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안내받은 공터는 그리 넓지 않아 달리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낯선 땅에서 일행과 멀리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기에 손바닥만 한 공터를 달리는 대신에 몸에 열을 내기 위하여 검을 빼 들었다.
이번에도 삼재였다. 자세를 바로 하고 검을 아래로 내리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호수에서 얻은 약간의 깨달음을 정리하고 싶었으나,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 검식을 가다듬기엔 저어한 마음이 들었다.
여즉 내가 중원의 습관을 다 떨쳐내지 못하여 내 검식과 검로를 지나치게 아끼어 외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나이를 몇이나 먹어야 내 것이다 옹졸하게 구는 것을 멈출 수 있을지 아득하였다.
내공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둑하던 사위가 밝아질 즈음해서는 온몸이 땀에 젖었다. 숨이 차 어깨가 시근거렸다.
마지막 일검을 찔러낸 뒤 검을 거두자 지켜보고 있던 이들 중 몇이 박수를 쳐 주었다.
아까 홀에서 고기 스튜를 먹던 이들이었다.
“와, 어떻게 한 번을 흔들리지 않네. 몇 살이에요?”
“⋯열셋입니다.”
“아카데미 학생?”
“예.”
구경 온 치들은 총 세 명이었는데, 남자 무인 둘과 여자 무인 하나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그중 한 치가 지나치게 쾌활하게 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사람들에게는 같은 문파의 사람이라는 믿음이 있어 손과 품을 내어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완전한 타인에게 함부로 맥문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내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앗차, 소란스럽게 반성하는 체를 한 무인이 손을 거뒀다.
“우리는 붉은 사자 용병단이고, 제 이름은 크렘이라고 해요. 이상한 사람은 아니고, 오랜만에 멋진 기사님을 봐서 안면이나 익힐까 해서.”
“예.”
“⋯그으, 성함을 여쭤보아도 될까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들의 기운을 살폈다.
일 층에서 마주한 이들 중 이류무인은 전부 나온 것인지, 셋 모두 안광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금의 내 실력이라면 셋이 한 번에 덤벼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나 어린 몸이 신경 쓰여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미카엘 에른하르트.”
“아하, 에른하르트 공자님이시구나!”
“미리 알고 온 것 아닙니까?”
무어라 또 말을 걸려던 여인이 입을 닫았다.
나는 이제 내 머리 색이 얼마나 눈에 띄는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 나와 함께 온 기사들의 갑옷 가슴팍에는 에른하르트를 뜻하는 목련꽃이 소담하게 새겨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성인인 일행과 함께 있을 적에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다가, 굳이 나 홀로 훈련하는 시간을 지켜보며 기다렸다는 것은 나름의 꿍꿍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여 호감이 일지 않았다.
그들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기에 고개만 까닥하여 예의를 차리고 자리를 떴다.
일행과 함께 어울려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기사들이 입을 모아 참 알맞은 대응이었다며 어린아이 대하듯 칭찬하는 것이 멋쩍었다.
잠시간 들어주다가 나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일개 용병단이 내게 접근할 만한 이유가 뭐가 있을까?”
“글쎄, 아무래도 인맥 형성 아니겠습니까?”
“인맥? 그저 길 가다가 얼굴 한 번 본 사이에?”
“우리 큰 도련님이 이렇게 똑 부러지는 소년이란 걸 모르니까 그랬겠죠. 대개 검을 쓰는 소년들이란 기사단이나 용병단을 좋아하고 추앙하기 마련이니까요.”
“맞습니다. 괜히 검술 시연이나 대련을 도와주기도 하고 자기들 모험 이야기를 떠들면서 어린 귀족들의 호감을 사서 다음 일을 따내려는 호위 용병단은 꽤 흔한 편입니다.”
“음.”
“우리 도련님이야 어려서부터 기사가 될 생각만 하셨지만요.”
어쩐지 뿌듯한 얼굴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이 땅의 모든 검 쓰는 이들이 기사인 줄로 알던 때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좋고 멋져 보여서 기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세르벨 남매가 저들도 용병단이랑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며 궁금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기사들은 저마다 겪은 용병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앞다투어 언성을 높였으나, 결국 벤터스 경이 또다시 설명을 도맡게 되었다.
“보통 용병단은 세 부류로 나뉩니다. 귀족이나 상단을 호위해주는 부류가 첫째고, 몬스터를 잡아 그 부산물을 판매하는 부류가 둘째, 그리고 영지전에 참여하여 배상금을 나눠 받는 부류가 셋째죠.”
“영지전?”
“물론 시어런 제국에서는 영지전을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어중이떠중이를 끌어모아 봤자 제대로 키워낸 기사보다는 못하죠. 내부 정쟁이 거친 오웬에서나 볼 수 있을 겁니다.”
잠시 놀랐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웬이라면 다섯 왕국 중에서도 가장 상단에 위치한 먼 왕국이었다. 제국의 수도에서는 한 달은 말을 타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니 당장 그곳의 싸움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붉은 사자니, 푸른 매니 하는 이름은 흔합니다. 아마 오늘 도련님에게 다가온 용병단도 귀족가 영식이나 영애를 호위하는 일을 도맡는 용병단일 거예요. 보통 귀족가 자제들에게는 기사들이 따라붙어서 안전하지만, 용병들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그건 무인이 아니라 이야기꾼 아닌가?”
“뭐, 어쨌든 호위 인원이 늘어서 나쁠 것도 없고⋯ 기사들보다 많이 떠돌아다니는 만큼 지름길을 안내해 주는 일도 종종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저야 겪어 본 적이 없지만요.”
“역시 호위 용병보다는 사냥 용병이 진짜 용병이죠. 그중에서도 흰 사자 용병단이 유명합니다.”
“혹시 붉은 사자 용병단과⋯?”
“아무 관련 없을 겁니다. 애초에 사자는 용병단 이름으로 아주 흔하다니까요.”
오전에 보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스물 후반에서 서른 즈음은 되어 보이던 그들은 모두 이류 무인이었다.
수련에 힘을 쏟지 않고 그렇게 소일거리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낸다면 일류의 위에 오르지 못한 채로 그 힘이 다할 터였다.
물론 입에 풀칠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영지의 기사가 되기 위하여 훈련해 왔기 때문에 먼 땅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기사들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용병에 대해 과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나 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정돈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수염을 기르지 않는 반면에, 용병들 중에는 수염과 가슴털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도 들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던 사실이었다. 내 표정이 어떤지 스스로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일라 세르벨이 깔깔 웃으며 로건 세르벨의 등을 두드려대는 것을 보아 짐작할 만했다.
기사들이 웃음을 참으며 저들은 꼬박꼬박 면도를 한다 자랑하기에 군말을 덧대지 않았다.
* * *
아카데미로 가는 길은 내내 평온했다. 수도와 세르벨 영지 사이에는 높은 산도 없었고 너른 강도 없었다. 낮 동안 느긋하게 승마를 하고 매일 저녁 괜찮은 숙소에서 묵었다.
일행 중 죽는소리를 하는 것은 세르벨 남매 정도였다.
남매는 나흘째에 허리가 아파 못 참겠다며 마차에 드러누웠고 닷새째 되는 날에는 하루만 쉬어가자 우는 소리를 내며 팔목을 붙잡았다.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체력이 좋지 않아 걱정이었다.
비교적 일찍 출발한 덕분에 학기가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충분했다.
우는 소리 내는 것들을 죄인 다루듯 마차에 실어 끌고 갈 필요가 없기에 미리 정해둔 숙소를 하루 더 연장하고 짐을 풀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다 같이 자리에 둘러앉은 자리에서 세르벨 남매는 허연 얼굴을 하고 숟가락을 쥐는 둥 마는 둥 하여 식사를 대충 했다.
말에 타고 거닐 때에는 겨우 하루 여덟 시간의 승마로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당긴다 잉잉거리더니, 마차에서 내린 뒤 누워도 땅이 흔들려 멀미가 난다고 헛구역질을 해댄 둘이었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식사를 잘해야 기운이 나지.”
“아직도 땅이 흔들린단 말이야⋯. 보통은 이렇게 서둘러서 오지 않는다고.”
“서둘렀다고?”
나는 의아하여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에른하르트 가의 기사들이야 나와 같이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세르벨 가 기사들은 웃는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엔 도련님과 아가씨가 무리하기도 했습니다. 괜히 에른하르트 영식을 따라하겠다고 하루 종일 말을 타실 때부터 조마조마했어요.”
“세르벨 가에서는 아카데미로 이동할 때 두 분 다 보통 마차를 타고 이동하시고, 중간에도 두세 번 정도 바람을 쐬거나 거닐면서 몸을 풀어 주는 시간을 갖거든요. 수도로 가는 길에 쉬어 갈 마을이야 많으니까 이동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 편입니다.”
“애초에, 로건 도련님께서는 세 시간 이상 승마를 하는 일이 이번이 처음인걸요.”
무림인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육체를 한계까지 사용하는 데 익숙한 족속이었다.
중원에서의 나는 악적을 쫓을 일이 있으면 사흘 밤낮을 자지 않고 내 두 발을 사용하여 내달리고는 했다.
경공을 사용하면 말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기도 했고, 그렇게 큰 짐승을 끌고 적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시어런에 태어나서는 아이답게 행동하기 위하여 밤이면 꼬박 잠에 들고, 팔다리가 뻐근하면 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몸을 다스리기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인 시어런의 사람들보다 고통의 역치가 매우 높았다.
두 발로 달리는 것보다 말을 달리는 것이 편안했기에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 저택을 떠날 때부터 나는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에른하르트 가의 벤터스 경이 이번 일정을 계획하고 일행을 이끄는 역을 맡았다.
그의 기준이 내게 맞춰져 있었기에 지난 아카데미 입학식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정을 짠 것이 문제라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별장에서 승마를 즐길 적에야 하루 한 시간 이상을 내달린 적이 없었다.
그때엔 그저 가볍게 즐기기 위해 그런 줄로만 알았지, 남매의 체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줄은 몰랐다.
까닭을 알고 나니 멋쩍고 미안해져 세르벨 남매에게 사과했다.
로건은 염소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꾸했으나, 레일라는 나를 노려보며 저주의 말을 웅얼거렸다.
장난치는 것을 알아 피식 웃어넘기고 그 앞에 음식 접시나 밀어 주었다.
대강 식사를 마치고 세르벨 남매를 방에 올려 보낸 뒤, 남는 시간에 할 일이 없었다.
세르벨 가 기사들은 호위 임무를 놓을 수 없으니 남매의 옆방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도록 두고, 나와 에른하르트 가의 두 기사는 소화도 시킬 겸 간단히 대련을 즐겼다.
하루를 꼬박 쉰 뒤 세르벨 남매가 정신을 차렸기에 다시 길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