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윌턴 로버츠 교수는 테이블 위에 허리를 둥글게 굽히고 앉아 있었다.
한 다리를 들어 올려 탁자 상판 모서리에 용천혈(*발바닥의 가운데 혈도)이 닿도록 하여, 그 세운 무릎에 뺨을 기댄 채였다.
교수는 그 상태에서 눈만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의 크기가 작아 더욱 뱀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시선이었다.
웃는 낯으로 교수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장검은 대개 허리에 패용합니다. 검신이 길기 때문에 무기를 숨기기 어렵고, 휘두르는 동작 또한 비교적 큽니다. 그렇기에 미리 경계하고 대비할 수 있습니다.”
“단검은.”
“⋯반면에 단검은 품속에 숨길 수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은밀하고 빠르게 공격을 펼칠 수 있기 때문에 대비하기 어렵습니다.”
“정답이다. 그럼 단검을 사용하는 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단검을⋯, 가지고 있는지 육안으로 살핍⋯ 니다.”
“상대가 단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홀스터를 착용한다거나⋯ 단검을 겉으로 보이도록 착용하였는지를⋯.”
“이번엔 반만 맞았군.”
윌턴 로버츠가 테이블에서 내려섰다.
단단해 보이는 구두를 신고 있음에도 그는 아주 작은 발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기이하게 여겼다.
은신술은 암살자들이 주로 익히는 것으로, 중원에서도 한번은 배워 보고 싶던 무공이었다. 시어런에도 그와 닮은 것이 있나 싶어 유심히 살폈다.
그는 바로 서서 양손을 어깨너비로 들어 보였다.
둥그렇게 굽혔던 허리가 바짝 서니 그제야 그의 키를 온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마른 몸 위에 길고 얇은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검은 베스트를 둘러 작고 왜소한 인상을 주던 그는 생각보다 꽤 길고 단단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축골공(*자신의 뼈 사이를 좁혀 몸을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닐 터인데 저 보이는 모습을 이토록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자연스럽게 칼립스 아그리젠트나 윌턴 로버츠 같은 이들이 몸을 담고 있는 제국 귀족 연감 부서들에 대해 감탄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말에는 더더욱 감탄했다.
“지금 내 몸에 몇 개의 단검이 숨겨져 있을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낮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대답을 바라고 물은 질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윌턴 로버츠는 제 셔츠의 양 손목에서 단도를 하나씩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얄팍한 검은 셔츠의 안쪽에 낙낙한 공간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교수의 행동은 작은 나무 상자에서 코끼리를 꺼내는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건 시작에 불과하였다.
로버츠 교수가 제 셔츠 단추를 벌리자 얇게 입은 목티 위로 가로지른 가슴띠가 보였다.
홀스터에 매인 단도들은 동선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빗장뼈처럼 가로질러 있었다. 왼쪽에 셋, 오른쪽에 셋을 더하여 여섯이었다.
셔츠로 가려져 있던 허리띠 왼쪽에도 단검 셋이 있었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바지를 걷자 단검 하나와 중검 하나가 더 나왔다.
지금까지만 헤아려도 열셋이다. 로버츠 교수가 오른발 뒤축으로 바닥을 툭 치자, 소리도 없이 신발의 앞축에서 칼날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장검을 사용하는 이들은 검을 놓치지 않는 법을 먼저 배운다. 하지만 단검은 품에 오래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없는 놈이라, 나와 같은 사람들은 대개 많은 수의 단검을 소지하고 다닌다.”
“⋯.”
“다시 묻겠다. 단검을 소지하고 있는 위험한 인물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윌턴 로버츠는 내려놓았던 단검들을 다시 패용했다.
내려놓았던 것의 역순으로 발목부터 허리, 가슴팍에 단검을 제대로 단 뒤 셔츠 단추들을 잠그자 알고 보아도 감쪽같았다. 그는 웃는 표정을 지웠다.
“위험한 이들은 대개 검은 옷을 입는다.”
“⋯예?”
“쉬운 답이지.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위협적으로 시꺼먼 옷만 입는 것이 취향인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교수의 농담에 몇몇이 킥킥 웃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윌턴 로버츠가 단단히 굳은 시선으로 아해들을 한 번 훑어보자 금방 그쳤다. 그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인가 싶어 나 또한 골몰했다.
윌턴 로버츠 교수는 답을 미리 알려 주는 수업을 하지 않았다. 그는 툭툭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질문하고, 학생들이 골몰하여 대답하면, 그 뒤에 제가 생각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학생들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뒤 그가 다시 물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사람을 죽이러 갈 때에도 이렇게 입을까?”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니요, 하고 작게 대답했다.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너희 곁에 머무르는지를 항상 확인하고, 단검을 다룰 때 가벼운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라.”
그 와중에 나는 마냥 떨떠름했다.
중원에서 암살자란 것들은 정말로 사람을 죽이러 갈 때에 흑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화촉을 밝혀도 어지간해서는 밝아지지 않는 까만 어둠 속에서는 흑의를 입은 이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무척 어려운 탓이었다.
물론 중원의 밤과 시어런의 밤은 많이 다르다지만, 밤은 아무리 밝다고 해도 밤이다. 야밤에 사람 죽일 일이 있다면 검은 옷을 입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중원에서도 노인과 여인과 아이를 조심하라는 말은 흔해 빠진 격언이었다. 주위 그 어떤 인물이라도 우습게 볼 일이 아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윌턴 로버츠는 아이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단검의 구조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도록 하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단순하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손잡이고 여기서부터 검신이다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 쥐면 좀 더 멀리 나가고 어떤 방식으로 쥐면 짧게 던질 수 있다 하는 말이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다 흥미로웠다.
다급한 상황에서 단검을 역수로 쥐어 살을 주고 뼈를 깎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을 적에는 교수의 모험담을 듣는 것처럼 생생하여 손에 땀을 쥐었다.
삐딱하게 선 윌턴 교수가 단검을 던졌다 받을 적마다 아해들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로버츠의 열 손가락이 그려 내는 움직임들이 모두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을 반으로 가를 듯 섬세했다.
어깨에서부터 손끝 마디까지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신기하여 몇 번 작은 동작으로 따라 해 보아도 잘 안 되었다. 다음 수업부터는 본격적으로 알려 준다 하기에 무척 기뻤다.
* * *
저녁 식사 후, 쉐이든을 앞에 두고 노트 정리를 했다.
2학기에는 금요일로 수업을 옮긴 연금술과 야영 수업이 토요일까지 이어져 자습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쉐이든 둘 모두가 1학기 때보다 더 필기 정리에 열을 올렸다.
그 주에 배운 것을 노트에 정리하고 쉐이든의 것과 비교해 중요한 부분들을 한 번씩 더 확인했다.
노트 정리를 끝낼 무렵 쉐이든에게 비도술 수업을 함께 듣는 아해들에 대한 것을 물었다.
쉐이든은 이번에도 그들 모두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비도술 수업을 함께 듣는 이들이 모두 검술부 학생인 덕인지, 아니면 타과생이 섞여 있어도 마찬가지였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참 신기했다.
그중에서도 3학년에 재학 중인 올리버 컴바인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올리버 컴바인은 적당한 키와 체격을 가진 무인이었다. 턱 언저리에 끝이 닿는 청록빛 머리칼은 해초처럼 구불구불해서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얌전히 있으면 깐깐한 인상이었는데, 이런저런 설명을 하는 것을 좋아하여 말이 많았다. 그는 글로틴 테너의 절친한 친구라고 했다.
글로틴 테너는 마리앤 필로덴도르가 이번 여름 방학에 좋아하게 되었다는 소년으로, 나는 아직 얼굴을 본 적 없지만 생김새가 무척 미끈한 모양이었다.
마리앤이 안경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라 했던 말을 전하자 쉐이든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테너 선배가 잘생기긴 했지. 경영부 사람이니만큼 공부도 썩 잘할 테니 안경도⋯. 그래, 잘 어울릴 수도 있겠네. 마리앤이 그런 얘기까지 했어? 나한테는 신경 쓰지 말라 그러더니.”
“글쎄, 내가 그 사람 잘생긴 것을 믿지 않으니 더 안달이더라.”
“어쨌든 테너 선배와 컴바인 선배는 꽤 절친한 사이라고 들었어. 딱히 주의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내가 보기에는 둘 다 그냥 좋은 사람이라서. 마리앤 얘기만 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
내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성정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 조심할 것을 다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득 궁금하여 재차 물었다.
“경영부 인물과 올리버 컴바인이 어찌 그렇게 친하지?”
“나이가 동갑이기도 하고, 테너 가는 컴바인 가의 가신으로 오래 일해 왔거든. 가까울 수밖에 없지, 뭐. 게다가 성격도 잘 맞는다고 들었어. 컴바인 선배가 사람을 좋아하고 설명해 주는 걸 좋아한다나.”
“아, 그건 그렇더라. 초면에도 묻는 것은 대답을 잘해주고.”
“그렇지?”
그러더니 쉐이든은 윌턴 로버츠 교수에 대한 것을 이것저것 상세하게 물었다. 이 학교에 그가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으나 나 또한 상세히 알려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걸음걸이가 소리 없이 신중하고 행동거지가 교묘하며, 몸의 세밀한 근육까지 온전히 제어할 수 있는 높은 경지의 무인이다 하고 한참 설명하니 쉐이든이 내 말을 끊고 저 원하는 것을 물을 테니 답하라 하기에 그러마 하였다.
윌턴 로버츠의 머리 터럭이 잿빛이고, 그 눈동자가 모래처럼 옅은 색을 띠고 있으며, 목부터 발끝까지를 온전히 감싸는 시꺼먼 옷을 둘둘 감고 왔다 하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 쉐이든은 퍽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로버츠 교수의 소속을 듣고 나서야 이해가 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국 귀족 연감 하위 부서 소속이면 그럴 수 있지.”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 말고도 귀족 연감 제작에 관여하는 이들은 다들 그런 식이야?”
“어어⋯. 일단 직업적인 이유로 그쪽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거든. 칼립스 교수님도 휴식 시간에 교수실 밖에 잘 안 나오시잖아.”
“⋯그런가.”
“으응. 발터 선배가 끌고 나오는 게 아니면⋯ 아차.”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발터 그 선배는 교수들과 참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더라.”
발터 오르겐이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잘 아는 탓인지, 아니면 원체 성격이 서글서글한 탓인지 모르겠다 하며 그의 태도를 칭찬했다.
잠시간 더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쉐이든이 피곤해 자야겠다기에 자리를 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