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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76화 (76/176)

76.

시어런 아카데미로 떠나는 인원은 나와 세르벨 남매, 그리고 기사 넷, 마부 하나까지 다 해서 여덟이었다.

출발이 늦어진 만큼 속도를 내기 위하여 마부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각기 자신의 말에 올라타 길을 재촉했다.

빈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여 귀가 시끄러웠다.

미하엘이 어찌나 울며 떼를 썼던지 아직도 가슴팍이 얼얼하여 쉬이 웃는 낯을 꾸며내기가 어려웠다.

그런 나와 달리 에른하르트 가와 세르벨 가에서 각각 둘씩 각출한 기사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는 낯이었다.

세르벨 가 별장으로 향할 적에도 기사들을 인솔한 적 있었던 벤터스 경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말을 달리다가, 그 낯에 근엄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낼 수가 없는 모습이 신경 쓰여 결국 말을 꺼냈다.

“뭐가 그렇게 즐겁나?”

“안 좋을 일도 없지요. 큰 도련님 덕분에 올해 두 차례나 수도에 가는 길이잖습니까. 이런 일이라도 없으면 영지에서 나올 일이 없지요. 에른하르트 영지는 평화롭고 좋은 곳이긴 하지만, 젊은 기사들에게 매력적인 영지는 아니어서요.”

“예에? 벤터스 경이 젊은 기사는 아니잖습니까.”

“무슨 소리야. 마음만은 아직 청춘이라고.”

“음.”

옆에서 함께 말을 달리던 기사 하나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이안 벤터스 경은 마흔세 살의 사내였으나 워낙에 쾌활한 성정과 젊은 외형 탓에 서른 초입 취급을 받고 있었다.

중원에서 내 숨이 끊어졌을 적에 딱 저 정도 연배였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가 젊은 사내로 보였다.

중원에서나 시어런에서나 무인의 나이란 얼굴만 보고 알아채기 어려웠다.

마나는 중단전을 통로로 삼아 흘러 들어왔다가 고스란히 흩어지는 힘이기에 마법사들은 타고난 체질대로 나이를 먹었지만, 오러는 몸 안으로 들어와 근육과 세맥에 고스란히 스며 잔류했다.

덕분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나이보다 젊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또래 기사와 친근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벤터스 경이 다시 설명했다.

“어쨌든 검을 차고 있으면 소속되지 않은 영지로 들어갈 때 내야 하는 서류가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나올 일이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에른하르트 소백작가는 여름휴가도 잘 안 나왔었으니 더 신날 수밖에요.”

나는 지금껏 영지와 영지 사이를 오가는 이들에 대해서 신경 써 본 일이 없었다.

중원에서 모든 땅의 주인은 황제였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들끓는 산적을 겁내지 않을 무력을 갖춘 수많은 이들이 너른 중원 땅을 아무렇지 않게 오갔다.

반면 시어런에서는 모든 영지민이 영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영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여러 서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확인서, 현재 재산 상황이 어떠한지에 대한 내역서, 어떤 목적으로 이동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허가서⋯.

내가 스스로 처리해 본 적이 없어 모르던 것들이었다.

중원에서도 이런 절차가 있었던가? 하루살이처럼 태어나고 사라지던 민초들을 떠올려 보지만, 지금 와서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차례 왁자하게 웃은 기사들과 영지민의 이동과 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세르벨 가문의 두 남매가 말을 가까이 움직여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대부분의 사업 승계가 혈연으로 이뤄지는 이유이기도 하지.”

“사업이라면?”

“그런 거 있잖아. 맥페란 상단이니 엘도스 상단이니 하는 대형 상단들부터 시작해서 소형 상단들도 전부 사업주의 성씨를 앞세우고 있는 거. 저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일을 해 왔으니 문제없이 물건만 사고팔고 가겠습니다, 하면 아무래도 허가 절차가 간소화되니까.”

“물론 작명이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맞아. ‘밝게 빛나리’ 같은 건 만들어졌을 시대에는 참신한 이름이라고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우스운 취급을 받고 있거든.”

“⋯뭡니까, 그건. 조명 장치를 파는 상단입니까?”

“아니. 아카데미 입학시험 참고서 파는 상단이야. 처음 아카데미가 만들어졌을 때에는 신학자들의 말을 위엄 있는 척 인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대. 이 책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의 미래가 모두 밝게 빛날 것이라는 예언이라나.”

“어, 요즘에도 그거 씁니까? 저도 그걸로 공부했었는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레일라 세르벨의 설명에 기사들이 너도나도 말을 얹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막대한 입학금을 내는 대신에 입학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른하르트 가의 추천서와 정해진 금액의 입학금, 그리고 조기 입학 사정관과의 일대일 면접에서 간단한 무술 시범을 보인 일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대개 기사들이란 종자 시절부터 귀족 가문에 복속되는 만큼 아카데미 졸업자들과 마주하는 일이 많아, 한 번씩은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도전해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경쟁도 치열해 이 자리에 있는 네 명의 기사 중 합격하여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것은 벤터스 경 하나뿐이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아카데미의 교수진으로 흘러, 마엘로 샌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벤터스 경이 미하엘 앞에서는 굳이 꺼내지 않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샌슨 경은 제가 입학했을 때에도 이미 전설이었습니다. 그때는 교수가 아니라 졸업과 동시에 제국기사단에 특채된 수석 졸업생으로 유명했지만요. 제가 그분보다 한참 후배인데도 수업 시간마다 샌슨처럼만 해라, 그런 소리를 들었다니까요.”

“⋯샌슨 교수님도 아카데미 선배였다고?”

“당연하죠. 그분이 그 해의 신입생 대표였을걸요. 검술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론 시험을 볼 때마다 만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검술 교수법은 샌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 선배 덕분에 검술부 학생들은 좀 무식해도 된다는 기조가 완전히 사라졌지요.”

샌슨 교수와 벤터스 경이 같은 검술 교수에게서 수학했다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마엘로 샌슨 역시 사람이니만큼 태어나면서부터 강했을 리가 없는데도, 화경의 강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전해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안 벤터스는 자신이 열다섯의 나이로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을 때 마엘로 샌슨은 이미 스물네 살의 어엿한 청년으로 제국기사단에 복무하고 있어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소문만은 많이 들었다는 말로 서두를 열었다.

나는 마엘로 샌슨을 늘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기에 이미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마엘로 샌슨은 기상 시간과 수면 시간에는 까다롭게 굴지만 음식은 가리지 않았고, 시답잖은 농담을 좋아하지만 잘하지 못했다.

야영 수업을 담당하는 세드릭 교수와 성격이 잘 맞아 친하게 지낸다.

그러나 지금은 헐렁한 말투와 느긋한 태도로 유명한 그가 어릴 적에는 무척 깐깐하고 엄격하게 구는 학생이었다는 이야기는 무척 의외였다.

신기하여 몇 차례나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고 대답을 졸랐다.

벤터스 경은 샌슨 교수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긴, 샌슨에 대한 이야기뿐일까. 이곳 시어런의 이들은 귀족 연감의 탓인지 서로의 공개된 정보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이 퍽 자연스러웠다.

누구에게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지 않겠냐 물었을 적에, 남들 보기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니냐 되묻던 데미안 크리스토퍼의 얼굴을 문득 떠올렸다.

벤터스 경에게 샌슨 교수의 이야기란, 지금의 내가 웨슬리 키아드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주마다 듣는 것과 흡사한 느낌일 터였다.

나는 웨슬리 키아드리스와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지만, 그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 알았다.

그가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이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었다.

“마엘로 샌슨 경이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게 그가 졸업한 지 오 년이 되던 해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한 해만 더 일찍 입학했어도 샌슨 경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봤을 텐데요. 지금 생각해도 가끔 아쉽습니다.”

“손을? 어떻게?”

“경지에 오르자마자 가르침에 감사드린다면서 그 당시 교수님께 인사하러 왔다고 들었어요. 교수님이 얼마나 뿌듯해하며 자랑하시던지⋯. 샌슨 경이 제국기사단 단장직을 거절하고 아카데미 교수로 온 것도 다 자기 덕분이라며 아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셨지요.”

그들을 가르친 교수 또한 소드 마스터로, 지금은 은퇴하여 좋은 저택을 두고 여생을 즐기고 있다 했다.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는 벤터스 경의 목소리가 아련한 추억을 담아 듣기 좋았다.

중원에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한 몸처럼 여겨지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나의 스승은 손에 꼽히는 수의 제자를 두었다. 아이 하나를 온전한 무인으로 기르려면 십 년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스승의 은원(*은혜와 원한)을 제자가 물려받아 갚았다.

누구의 자식이요, 누구의 제자요 하는 말이 곧 신분 패가 되던 시절이었다.

반면 한 스승이 여러 대의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시어런의 제자들은 스승을 추억에 담고 종종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찾아뵙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벤터스 경 또한 사는 것이 바빠 오래 찾아뵙지 못하였지만, 곧 다시 한번 찾아뵐 생각이라기에 그 어여쁜 마음에 감동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한밤중에는 목표로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금일엔 출발이 늦어 늦은 시간까지 이동했지만 내일부터는 밝을 때에만 움직여도 충분히 적당한 날짜에 아카데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안내하기에 그러려니 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 * *

새벽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잠에서 깼다.

꾸준히 훈련한 몸이라 겨우 하루 말 탄 것으로 피곤하지 않았다.

일행들보다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깬 것이 분명하기에 허리춤에 검을 차고 여관의 일 층으로 내려왔다.

중원의 객잔과 비슷하게 시어런의 여관도 일 층에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넓은 홀을, 위층에는 객실을 두었다.

해가 뜨기 전인데도 사람들이 가득 찬 테이블 몇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수신을 위함이라지만 민가에서 멋대로 검을 빼 들어도 될지 걱정이 되어 바로 공터를 찾는 대신에 빈 테이블 하나를 골라 앉았다.

부르지 않아도 가까이 온 점소이가 곧장 말을 걸었다.

“숙소에 묵으신 분들께는 아침 식사가 무료에요! 고기 스튜 두 종류 중 하나를 고르시면 돼요. 매운 것과 맵지 않은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으세요?”

“음식은 되었고⋯, 혹 근처에 검을 휘둘러도 되는 공터가 있습니까?”

“어⋯, 이 아침부터 대련이라도 하시게요?”

“아닙니다. 그저 혼자서.”

“아아. 그런 거면 여관 왼쪽으로 돌아가시면 마구간 뒤에 빈터가 있긴 해요. 벽이 둘러져 있지는 않은데 괜찮으실까요?”

“예, 감사합니다. 혹시 제 일행이 저를 찾거든 그곳에 있다고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님 네 분이랑 함께 오신 분 맞으시죠?”

“예.”

점소이는 그러겠다며 친절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쪽에서 고기 스튜 그릇을 들고 후루룩 입 안에 쓸어 넣던 갑옷 입은 치들 중 몇이 이쪽을 슬쩍 건너다보기에 나도 살펴보았으나 대부분이 삼류에서 이류 수준의 무인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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