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일류무인 다섯이라면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적을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서로 다른 검식을 쓰는 서른의 인원이 모두 공세를 펼친다면 서로의 검로를 막아도 몇 번은 막을 터였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 하더라도, 한 사람은 기껏해야 동서남북 네 방향을 바라볼 수 있다. 쪼개고 쪼개어도 서른여섯 방위였다. 종남의 검을 익힌 것도 아닐진대, 그중 어느 곳으로 뻗어야 서로를 방해하지 않을지를 어찌 예측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의아한 한편으로는 마엘로 샌슨의 경지와 안법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다.
이안 벤터스 경도 샌슨이 학생일 적에 수석만 도맡아 했다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가 가르치는 것을 온전히 받아 삼키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렇게⋯ 눈을 그렇게 무섭게 뜨고 볼 필요는 없고. 오늘은 첫날이니까 쉬엄쉬엄할 거야. 자, 우리 다 같이 심호흡할까? 후읍, 하아⋯.”
샌슨의 농담에 다들 와르르 웃기에 나 또한 따라 웃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었다. 이쪽을 돌아본 벤자민이 검집으로 내 검집을 툭 치며 장난을 걸었다.
시키는 대로 깊게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마엘로 샌슨이 땅에 새겨 둔 표식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었다.
나는 나의 검이 그려내는 간격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팔다리의 길이와 검신의 길이, 그리고 검병을 잡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그 짧고 긴 거리를 재는 일은 무척 중요했다.
자리를 잡는 것을 도우며 샌슨이 특별히 몇몇 이름을 따로 불러 자리를 정해 주었다. 이들이 유난히 간합이 길거나 짧은 녀석들인 것을 한발 늦게 알았다.
“모두 자신이 선 자리에서 검집째로 팔을 뻗어 검이 닿는 거리까지 바닥에 반원을 그려보도록. 이렇게.”
교수의 시범을 따라 모두가 반원을 그렸다.
등 뒤까지는 손이 닿지 않아 오른손을 쓰는 나는 오른쪽으로 치우쳐진 긴 호선을 그렸다.
샌슨이 시키는 대로 그 호선의 양 끝에서 몸에 닿는 직선을 바르게 긋고 나니 부채꼴의 꼭짓점에 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내 간합을 이런 방식으로 시각화하여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나와 다른 학생들의 간합의 크기를 눈으로 견주어 보았다. 저들의 간격이 나보다 길거나 짧은 것은 알았으되, 이렇게 모두의 것을 비교하여 보는 방안이 신기했다.
나중에 가문의 기사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어 단단히 기억해 두었다.
“여기에서 세이렌 검형을 사용하는 녀석들은 반 발짝 앞으로 나서서 선을 한 번 더 긋고, 플란츠 검형을 쓰는 녀석들은 왼쪽으로 몸을 이만큼 돌려서. 그래, 제4식의 방법대로 선을 한 번 더 그어 둬. 에른하르트 넌, 오른쪽으로 반 바퀴 돌아서⋯ 말 안 해도 잘 아네.”
창천무애검의 8식을 뻗을 때 오른팔의 팔꿈치를 뒤로 깊게 빼어 휘두르는 동작이 있었다. 무엇을 짚어 말하는 것인지를 알고 그대로 행했다.
찬찬히 아이들이 바닥에 그린 것을 살핀 마엘로 샌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서로의 간합에 들어가 있었다.
내 왼켠에 서 있는 벤자민이 오른쪽으로 검을 뻗을 때 내가 왼쪽으로 검을 뻗는다면 반드시 서로의 검이 맞닿아 뒤엉킬 터였다. 아예 간격을 멀리 두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가까이 서 있어서 무슨 연습을 할까 흥미가 일었다.
“이제부터 1열, 3열, 5열은 오른쪽으로 먼저 검을 휘두른다. 2열, 4열은 왼쪽으로 먼저 검을 휘두를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검식을 사용해도 좋지만 발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자.”
“예? 그러면⋯.”
“그래, 서로의 검이 부딪히고 엉키겠지. 최대한 자신의 검로를 지키면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실시.”
나는 또다시 넋이 빠지려는 것을 애써 다잡았다.
물론 내 왼켠에 서 있는 벤자민의 검형이나 오른켠에 서 있는 루베르의 검형은 익히 알고 있어 어느 것을 쓰더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 검과 검을 맞대는 것이라면 그보다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러나 검과 검이 맞부딪치지 않게 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무인이란 자신의 방향으로 오는 검을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서 챙하고 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해들의 검이 부딪칠 때마다 마엘로 샌슨은 고른 호흡을 내뱉고 단호하게 읊조렸다.
“다시.”
나는 3열에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먼저 검을 뻗었다. 그러자 루베르가 자연스럽게 검을 내어 내 검을 막았다. 챙, 소리가 나자마자 앗차 하여 곤혹스러운 낯을 하는 녀석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때 마엘로 샌슨의 해설이 귓가에 닿았다.
“지금 바닥에 그은 선을 잘 봐. 겹치는 부분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지, 검을 얼마나 멀리 뻗어도 되는지를 잘 생각해서 휘둘러 봐. 서로의 검을 믿어. 이웃한 친구가 나를 찌르지 않을 것을 알고 움직이는 거다. 자, 다시.”
하다 보니 상대가 비껴갈 수 있는 검로를 고르고 골라 뽑아내게 되었다.
루베르와 한 번 눈을 맞추고, 벤자민과 한 번 눈을 맞춘다. 번갈아 몇 번을 그렇게 하고 나니 십여 초 정도는 검을 부딪치지 않고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마엘로 샌슨은 이제 좌우로 검을 뻗는 아해들의 사이를 거닐며 힘이 빠져 검식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언을 덧댔다.
지구력이 약한 몇몇의 팔이 처지는 모양새는 직접 자신의 검으로 검 끝을 들어 올려 해결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발이 움직인 몇몇의 자리를 고쳐 주었다.
또다시 루베르와 한 번, 벤자민과 한 번⋯ 따지고 보면 가위바위보 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순한 것도 같고 복잡한 것도 같았으나, 생전 처음 해 보는 방식의 훈련에 즐거워 입가에 웃음이 절로 맺혔다.
“루베르, 팔에 힘이 빠졌잖아. 검을 놓치지 않도록 파지법을 제대로 해서 꽉 잡아. ⋯됐다, 그렇게.”
하여간 갈까마귀 같은 놈이 하루에 한 번은 꼭 허약한 티를 내는 것이 신경 쓰여 그 표정을 흘긋 살폈다.
지적받은 것이 민망한지 녀석의 귓가와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내가 오래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금방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일류에 가까운 실력을 갖춘 아해들이다. 반 시진이 지나자 모두들 수월하게 삼십여 초 정도는 서로의 검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검로를 뻗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마엘로 샌슨은 학생들이 선 자리를 바꾸었다. 낯선 방식의 검을 대하자 또다시 챙, 챙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익숙해지면 자리를 바꾸고, 익숙해지면 자리를 바꾸어 똑같이 수련하는 것을 두 차례 더 반복하고 나자 진이 쪽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계산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때쯤 수업 시간이 딱 끝이 나 혀를 내둘렀다.
마엘로 샌슨이 이런 방식으로 가르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샌슨은 오늘은 양옆으로 검을 뻗었지만, 다음 수업에는 앞뒤를 더하여 사방으로 검식을 펼칠 거라는 말을 했다.
이번 학기의 목표는 어느 상대를 옆에 두더라도 서로의 검식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자신의 검로를 곧게 뻗는 것이라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몇 번이고 엇나간 박자에 검을 부딪친 탓에 손아귀가 얼얼했다. 몇 차례 주먹을 꽉 쥐었다 놓으며 웃음을 삼켰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많았다.
점심 식사는 지난 학기처럼 벤자민과 루베르, 루실라와 맷을 더해 다섯이 했다. 루베르가 방학 동안에도 수련을 열심히 했다며 자랑하기에 칭찬했다.
* * *
매주 화요일 오후마다 방문하게 된 더글라스 머스탱의 교수실에는 이전에도 본 적 있었던 메이지 볼더가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자리를 넓게 차지했는지 서류철 몇 개가 테이블 위에 있는 것으로 모자라 바닥 일부분에서도 나뒹굴고 있었다.
더글라스 머스탱은 오전 내내 시달린 기색으로 제 태양혈을 엄지로 꾹꾹 누르며 골치 아픈 기색을 삭이고 있었다.
나 또한 내 앞에 수북이 놓인 종이 뭉치를 넘겨다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와 알지 못하는 언어가 뒤섞여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걸로 무얼 하라는 것인지 몰라 멀거니 서 있자 충혈된 눈을 한 메이지 볼더가 서류 몇 개를 들고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일전에! 약속드렸던! 서면 보고서! 입니다! 일단은 제가 에른하르트 영식이 보여 주신 마나 운용 방법에 대해서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아서 그걸 가장 첫 단계로 넣었습니다. 머스탱 교수님께서는 마나를 운용하는 동안 타인의 접촉이 있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건 어느 정도의 접촉까지 안 되는지를 테스트해 보고⋯.”
“안 돼요.”
“기의 흐름이 있는 물체와 접촉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더글라스와 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더글라스 머스탱은 아주 피로한 표정이었는데, 나를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올곧은 목소리를 냈다. 평소 유약하던 그의 성정을 생각하면 대단히 감동적인 행동이었다.
“학생의 신체 건강에 위협이 될 만한 접촉은 금지한다고 말씀드렸어요.”
“이건 위협이 아니라 그냥 아주 간단한⋯.”
“안 됩니다.”
“⋯예에. 그럼 설명을 듣고 필기하여 서면으로 확인받은 뒤에 골렘을 사용해서 동일한 방식의 마나 흐름을 재현해 보려고 합니다. 에른하르트 영식이 보고 완전히 같다고 느낄 정도로 골렘의 재현율이 높아지면 비슷한 골렘을 양산해서 마나의 이동 경로를 변경해 가면서 테스트를 해서 그중 가장 적합한 골렘의 넘버를 확인받으려고요.”
“골렘?”
모르는 단어를 들어 의아하게 되묻자, 메이지 볼더는 그 특유의 쾌활하고 떠들썩한 목소리로 골렘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주었다.
찬찬히 듣고 보니 흙으로 빚은 강시를 이르는 말인가 싶었다. 허나 시체로 만드는 것보다는 그 모양새도 쓰임도 훨씬 좋아 보였다.
이렇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이렇게 많은 서면 보고서를 들고 온 까닭을 슬쩍 물었다.
메이지 볼더가 무척 억울한 표정을 하며 칭얼거렸는데, 지천명이 가까운 사내가 이렇게 찡찡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듣지 않고 서류를 정리하는 것을 돕겠다 했더니 볼더가 엄지와 검지를 맞부딪치며 시동어를 읊었다.
순식간에 착착 서류들이 가방 옆에 어여쁘게 정리된 모양새를 보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이리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을 도대체 왜⋯.
메이지 볼더를 보낸 뒤 더글라스 머스탱과 둘이 식사를 하는 도중에 해당 내용에 대해 물었더니, 더글라스는 사람 좋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제게 시위하는 거죠.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좀 봐 달라고.”
“무엇을요?”
“그냥, 뭐든요. 마법사들은 아이 같은 구석이 많아요. 떼쓴다고 다 넘어가 주면 안 돼요, 에른하르트 영식.”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마법이란 것이 참 신기하단 생각을 하며 고개만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