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79화 (79/176)

79.

기숙사 식당에서 쉐이든을 만나고 나서야 오늘 하려던 것이 생각이 났다.

멀찍이서부터 나를 발견한 소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붉고 보드레한 머리를 휘날리며 걸어 온 쉐이든은 식판을 내 맞은편 자리에 내려놓으며 인사를 건넸다.

푹 쉰 덕분인지 웃는 낯이 반들반들했다.

“오늘 왔어? 물놀이했다더니, 하나도 안 타서 왔네. 오랜만이야, 미카.”

“그래, 오랜만이다. 오늘 하루 종일 어디에 있었어?”

“경영부 쪽에 놀러 갔다 왔어. 어쩌다 그쪽이랑 친해졌거든. 나중에 소개해 줄게.”

“음. 시간표는?”

“너 기다렸지. 밥 먹고 들어가서 보자.”

거진 두 달 만에 보는 것인데도 바로 어제 본 것인 양 자연스럽고 편안하여 마음이 놓였다.

식사하며 듣는 이야기는 편지에서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달의 방학 기간 중 대부분을 꼬박 이런저런 연회와 소모임에 참석하여 보냈다기에 피곤하지 않았느냐 물었더니, 좋은 동무를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오히려 즐거웠단 대답이 돌아왔다.

“아카데미 수업을 듣는 도중에는 아무래도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배우는 수업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되잖아.”

“그렇지.”

“하지만 데뷔탕트 이후로 있는 모든 파티와 티타임은 사교 그 자체가 목적인 모임이다보니까, 모두가 서로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잖아. 난 그게 참 좋더라고.”

“⋯좋은 모습을 꾸며내는 게?”

“나의 좋은 모습에 집중하는 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좋고 멋진 행동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아주 여러 번 반복해서 몸에 익숙하게 만들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음.”

타인의 시선 아래에서 좋은 모습을 반복해서 연습할 수 있는 기간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아 깊게 새겼다.

쉐이든은 그 말을 끝으로 내게는 낯설기만 한 데뷔탕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세르벨 남매에 대한 이야기와 안부를 전하자, 쉐이든은 은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음에 인사하마 가벼운 대꾸를 했다.

익숙하게 쉐이든의 기숙사 방으로 들어섰다.

응접실에 마주 앉아 쉐이든이 늘어놓은 여러 강의 자료들을 함께 살폈다.

듣고 싶은 수업이야 많았지만 서로 강의 시간이 겹치는 수업이 많았다.

그런 것들은 우선순위를 정하여 표시해두고 한켠에 몰아두어 어느 것이 더 좋을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도 마엘로 샌슨 교수의 수업은 어느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도 마엘로 샌슨은 월수금에는 초급 검술을, 화목에는 고급 검술 강의를 열었다. 한눈에 보기 편하도록 정리해 둔 시간표의 빈칸에 해당 강의를 적어 넣으니 쉐이든이 어휴,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웬 한숨이냐?”

“아니, 검술부 학생이니 검술 수업을 듣는 것이 맞긴 한데⋯. 좀 과하지 않아?”

“무엇이?”

“아아니, 고급 검술 수업이야 특별 수업이니 추가 학점 인정이 되지만, 초급 검술 수업은 아니잖아. 같은 과목을 여러 번 수강해 봤자 졸업할 땐 가장 높은 성적만 인정이 되는걸. 우리 둘 다 지난 학기 성적이 좋았는데 굳이⋯?”

“하지만 마엘로 샌슨 교수님이 가르쳐 주시잖아.”

“⋯그건 그렇지.”

그의 시간표에도 초급 검술 강의가 그대로 적혔다.

내가 골라 둔 수업 중에서 골몰하는 것을 보고 쉐이든이 세드릭 교수의 강의 계획서 두 개를 뽑아 앞에 내려놓았다.

“이건 수요일 오후부터 목요일 오전까지, 이건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수업 내용은 같다는데⋯ 어떤 게 더 좋겠어? 샌슨 교수님께 미리 문의드리면 목요일 고급 검술 수업은 뺄 수도 있을 거야.”

“금토가 낫겠다. 공부는 일요일에 몰아 하면 어떤 식으로든 채울 수 있을 테지.”

“으응. 이번 학기 주말을 포기할 생각이구나⋯. 그래⋯.”

“같은 조도 아닌데 나와 시간표를 맞추려고?”

“뭐, 야영 수업이니까. 싫어?”

“아니. 고맙다.”

어디든 일박 이일로 야영을 다녀오고 나면 그 뒷정리에도 시간이 들 터이니, 평일 수업을 포기하는 것보다 노는 날을 줄이는 것이 더욱 옳게 여겨졌다.

일단 금요일 오후에 연금술과 함께하는 수렵과 야영 수업을 채워 넣은 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의 강의 계획서들을 늘어놓았다.

이번 학기에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는 세 개의 강의를 진행했다. 월수금에 수업이 있는 것을 보고 찬찬히 고민하다가 화요일 오후 시간에 그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쉐이든이 곧장 물었다.

“그건 무슨 수업이야? 화요일에는 머스탱 교수님 수업이 없잖아.”

“내 오러가 특이하여 주에 한 번 머스탱 교수와 시간을 맞춰 골몰해 보기로 미리 이야기를 나눴는데, 자기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반나절 정도는 내어 준다기에. 아마 다른 마법사 몇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시연을 해 보고 하지 않을까.”

“와⋯. 궁금하긴 한데 못 따라가겠다. 네 몸 안에 쌓인 마나를 말하는 거지, 핑크 드래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럼 화요일 오후엔 머스탱 교수님 만나고. 월요일에 나랑 이거 같이 듣자.”

“⋯마법의 장비, 아티팩트?”

일 학기에 내가 마법 수업을 듣는다고 했을 때 가장 놀라 호들갑을 떤 것이 쉐이든 로제 아니었던가. 내가 의아하여 강의 계획서를 살펴보자 쉐이든이 당당하고 차분한 태도로 설명해 주었다.

“네가 일 학기에 들은 건 마나를 끌어다가 마법을 구현하는 수업이었잖아. 이건 아티팩트를 안전히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거라고. 심지어 여기 강의실 위치 보여? 경영부 교실에서 진행하는 수업이야. 비 마법사들에게 아티팩트란 떼어낼 수 없는 생활필수품이니까.”

“마법사들에게는?”

“걔넨 그냥 마법 쓰면 되는 거잖아. 여기 강의 계획서 봐. 합리적인 아티팩트 구매법, 이런 것도 있다니까. 이건 영지를 경영하려면 언젠가 한 번은 꼭 배워야 하는 필수 과목이야.”

“들을게.”

“좋아.”

“담당 교수 위르겐 카이저⋯ 이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글쎄. 그냥 성격 좋은 분이라는 얘기만 들었어. 지난 학기에 친구 하나가 이 교수님 수업을 들었는데 꽤 유용했다고 하더라고.”

벌써 한 학기 시간표가 거의 다 들어찼다. 배우고 싶은 과목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한참을 앓는 소리를 냈더니, 쉐이든이 또 강의 계획서 하나를 들고 와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것도.”

“⋯그래.”

말을 덧댈 필요가 없었다.

칼립스 아그리젠트 교수는 화수목 사흘간 하루에 두 시간씩 제국의 계보 수업을 했다. 나와 쉐이든은 수요일 오후 첫 시간에 칼립스 교수의 수업을 넣었다.

그때, 쉐이든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쉐이든이 문을 열어 주러 간 사이 나머지 강의 계획서들을 꼼꼼히 살폈다.

암기에는 자신 없지만 시어런의 문화에 대한 것도 궁금했고, 지난 학기에 들은 수업이 유용하고 재미있었으니 연금술에 대한 것도 더 배우고 싶었다.

사냥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모 교수의 수업에서는 사냥 트랩과 각종 도구들을 사용하는 법과 더불어 은신법 또한 가르친다 하여 무척 흥미로웠다.

골몰하는 내 앞에 또 한 장의 종이가 내려앉았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기척을 읽어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벤자민 클라우디안, 검은 머리에 금안을 가진 덩치 큰 친구였다. 그와는 지난 학기 내내 함께 다니며 큰 도움을 받았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기에, 나 또한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받았다.

비반 오티프 교수의 명마 예찬론 강의 계획서를 보자, 잊고 있던 벤자민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클라우디안 영식이랑 같이 승마 수업 듣기로 했었다며? 마침 시간도 괜찮은 것 같네. 수요일 오후 두 번째 타임에는 이거 들으면 되겠다.”

“그러마.”

“좋습니다. 저도 마침 그 시간이 빕니다.”

수업 이름이 독특하긴 하지만 강의 계획서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그저 좋은 말을 고르는 법을 배우고 직접 승마를 연습해 보는 시간을 길게 갖는다고 했다.

주에 한 번 타는 말을 수업이 없는 때에도 종종 들여다보며 돌봐 주어야 한다는 경고문을 유심히 읽었다.

이제 나머지 시간을 채우기 위해 한참을 또 머리를 썼다.

쉐이든은 이런저런 교수의 평판을 듣고 와서 같은 과목이라도 어느 교수의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꺼내어 벤자민이 시간표를 채우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람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말은 다섯 배로 늘었다.

한참을 이런저런 교수의 평판과 수업의 유용성 등에 대해서 떠들어대던 우리는 결국 차를 두 잔씩은 더 마신 뒤에야 시간표를 완전히 결정할 수 있었다.

나는 목요일 오후에 벤자민과 함께 윌턴 로버트 교수의 실전 비도술 수업을 듣기로 했다.

쉐이든은 한참을 고민했으나 결국 자신이 비도술에 큰 흥미가 없다는 것을 털어놓고 예술 교양 수업을 듣겠다 선언했다.

그리하여 이번 학기에는 월수금 수업은 쉐이든과 화목 수업은 벤자민과 함께 다니게 되었다. 수요일 오후에 있는 승마 수업은 다 함께 듣게 된 것도 기뻤다.

내가 사람 사귀는 것에 서툰 것을 알고 먼저 챙겨 주는 동무가 있다는 것이 참 흐뭇하였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것이 생겨 쉐이든에게 물었다.

“그런데, 같은 수업을 듣겠다는 사람이 수강 가능 인원보다 많으면 어떻게 되지?”

“뭐, 오십 명 정원 수업에 백 명이 신청하고 그런 거?”

“그래.”

“제비뽑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뭐?”

이렇게 공을 들여 시간표를 짜 두었는데 이걸 다시 짜야 할 수도 있다고.

황망하여 애써 완성한 시간표를 내려다보자 옆에 앉은 벤자민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위로하는 말을 했다.

“그런 일이 거의 없긴 합니다. 일단 수업의 수가 무척 많고, 같은 수업도 주에 몇 번씩 해서 학생들을 분산시키니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제비뽑기 전에 혹시 수업을 포기할 학생들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솎아 내기도 하고.”

“그래도 정 포기하는 학생이 없는 인기 강의거나, 한 번에 소수 인원만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강의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제비뽑기를 하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해 둬.”

“먼저 신청하고 나중에 신청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느냐?”

“뭐, 예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수강 신청 기간마다 학사과 앞에서 새벽부터 진을 치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진 않았나 봐. 그냥 전부 운에 맡기기로 했대.”

그 말대로 새벽같이 찾아가 자리를 지키고 있을 생각이던 나는 뜨끔하여 입을 닫았다.

쉐이든과 벤자민이 번갈아 별문제 없을 것이라며 내 어깨를 도닥여 주어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목요일부터 일차로 강의 신청서를 받고, 금요일에 시간표 조정을 하고, 토요일에 이차로 신청서를 받은 뒤 월요일에 발표가 난다고 했다.

다음 날 다시 볼 것을 약속하며 두 아이와 헤어지고서도 기묘한 술렁임으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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