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수요일. 초급 검술 시간에는 기본 체력 향상을 위한 훈련에 몰두했다.
제국의 계보 수업을 맡은 칼립스 아그리젠트는 오늘도 비실비실한 낯을 하고 들어왔다. 목덜미에 스카프가 감겨 있는 것을 보니, 방학이 끝났다 하더라도 아직 한여름인데 그렇게 추위를 타는가 싶어 다시 한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지난 학기에 그랬던 것처럼 칼립스 교수는 교실에 들어서서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에 칠판을 빼곡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지난 학기 수업 첫날에는 크게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이번에는 아는 이름들이 절반은 넘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표식이 새겨져 있는 이름자가 지난 학기와 다르기에 살펴보니, 교실 안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그때와 다르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학생들의 구성에 따라 좀 더 도움 되는 이들이 다르다는 뜻으로 읽혔다.
아이들의 얼굴만 보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테니 미리 학생 명단을 받아 나름의 조사를 해 온 것이 분명했다.
사람은 나이가 얼마가 들어도 배워야 한다더니 그 말이 옳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칼립스 교수의 손에서 또닥또닥 백묵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옆에 앉은 쉐이든이 지난 학기를 상기시키려는 듯, 아이를 달래는 듯한 표정을 짓고 내 어깨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모르는 척 무시하며 손안에 쥔 펜이나 두어 바퀴 돌렸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분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름 위에는 별표를 새겼습니다. 친척, 후견인, 양자 결연의 가능성이 있는 분들입니다. 같은 시기에 졸업하는 아카데미 동기인 만큼 서로는 서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외우세요.”
지난 학기와 완전히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는 별표, 동그라미, 세모와 네모 표식이 되어 있는 이름자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하고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지난 학기와 동일했다.
“지난 학기에 제 수업을 들은 분들은 아실 테지만, 다음 주에 오늘 판서한 내용과 나눠 준 유인물에 대한 쪽지 시험을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매주, 일정한 양의 유인물을 주고 끝마치기 십 분 전에 다섯 문항의 쪽지 시험을 볼 겁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과제는 따로 없습니다. 공부하세요.”
학생들이 유인물을 모두 제대로 나누어 가진 것을 확인한 칼립스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칠판의 오른쪽 모서리 끝 부근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의 손에는 장정이 되지 않은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
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쩐지 잘 해낼 자신이 생겼다.
* * *
비반 오티프 교수의 명마 예찬론 수업은 학술부 건물 뒤쪽의 너른 공터에서 이루어졌다. 쉐이든, 벤자민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모이는지 몰라 길을 잃었을 뻔했다.
몇 번 시어런 아카데미의 담장을 따라 빙 둘러 걸은 적은 있었으나 대개 수업이 끝난 야밤의 일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넓고 좋은 언덕이 있는 줄은 이번에 알게 되었다.
공터의 한켠을 넓게 깎아 덩그러니 올린 건물은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 세모난 지붕을 덮었는데, 자세히 보니 지붕과 벽 사이의 간격이 넓었다.
지붕을 떠받든 기둥들 사이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지어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짐승 냄새가 훅 끼쳤다.
마사(馬舍)였다. 건물의 양 끝에 커다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말 두 마리가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복도 또한 마찬가지로 넓었는데, 마사에 들어서자마자 좌우로 칸칸이 들어 있는 말들이 말구유 너머 이켠으로 시선을 두었다.
자세히 헤아리지 않아도 오십이 넘는 수였다. 그 반지르르한 털빛을 보아하니 먹이도 아주 잘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온순한 눈을 한 아름다운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수업을 듣길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 켠에서 몸에 잘 맞는 승마 바지를 입은 젊은 청년 하나가 큼직한 자루에서 당근을 꺼내어 꼼꼼하게 고르다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왔어? 앉아.”
“예?”
“앉으라고, 저쪽. 아직 다 안 와서 좀 더 기다릴 거야.”
하는 것을 보고서는 교수인지, 아니면 교수를 돕기 위한 근로 장학생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청년이 가리킨 쪽으로 가자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또래의 학생들이 잘 마른 짚단 위에 옹기종기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잠시간 기다리니 학생 몇이 더 들어와 마찬가지로 짚단 위에 앉았다.
그제야 아해들의 수를 헤아린 청년이 손을 털며 돌아서서 이쪽을 보며 덧니가 드러나도록 희게 웃었다.
“반갑다. 내가 비반 오티프야. 시어런 아카데미 졸업한 지 이제 딱 2년 됐고, 겸임 교수로 임용된 지도 딱 그만큼 됐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니까 교수님이라고 부르기 어색하면 그냥 선배라고 불러도 돼.”
비반 오티프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머리칼에 붙은 지푸라기 몇 개를 떼어 냈다.
그러나 머리칼에 붙은 지푸라기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머리에 붙은 지푸라기들이 더 신경 쓰이게 되었다.
웅성거리던 아해들이 안녕하세요, 인사하거나 네에, 대답하거나 얌전하게 구는 사이로 누가 불쑥 물었다.
“겸임 교수라고 하시면 본업이 따로 있으신 건가요?”
“그렇지, 뭐. 오티프 마사회에서 가업으로 말 생산 및 판매유통업을 하고 있거든. 주에 두 차례 학교에 와서 수업을 진행하면서 말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는 겸 부업으로 강의도 하는 거고. 다른 거 뭐 궁금한 거 없어? 첫사랑 얘기 빼고는 다 해 줄게.”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뭐야, 누구야?”
비반 오티프의 태도가 방만하고 언행이 자유로웠기 때문인지, 나이 차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인지 학생들의 태도가 해이했다.
비반은 장난스럽게 아이들과 몇 마디 나누며 투닥거리다가 등받이 없는 의자 하나를 끌어와 아이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을 알아 장난치던 아해들도 금방 얌전해졌다.
“어쨌든 그래서, 명마 예찬론 수업에서는 좋은 말을 고르는 법, 말을 아끼고 돌보는 법, 직접 말에게 먹이와 간식을 주는 법 등 올바른 사육법과 재갈과 안장 등의 승마 보조 도구를 바른 방법으로 채우는 법을 배울 거야. 이 중에서 말을 한 번도 타 보지 못한 사람 있을까?”
서른 남짓한 아이들 중 여섯을 제외한 전부가 손을 들었다.
대부분의 귀족 아이들은 어릴 적에 자신의 말을 선물 받아 자신의 집에서 승마법을 익히고는 했다.
손을 든 아이들을 둘러본 나는 그제야 이 자리에 있는 아해들의 대부분이 평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시어런 아카데미에서는 귀족과 평민이 똑같이 아카데미에서 제공한 교복을 차려입기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고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구입하고 사육할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단승 작위를 받고 세상에 나가려면 제대로 말 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본 비반 오티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말을 무서워하는 녀석은 있나?”
이번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비반은 또다시 덧니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쾌활하고 명랑해 보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말을 다룰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부터 알려 줄게. 여기 있는 녀석들은 다 똑똑해. 말들은 지능이 높아서 어느 정도 사람의 기분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니 앞에서 욕설을 하거나 거친 행동을 보여서 말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해. 그리고 두 번째, 절대로 말의 시야 아래로 내려가거나 꼬리 뒤쪽에 서서는 안 돼. 위험할 수 있으니까.”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말들이 군마는 아니었지만 건장하고 튼실한 것이 확실히 대단해 보였다.
말의 뒷발에 잘못 차였다가는 무예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해들은 뼈대 몇 개는 쉽게 부러질 터였다. 다들 진지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세 번째. 절대로 겁먹지 마.”
비반의 단호한 목소리에 몇몇 아이들의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바로 조금 전에 모든 아이들이 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바 있었다.
게다가, 명마 예찬론은 교양 수업이었다. 직접 말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아이들이니 겁을 먹을 리 없었다. 그러나 비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실제로 말을 접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있어. 말이 얼마나 거대하고 강한 생물인지 모른다는 것. 지금 당장 마사에 가서 말의 앞에 서면 너희 정수리보다 말의 머리가 더 높이 있을 거야. 여기 있는 친구 중에 마차를 끌 수 있는 녀석이 있어?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녀석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쯤 되면 모를까, 쉽지 않을걸.”
쉐이든의 시선이 내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나는 비반 오티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크고 험악하고 무섭게 생긴 용병을 보면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처럼, 거대한 말을 보고 겁을 먹는 친구들이 학기마다 있어. 겉으로는 아닌 척 괜찮은 척해도, 말들도 다 알아. 겁에 질린 눈, 떨리는 손, 머뭇거리는 다리, 작고 소심한 말투. 그러면 말들은 너희를 우습게 여기게 될 거야. 왜? 말은 서열을 이해할 수 있는 고등 동물이거든.”
과연 옳은 말이었다.
현생에서는 의아할 정도로 모든 짐승들이 나를 잘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나는 그것이 내가 경지에 오른 까닭이라고 생각했다.
중원에서도 도문(*도를 닦는 문파)의 고수들은 다람쥐나 사슴, 새 같은 짐승들을 쉽게 부렸다. 영물들이 기운을 읽고 찾아와 주저앉는 일도 흔했다.
강한 자에게 삶을 의탁하는 일은 인간이나 짐승이나 매한가지인 일이다.
“허세라고 해도 좋아. 강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 두려워하지 말고, 머뭇거리지 말고. 그러면서도 말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면 말들도 너희에게 마음을 열 거야. 그럼 오늘은 간단하게, 먹이 주는 것부터 해 볼까?”
비반 오티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빙긋 웃었다.
아이들도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붙은 지푸라기들을 떼어 내며 수선을 부렸다.
벤자민이 머뭇거리며 말들이 그득 들어 있는 마사 안쪽에 시선을 두었다.
“왜요.”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이 우스워 쓸데없는 걱정은 덜어 내라 하며 녀석의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