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목요일에는 수강 신청을 하기 전에 야영 수업을 함께 했던 동무들과 다 함께 서로의 시간표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야영 수업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진행되는 것으로 신청하자는 말에 모두 동의했는데, 2학년이 되면 시험공부가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에 1학년 중에 주말을 사용하는 수업을 모두 들어 두는 것이 좋다는 설명이 따라붙어 미리부터 겁이 났다.
함께 맞추지 않은 수업 중에서도 겹치는 수업이 몇 있었다.
데미안도 아티팩트 수업을 함께 듣는다고 했고, 제니와 이반은 제국의 계보 수업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다만 마리앤과는 겹치는 수업이 야영 수업뿐이었다.
마리앤의 시간표에는 마법 수업이 네 개나 됐다.
앤젤라 스팅 교수의 수업뿐 아니라 다른 수업들도 모두 흥미진진했다. 마법과 수식 이론 기초, 생활과 밀접한 마법, 고전 마법의 현대적 해석, 일곱 가지 마법 언어 활용.
이름만 들어도 눈앞이 어질했다.
“저번에 미카엘이 수식 이론 기초를 듣고 에드윈과 대련해 이겼다는 소문 때문에, 이번에 검술부 학생들이 엄청 많이 들어왔어요. 수강 신청을 하다가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게 다 미카엘 때문이에요.”
“그럼 마리앤도 내일⋯.”
“아뇨! 우리 천사 같은 앤젤라 스팅 교수님은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학생을 거절하지 않거든요. 수강 가능 인원을 늘려 주셨다고 들었어요. ⋯왜 웃어요?”
“아니, 검술부 학생들이 마법부 수업을 듣기 위해 달음박질할 생각을 하니 우스워서요.”
“와⋯. 마물인가?”
사실이 그랬다. 이번 마법 아티팩트 수업도 경영부 건물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어런 제국은 땅덩이가 무척 넓은 제국이었다. 때문에 수도에 있는 중요 기관들의 크기는 모두 어마어마했다. 시어런 아카데미도 건물만 이백 개가 넘었다.
그중에서도 검술부와 마법부는 끝과 끝에 있었다.
따로 수련하지 않는 일반인은 검술부에서 마법부까지의 길을 따라 걸으면 한 시간 반이 훌쩍 넘게 걸렸다.
경공을 펼치던 습관 탓에 보폭이 넓고 걸음이 빠른 나도 지난 학기에 검술부 건물에서 마법부 건물까지 이동하는데 낙낙하게 한 시간을 잡아 두었다.
샌슨 교수의 수업이 길어져 지각할 듯하여 온 힘을 다해 내달렸을 적에도 일각(*15분)은 넘게 걸렸으니 말해 무엇할까.
아무리 내 몸이 덜 자라 팔다리의 길이가 짧다 하여도 경공의 묘리를 익히 알고 있음을 고려하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검술부 동기들이 마법부 수업 전후로 이동 시간을 넉넉하게 두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쉐이든이 어깨를 으쓱한 뒤, 제 앞에 놓인 시간표를 정돈했다.
“마검사는 이전 세대의 꿈이었으니까. 지금은 마검사를 꿈꾸는 사람들도 사라졌으니 검술부랑 마법부 건물이 멀리 있는 게 당연해. 머리도 좋은데 몸도 잘 쓴다니, 그런 건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잖아. 보기엔 좋아 보여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그래도 멋지잖아요? 전 검술부 애들 덤블링 하는 게 제일 부러운 사람이에요.”
“차라리 댄스 교습을 받겠습니다.”
쉐이든의 반박에 다 함께 와르르 웃었다.
쉐이든은 나와 함께 듣는 과목을 제외하면 전부 경영부와 학술부 수업으로 시간표를 채웠다.
그 두 부서는 건물이 기숙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상대적으로 이동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둘 다 가장 신체 단련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학부 중 하나인데, 이동 거리도 짧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설계가 잘못된 것 같았다.
다 같이 수첩의 아카데미 지도 부분을 펼쳐 두고 각 강의실의 이동 거리를 재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렇게 따져 보니 데미안이나 이반, 제니는 같은 건물 내에서 층만 다르게 오가며 수업을 듣는 일도 많아 참 신기했다.
내가 지난 학기에 이동한 거리를 살펴본 아해들이 다 같이 혀를 내두르기에 그저 웃고 말았다.
“마법부 수업 듣는 검술부 학생이 누군지 이름도 압니까?”
“어어, 이름은 모르겠어요. 그냥 소문으로 전해 들어서.”
“내가 알아. 신청하겠다는 녀석이 여덟 명이나 되는 것 같더라고.”
과연 발 넓은 쉐이든이었다. 말리지 그랬냐는 마리앤과 데미안의 목소리에 쉐이든이 한숨을 폭 내쉬고 어깨를 다시 한번 들썩였다.
“안 그래도 내가 말렸는데, 아침에 연무장 도는 건 못해도 점심 먹고 한 시간 달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고 하더라. 미카엘이 했는데 자기는 못 하겠냐며.”
“뛰는 것은 공복에 해야 효과가 좋은데도.”
“그 말도 했는데 소용없었어.”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다 같이 모여 앉은 김에 과제는 언제 하고, 시험공부는 언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며 계획도 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음 학기도 무척 기대가 되어 가슴이 술렁였다.
수강 신청서를 몇 차례나 꼼꼼하게 확인한 뒤에 학과 사무실에 제출했다.
주말에도 바빠질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다시 모일 날이 많지 않다며 다들 수선을 부린 탓에 저녁 식사는 외출하여 밖에서 먹었다.
갓 도착한 학생들로 아카데미 정문 앞도 시전도 복작복작하여 활기가 도는 것이 참 좋았다.
* * *
그리고 금요일.
나는 황망하게 학과 사무실 앞에 서서 제비뽑기 쪽지에 내 이름을 적었다.
다행히 마엘로 샌슨 교수의 수업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보다 세 배로 곤란하여 전전긍긍했을 터였다.
문제가 생긴 과목은 목요일 오후로 잡아 둔 윌턴 로버츠 교수의 실전 비도술 수업이었다.
지난 학기에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 교수의 강의는 수강 가능 인원이 열 명밖에 되지 않았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만 수업이 있어 동무들과 명마 예찬론을 함께 듣기로 한 나는 다른 시간으로 옮길 수도 없었다.
중원에서 제비를 뽑을 적에는 긴 막대 끝에 붉은 칠을 하여 사용하곤 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제비뽑기는 글자를 적은 종이를 커다란 상자에 넣고 학과 사무실 직원이 정원 수만큼 뽑는 방식이었다.
각 과목의 이름이 적힌 상자를 담은 직원들이 아이들 사이를 거닐며 명단을 확인하고 쪽지를 나누어 주었다.
제비를 뽑으러 온 학생들 사이에서 전운이 감돌았다.
이름을 적는 종이는 다 같은 종류의 것이고, 제비를 뽑는 이도 모든 학생을 공평하게 대하는 이였다.
언제 넣든 큰 상관이 없을 텐데도 아해들이 모두 제비를 나중에 넣으려 하기에 나도 늦장을 부렸다.
비도술이야 교수 없이 나 혼자 익혀도 되는 것이라 마음을 다스리려 해 보아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초조하게 굴게 되었다.
소원하는 마음을 담아 정갈하게 이름을 적은 쪽지를 두 번 접어 상자에 넣었다.
눈앞에 놓인 상자들은 모두 흰색이었다. 상자마다 네 귀퉁이가 닳아 있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학과 사무실 직원들은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지금이라도 수강을 취소할 학생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으나 포기하는 이는 없었다.
무언가 상의하고 적고 하던 직원들 중 하나가 내가 바라보던 상자를 손에 들어 저쪽 테이블로 옮겨 두었다. 아해들의 시선이 조로록 상자를 따라 움직였다.
“실전 비도술 수업 신청한 학생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나와 벤자민, 그리고 약 서른 명의 학생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 중 절반은 아는 얼굴이었고 절반은 모르는 얼굴이었는데, 선배인 것으로 보이는 한 녀석이 다른 학생들에게 절실한 표정으로 애원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진짜 포기해 줄 사람 없어? 나 재수강이라 이거 못 들으면 졸업 학점이 위태롭단 말이야.”
“있겠냐. 그 윌턴 로버츠인데. 이제 눈 감고 빌어. 제발 이 수업 듣게 해 달라고.”
“흐어어엉⋯.”
그 윌턴 로버츠라니, 로버츠 교수도 유명한가 하고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마엘로 샌슨은 이전에 윌턴 교수가 학교에 자주 오지 않아 얼굴을 보기 어렵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고, 쉐이든 로제는 그 교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말만 했다.
바로 저번 학기에 루베르 안티 시어런이 로버츠 교수와 친하다는 이야기를 했던 생각도 났다.
어떤 이인지 미리 루베르에게 물어볼 것을 그랬나 하고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머리를 높게 질끈 올려 묶은 직원이 익숙한 손동작으로 빠르게 제비 상자에서 종이를 꺼내어 하나하나 호명했다. 이름 하나가 불릴 때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음.”
내 이름은 네 번째로 불렸다.
나도 모르게 깊게 안도하여 큰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려도 벤자민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늘상 묵묵하고 점잖던 벤자민이 눈썹을 잔뜩 끌어 내리며 서운한 내색을 감추지 않아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열 명의 학생을 모두 호명한 뒤, 직원이 학생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명단을 부르고 제비를 정리했다.
아까 애원하던 선배 놈은 결국 이름을 불리지 못하였는지 거의 혼절할 듯한 기세로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이상 열 명의 학생이 윌턴 로버츠 교수님의 실전 비도술 수업을 듣게 됩니다. 친구와 함께 수업을 듣고 싶다거나 기타 이유로 지금 포기하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어어⋯. 저요.”
그 선배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덜 절실한 동기 하나가 손을 들어 제 권리를 포기했다.
학사과 직원은 매정한 태도로 그러세요. 하더니 새로 제비를 하나 더 뽑았다.
이번에도 그 선배의 이름이 아니었다.
수강 신청에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리가 남는 수업의 목록을 받기 위해 이동했다.
나도 벤자민을 따라 그쪽으로 걸어가 구경했다. 학사과 직원들이 목요일 오후에 들을 수 있는 수업 목록을 전달해 주었는데, 수예와 편물 수업이 꽤 인상 깊었다.
장난삼아 벤자민에게 슬쩍 권해 보았다가 볼멘소리를 듣고 사과했다.
결국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비도술 수업 대신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수상한 이름의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해당 강의의 강의 계획서가 무척 단순하고 간단했기 때문에, 수업을 듣고 난 뒤 감상을 전해 달라 부탁했다.
비도술 수업을 혼자 듣게 되었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곁에 사람을 끼고 다닌 것은 시어런에 오고 나서의 일이었다.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전제자를 키운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혼자 다니는 일에 익숙한 것은 당연했다.
그저 고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지가 참으로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