하게 이번 학기를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설명만 하고 일찍 수업을 마칠 생각이니까, 잠깐 집중해 달라고.”
조원이 단 하나도 변하지 않은 우리 조는 새로 인사할 일도 없었다. 이반 홀모스만 자리로 돌아온 데미안의 어깨를 수고했다며 한 번 툭 건드려 주었다.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 2학기 수업에 온 여러분을 환영한다. 강의 계획서를 보아서 다들 알고 있겠지만 본 수업은 1학기 수업을 들은 친구들만 수강 자격이 주어진단다. 왜냐, 바로 이번 학기부터는 직접 야외에 나가 수렵과 야영을 경험하는 시간을 갖게 되니까!”
깔깔깔, 높은 목소리로 웃는 세드릭의 웃음소리도 오랜만에 들으니 정겨웠다.
벌써 기대가 되지 않느냐는 둥 여러분에게 맛보여 주고 싶은 세상의 쓴맛이 많다는 둥 하며 수선을 부리던 세드릭이 교탁을 타앙 소리가 나게 내려치며 활짝 웃었다.
“물론 매주 외박하기에는 정신적 육체적 고행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는 매월 둘째 주에 한 번씩 현장실습을 나갈 예정이야. 첫째 주에는 이렇게 야영 장소와 주의점 등을 이론으로 학습한 뒤, 둘째 주에 현장 실습을 나가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고, 셋째 주에 현장 실습에서 챙겨 온 이런저런 물건들로 연금술 실험을 개시하고, 넷째 주에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헉.”
“뭐야, 방금 누가 이상한 소리 냈어? 보고서 쓰기 싫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세드릭은 재차 깔깔 소리를 내고는 교탁 위에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한껏 앞으로 숙여 아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다가 장난스럽게 찡긋 웃었다.
“1학기에 충분히 보고서 쓰는 법에 익숙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매달 제출하는 보고서인 만큼 분량은 최소 10페이지 정도로 줄여 줄 생각이야. 맥시멈 20페이지. 대신 쓸데없는 문장들은 빼고 깔끔하고 간략하게 적는 연습을 해 보자. 어때, 좋지?”
“네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렸다. 내 곁에 앉은 아해들 사이에서도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디에선가 학생 하나가 손을 반쯤 들더니 물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어떤 형식으로 보나요?”
“보고서 하나당 20점의 배점을 두고, 태도 점수 20점을 매겨서 총점 백 점 만점으로 성적을 매길 거야. 수업 시간에 꼭꼭 집중해. 내가 지켜볼 테니까.”
“예!”
지난 학기에 그러했듯이 새 학기에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홀수 달의 세 번째 주에 볼 것이 분명했다.
야영 수업 보고서를 한 주 늦은 넷째 주 금요일에 제출하는 것만으로도 시험공부를 할 여유가 추가로 생기는 것이라 참 다행이라 여겼다.
또한, 매주 둘째 주에만 현장 실습을 나가기 때문에 그 외의 주말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나 또한 다른 학생들처럼 질문을 위해 손을 들었다.
“강의 계획서에는 매주 토요일까지 다 비워 두라고 적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그야,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까? 실험 주는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면 토요일에도 수업할 거야. 여러분의 조는 앞으로 운명 공동체라고 생각하고, 잘해. 알겠어?”
“⋯예.”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는 듯 이켠을 원망하는 시선을 태연하게 흘려보냈다. 수업 시간에 해야 할 일만 잘하면 별문제 없을 것이란 선언이나 다름없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드릭 교수는 일정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더 받아 주고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 학기의 첫 야영지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야 지대였다.
수업 시간에 다 함께 모여 마차를 타고 이동한 뒤, 야영지를 탐색하고 필요한 약재 등을 채취한 뒤 본격적인 야영을 즐긴 뒤 다음 날 구보로 아카데미까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평야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약재의 종류는 이미 지난 학기에 배운 바 있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짚어 주는 것을 이전에 필기해 둔 노트를 펼쳐 찾아가며 들었다.
얼른 다음 주 수업 시간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조원들과 어느 음식을 챙겨 갈지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 * *
주말에는 언제나 그랬듯 새벽 훈련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홀로 나선 길이었다. 이제 노트 정리를 하거나 정리한 것을 보고 익히는 일에 쉐이든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았다.
쉐이든이 나를 가깝게 여기는 만큼 나 또한 쉐이든을 가깝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소년은 더 이상 어미 오리처럼 내 주변을 맴돌며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기꺼운 변화였다.
아카데미 도서관 정문은 다른 아카데미 건물이 그러하듯 크고 웅장했다.
여러 기둥이 천장의 부조를 떠받들고 있는 장식 안쪽으로 사람 여덟은 한 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기둥 중 하나에서 낯익은 기척을 발견하여 고개를 돌렸다.
“⋯에른하르트 영식.”
“안녕하세요, 선배.”
“공부하러 온 거지? 무슨 과목?”
친근하게 다가오는 갈까마귀 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며 막 떼어 두고 온 쉐이든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 녀석은 어릴 적에 내게 생명을 구함 받은 일도 없으면서 어쩐 일로 나를 이렇게 잘 따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다.
나는 위르겐 카이저의 아티팩트 수업 노트와 칼립스 아그리젠트의 제국의 계보 유인물을 꺼내 보였다.
저도 익히 아는 과목이라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루베르의 말에 그러자 하고 도서관에 들어서는 중에 문득 물었다.
“절 기다리신 겁니까?”
“어? 어어⋯ 아니, 굳이 그런 건 아니고⋯.”
“아니고?”
“⋯사실, 맞아. 기다렸어.”
루베르의 흰 뺨이 붉어졌다.
별것도 아닌 일로 지나치게 민망해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무공을 익혀 눈이 밝은 만큼 귀도 밝은 나는 루베르의 긴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 심장이 뛰는 소리, 주먹을 꽉 움켜쥐는 기척 같은 것들이 고스란히 읽혔다.
그저 함께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한 것으로 꾸중을 듣는 일은 옳지 않았다. 쉐이든처럼 선을 넘어 참견하고자 한다면 그때 막아도 충분히 알아들을 터였다.
어린 아해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저 덤덤히 말했다.
“다음부터는 미리 약속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주중에 얼굴을 못 보는 사이도 아니고.”
“그, 래도⋯ 돼?”
“물론입니다. 전 이번 학기에도 주말에는 대부분 도서관에 있을 생각입니다. 대신 선배도 선배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때 부탁하겠습니다.”
“응. 그럴게.”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지 않고 말을 잘 듣는, 유순한 것이 귀여워 웃음을 삼켰다.
루베르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녀석은 공부하는 중에도 얌전했다. 왼켠에 책을 펼쳐 두고 오른켠에는 빈 노트를 꺼내어 이런저런 필기를 하는 동안 펜 사각거리는 소리조차 숨죽인 것처럼 묵묵하고 조용하여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다만 루베르가 간간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보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노트로 시선을 떨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아해의 집중을 해치나 싶어 자세를 바로 했다.
오전 시간에는 유인물의 내용을 정리하여 노트에 펜으로 적고, 오후 시간에는 정리한 내용을 암기하기 위해 연필로 빈 종이에 외울 이름자를 적는 일을 반복했다.
간간이 숨 돌리는 시간마다 내가 정리하는 것을 들여다보며 이들은 어떤 특징이 있으니 이렇게 외우는 것이 편하다, 이 사건에서는 어느 일이 중요하니 그 키워드만 익혀도 충분하다 하는 것을 알려 주는 루베르가 있어 좋았다.
점심은 아카데미 내 식당에서 간단히 먹었지만 루베르가 저녁에는 외출을 하고 싶다 졸라 늦은 시간에 함께 시전에 나가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일요일에도 함께 공부하자 하기에 그러마 약속했다.
일요일에도 종일 공부를 하고 루베르와 둘이 시전에 나가 식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차를 타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산책을 하였다. 수도의 길거리를 살펴보며 지리를 익혔다.
중앙 공원 분수를 바라보는 아해의 표정이 무척 밝고 명랑하여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