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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78화 (78/176)

78.

시어런 아카데미 정문 앞에 도착한 것은 칠월 마지막 주 수요일 정오가 지나서였다.

이미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야시장이 열리는 날처럼 정문 앞이 북적거렸다.

마차에 잔뜩 실어두었던 짐을 짐 보관소에 맡긴 뒤, 이번에도 벤터스 경은 포권으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이번에는 나 또한 머쓱해하지 않으며 포권을 돌려줄 수 있었다.

세르벨 남매와 학기 중에 다시 만나 식사할 것을 약속한 뒤 헤어졌다.

먼저 아카데미에 도착해 있을 쉐이든 로제를 찾아 나섰다.

교과목이 워낙 많은 탓에 개학 직전에도 수업 요일과 담당 교수가 변동되는 일이 잦다고 하여, 일찍이 약속한 대로 학기 시작 전에 시간표를 마지막으로 맞춰 보기 위해서였다.

허나 기껏 찾아간 쉐이든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학이 시작될 때, 칠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는 아카데미로 돌아오겠다고 말한 쉐이든이었다. 아카데미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 분명한데 영 찾을 수가 없었다.

수업을 들을 때에는 지금 시간이면 어디에 있겠거니 가늠하기가 쉬웠으나 수업을 듣지 않으니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몰라 괜히 아카데미 교정을 떠돌았다.

그러는 동안 익숙한 얼굴들을 참 많이 만났다.

깐 달걀처럼 반들반들한 얼굴을 한 아해들이 여기저기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거나 친근하게 어깨를 쓰다듬고 가거나 했다.

그중 몇의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나를 알고 있으니 나도 아는 놈이겠거니 생각하여 마주 인사하고 넘겼다.

도서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 찰나에 익숙한 보랏빛 머리칼이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미카엘! 방학 잘 보냈어요? 왜 이제 와요?”

“오랜만입니다, 마리앤. 잘 지냈어요?”

“아, 그럼요. 걱정해 준 덕분에 잘 놀고 잘 쉬고 왔어요.”

내가 받아 본 편지에는 그녀가 무척 기운이 없다 했는데,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자니 빈말이었나 싶었다. 씩씩하고 활달한 어투의 소녀는 방학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친밀한 사이에 흔히 그러하듯이, 마리앤은 함께 하겠다는 말 없이 내 어깨 옆에 나란히 서서 걸으며 제 하고픈 말을 떠들어댔다.

“아카데미 오자마자 도서관부터 온 거예요? 진짜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쉐이든을 좀 찾고 있었습니다. 혹시 아직 안 왔습니까?”

“어어. 오늘 점심에도 봤어요. 어디 간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같이 찾아 줄까요?”

“음⋯. 굳이?”

“이런 때엔 예, 도와주세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예. 도와주세요.”

“좋아요!”

빤히 길을 알고 있는 아카데미 내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거절했으나, 나와 함께 걸으며 떠들어 대고 싶은 마리앤의 마음을 뒤늦게 알아차려 순순히 아해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평소보다 마리앤의 보폭이 넓고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니 기분이 퍽 좋은 모양이라, 나 또한 괜히 웃음이 나왔다.

“뭐 좋은 일 있었나 봅니다.”

“예에⋯.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고?”

“편지에 쓰였던 내용에 대한 겁니까?”

사랑 어쩌고 하는 말이 언뜻 생각이 났다.

편지에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었기에 그녀의 기분이 이렇게 달떠 있는 것이 정인을 찾았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전생에 제갈 아무개가 모용연화를 대할 때마다 무척 멍청하게 굴던 것이 떠올랐다.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싶었다.

과연 예상한 것이 맞아떨어진 모양으로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마리앤이 조개처럼 입을 딱 닫고 말을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묵묵히 걷는 마리앤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벌써 청혼이라도 했어요?”

“그럴 리가!”

빼액 소리를 내지른 마리앤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웅얼거렸다.

“그냥⋯ 그냥 서로 알아 가기로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리앤의 얼굴에서 어찌나 빛이 나는지 순간 눈이 부셨다. 녀석은 흰 진주라도 꿀떡 삼킨 사람처럼 뽀얀 뺨을 붉히며 사르르 웃었다.

나 또한 여러 해를 살면서 소중히 아낀 이들이 많았으나, 누군가를 연모하는 감정은 이 나이를 먹도록 느껴 보지 못했다.

곰곰 따져 보면 내가 너무 어린 시절부터 검을 수련하는 데에 맛을 들인 까닭인가 싶었다.

검을 쥔 나이 다섯 이후로 다른 생각이라곤 머릿속에 넣을 겨를이 없었다.

내장을 토해낼 듯 달리고 숨넘어갈 듯 운기하며 기운을 쪽 빼고 나면 들끓던 소년기에도 뜨끈한 물에 씻고 자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말을 참 잘 듣는 아이였다. 한눈팔지 말고 검만 수련하라기에 그렇게 살았다.

그랬더니 방계들 중에서도 싹이 보인다 하여 당숙들의 눈에 들었다.

얼결에 무림맹까지 가 허울뿐이더라도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때 용봉지회에서 마주했던 많은 이들 중에는 또래의 여협도 많았으나, 나처럼 얌전하고 말 걸 줄 모르는 사내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좋은 이들이라 부러 멀리하기도 했다.

묵묵히 수련하는 것에 익숙하고 향락을 멀리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불혹이 되어 친구들이 자식들 재롱을 자랑하는 데에 끌려갈 때는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중원에서 가문의 대를 필히 이어야 하는 직계손들은 여덟 살 열 살에도 혼례를 올리는 것을 생각하면 늦되어도 그렇게 늦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는 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둔 탓에 내 힘으로 가족을 지키는 일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나이 다 먹어 주책을 부리는 것이 민망하여 관심 없는 척 모르는 척 외면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딱 어여쁠 나이에 빛나는 마음을 품고 수줍은 낯으로 배시시 웃는 마리앤을 앞에 두고 있자니 흐뭇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괜히 멋쩍고 간지러웠다.

지난 생에 제갈 아무개가 야단법석을 떠는 것을 한심하게 보던 것과는 퍽 다른 감상이었다.

제갈 놈이 마리앤처럼 간지럽게 웃는 대신에 내 허리춤을 붙잡고 질질 짜서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알아 가기로만?”

“아,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요! 웃지 마요!”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단숨에 마음을 빼앗겼답니까?”

파드득 어깨를 떨 때마다 교복 깃이 뒤집히는 모습을 웃으며 보았다.

흰 뺨을 발갛게 붉힌 마리앤은 양손으로 제 뺨을 감싸 쥐었다. 본인도 제 얼굴에 열 올라 벌게진 것을 아는 모양이지.

그저 가만히 보고 있으니 혼자 발을 구르고 혼자 어깨를 들썩이고, 또 고개를 내젓다가 시선을 아래로 뚜욱 떨어트려 웅얼거리는 모양새가 재미있었다.

“⋯경영부에, 글로틴 테너 영식이라고⋯ 혹시 알아요?”

“글쎄요.”

“놀리지 말구요!”

“아니, 저는 그 이름을 몰라도 그쪽은 저를 알 것 같아서 한 말이었습니다. 놀린 건 아니에요. 어찌 되었건, 그래서요?”

그리고 마리앤은 내가 캐물어 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인지 상담인지 아니면 어디 저잣거리에 나도는 연정 소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말들을 와락 쏟아놓았다.

평소 그녀의 목소리도 높은 편이었으나, 웃음과 수줍음이 한껏 담긴 목소리는 꾀꼬리 소리처럼 들렸다.

찬찬히 정원을 거닐며 아해의 자랑을 들어 주었다.

마리앤은 일전에 집안의 재정 사정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유난히 에드윈 키아드리스를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던 데에는 그가 휘두르는 금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번 데뷔탕트에서도 자주 입지 않을 드레스에 돈을 많이 쓸 수 없어 제 언니의 드레스를 고쳐 입고 나갔다고 했다.

그녀가 언니보다 키가 작아 치마 밑단이 끌리는 것을 시침 핀으로 고정하고 프릴을 덧대어 숨긴다고 숨겼는데 절로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괜히 있잖아요, 남들은 다 아무 생각 안 하는데 나 혼자 민망하고 부끄러운 거. 작년에 언니랑 같이 춤을 췄던 남자들이야 언니 드레스를 알겠지만, 사실 그게 뭐가 문제겠어요? 근데, 아는데도 그래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못 견딜 것 같은 때가 있는 거예요.”

“음.”

“그래서 빤히 넓은 길을 놔두고 그늘진 곳으로 다녔어요. 괜히 서럽고, 괜히 이 세상에 혼자인 것 같고. 이 마리앤 필로덴도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요. 그러니까, 그것부터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그런 작용이 있었나 봐요.”

“아하.”

“도저히 못 참겠어서 정원에서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하고 테라스 쪽으로 딱 돌아서는데, 걔가 거기 있었어요. 세상에 햇살이란 햇살은 온몸으로 다 받으면서, 반만 문이 열린 테라스 안쪽 소파에 앉아서 저 먼 곳을 보고 있는데. 귓바퀴에 솜털이 보석처럼 빛이 나는 거예요.”

“어허⋯.”

“그러다가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아, 진짜.”

나는 마리앤이 그대로 숨이 꼴딱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펴보았다. 소녀는 겨우겨우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뒷말을 조심조심 내었다.

“⋯절 보고 살짝 커지는 눈이 너무, 너무, 너무⋯ 예쁘더라구요.”

⋯결국 사내놈의 미끈한 얼굴을 보고 그대로 넘어갔다는 말인가.

절로 탄식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마리앤이 꿈꾸는 듯한 표정을 하고 울먹였다.

도대체 그녀의 머릿속에 앉은 놈이 어떤 여우 같은 놈인지 방금의 설명으로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내 떨떠름한 기색을 눈치챈 마리앤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물론 미카엘도 예쁘지만. 결이 다르다구요. 진짜 막 눈앞에 데려와서 보여 주고 싶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데, 책 많이 읽을 것처럼 생긴. 안경 완전 잘 어울리는. 정말 제 꿈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사람이라구요.”

“예에⋯ 알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네?”

“눈이 마주친 다음에요. 뭔가 더 얘기를 하긴 했습니까?”

“물론이죠!”

마리앤은 보석 같은 눈과 가느다란 손가락, 미성의 목소리 따위에 대해 또 한참을 이야기했다.

연신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것을 듣고 있자니 부러웠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마냥 우스워 픽픽 웃음을 흘리게 되었다.

내가 웃을 적마다 내 팔뚝을 매섭게 내리치는 손이 야무졌지만, 그 정도로 아파할 나도 아니었기에 그대로 두었다.

그래, 냅다 우는 소리를 내며 그녀는 저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느니 더 이상 자신은 살 가치가 없다느니 하며 땅바닥을 구르던 제갈 아무개보다야 천번 만번 나았다.

자리 양보를 거절한 마리앤이 소년의 옆자리에 앉아 수줍게 첫인사를 나누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듣는 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아 먼저 들어가 보겠다기에 기쁜 마음으로 인사했다.

그러고 나니 혼이 쏙 빠져 내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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