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응접실 테이블에 편지지를 늘어놓은 아스델이 깃펜에 먹을 흠뻑 찍었다.
아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새까만 먹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알았으나, 쫓아다니며 꾸짖는 어른은 없었다.
내게 편지를 보낸 것을 시작으로 글에 흥미를 붙인 아스델은, 근래에 편지를 보낼 곳이 없어 동화책을 필사하는 것으로 글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에반 세르벨이 마음 넓게 자신이 어렸을 적 보았다는 동화책 몇 권을 내 주었다.
동화책에 검게 남는 동그랗고 작은 지문 자국을 신경 쓰는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에반은 의젓한 태도로 자리를 잡고 앉아 아스델이 책장을 넘기는 것을 돕거나, 모르는 단어를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주며 제법 손님 맞는 주인 행색을 했다.
아직 아스델의 연치가 어리지만 에반 정도라면 나이 차도 적으니 짝으로 나쁘지 않겠다, 생각하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미하엘이 내 소매를 꾹꾹 잡아당겨 관심을 끌었다.
“형, 이건 뭐라고 읽으면 돼? 무슨 뜻이야?”
“여기? 영면, 이라고 읽어. 영원한 잠이라는 뜻이지.”
“그다음도 읽어 줘.”
“신들이 영면에 들었다는 말이 곧 신의 죽음을 일컫는 말은 아니다. 또 신이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없다. 현대의 마법사와 신학자들은 과거 신으로 불리었던 많은 것들이 물리 현상의 작용이라고 여기고 있다⋯.”
벌써 미하엘이 신학서를 읽을 나이였던가 싶어 책의 제목을 한번 확인했다.
<아홉 신은 존재하였는가?> 물음표가 유독 크게 적힌 책이 두툼하였다.
미하엘과 아스델보다 앞서 태어난 내가 글과 말을 일찍 뗀 것이 아이들에게 부담이 되었나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 더 읽어 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칭얼거리는 미하엘의 머리를 쓸어 주며 잠시 고민하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의 나는 미하엘이 더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을 기꺼이 여기고, 아스델이 더 얌전히 걷는 것을 기꺼이 여겨 크게 칭찬하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어린아이들이 아이답게 행세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하엘. 네가 보기에⋯ 이 책이 재미있니?”
“어?”
내 허벅다리에 올라앉으려고 달라붙던 미하엘이 의아한 기색으로 멈칫했다.
난 정말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물은 것이었는데, 갑자기 의젓한 표정을 하고 책에 손을 짚은 미하엘이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그럼. 이 세상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늘 궁금한걸.”
“작은오빠는 매일 신학서만 봐.”
“그래?”
저쪽에서 편지지에 글자를 옮겨 적던 아스델이 낭랑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늘 옆에서 재잘거리는 미하엘 덕분인지, 아니면 그저 영리하게 태어난 덕분인지 또래보다 말을 빠르게 배운 아스델이었다. 그 말투가 야무지고 당돌했다.
“큰오빠는 매일매일 기사님이 나오는 동화책만 봤다고 그랬잖아. 작은오빠는 매일 신이랑 요정이 나오는 책만 봐. 잠들고 싸우고 도망가고 슬퍼하는 거.”
“그럼 아스델 너는 어떤데?”
“난⋯ 드래곤 나오는 거.”
문득 새로 사귄 동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벤자민 클라우디안이 가지고 있다던 귀한 책을 빌려 올 생각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면 되었다.
미하엘을 품에 안고 다시 책을 펼친 순간이었다.
“작은오빠 응석 너무 들어주지 마. 작은오빠도 다 컸어.”
“뭐어?”
“일곱 살이나 됐으면서 큰오빠 앞에서만 혀엉, 형아아. 이러잖아. 내 앞에서는 엄청 오빠인 척하는데.”
아스델이 놀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자 이익, 하고 미하엘이 분한 소리를 참았다.
내게는 정수리와 귀만 보였으나 그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표정 또한 알 만했다.
고개를 드니 에반이 웃음을 참기 위해 제 팔꿈치에 고개를 묻은 것이 먼저 보였다.
새침한 표정의 아스델이 다시금 깃펜에 먹을 흠뻑 묻혔다.
사각사각 쓰는 글씨의 모양새가 삐뚤빼뚤하였으나 몇 달 전에 비해서 확연히 글씨의 태를 하고 있었다.
저 혼자만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분해서 열심히 연습했다던 아이의 말을 새삼 떠올렸다.
아스델이 갓 태어난 날, 미하엘을 품에 안고 함께 아스델을 보러 갔던 기억이 여즉 선명했다.
내가 아스델보다 미하엘을 끼고 산 것은 아스델이 여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생을 얻게 된 미하엘이 친족의 사랑을 잃을까 봐 무척 불안해하며 투정을 부린 탓이었다.
내가 미하엘을 돌보는 동안 양친의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아스델이었다.
아이가 이렇게 야무지게 이야기하는 것을 처음 들은 나는 마냥 놀랍고 기꺼워 소리 내어 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잠시만 눈을 떼면 비 온 뒤 죽순처럼 훌쩍 커서 깜짝 놀랄 일을 벌이곤 하였다.
“그래도 미하엘이 오빠 노릇을 하긴 하는구나.”
“내가 작은오빠랑 놀아주는 거야.”
“아니야! 아스델 말 믿지 마. 너 자꾸 그러면⋯.”
“안 놀아 줄 거야? 그럼 난 에반 오빠랑 놀 건데.”
아이들이 투닥이는 것을 말리는 대신에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아스델 덕분에 미하엘이 이 책을 두 번째 읽는 것이며, 괜히 다 알면서 응석을 부리는 것이니 들어주지 말라는 말을 세 번을 들었음에도 그랬다.
아이가 내게 응석을 부린다면, 그 응석을 들어주고 싶었다.
“⋯신들이 지금의 인류와 마찬가지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면 단 아홉으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무척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마법사이자 물리학자로 유명한 가노 파퀸의 저서 <첫 번째 신의 탄생>에 따르면⋯.”
재잘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전해져 오는 활력이 대단했다.
창밖에서 연녹빛 이파리들이 살랑거리며 응접실 안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이때, 내가 지금 이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을 알았다.
가슴 안쪽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 * *
미련 없이 게으름을 부리며 칠월의 절반을 흘려보냈다.
끝이 예정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세르벨 남매는 별장에서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도록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저런 준비해야 할 일들을 챙기다 보면 시간이 부족할 터이니, 일찍 출발하자기에 경험한 이들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시어런 아카데미가 있는 수도에서 남쪽으로 일주일을 꼬박 달려야 에른하르트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와 에른하르트 영지의 중간 즈음에서 동쪽으로 또 나흘을 마차를 타고 이동하여 세르벨 별장에 도착하였다.
거리로만 따지면 일주일이면 아카데미에 도착할 것이 분명하였으나, 시어런 제국의 땅덩이가 워낙에 크고 거대하기 때문에 이동 시간은 늘 넉넉하게 잡아 두어야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미리 알고 있지 못했던 어린 동생들은 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나마 일전에 제 형과 누나의 방학을 몇 번 겪어 본 에반 세르벨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의젓한 모습을 보였으나, 내 동생 미하엘 에른하르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소매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아직 7월인데, 왜 벌써 가? 나랑 잔뜩 놀아 주기로 해 놓고.”
“그래서 어제도 그제도 함께 놀지 않았니.”
“아냐, 잔뜩 놀진 않았단 말이야. 아직 일주일은 더 시간이 있잖아. 아니, 닷새만, 아니, 사흘만. 응? 하루만 더 있다 가.”
그 모습이 어찌나 애달프고 어여쁘던지.
아이 손을 잡고 이 자리에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역성을 들어주는 것만이 옳은 길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또, 내가 이 다정한 휴식에 흠씬 젖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이 아이와 내 양친과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이들을 좀 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보살피겠다고 결심했기에 나는 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가.”
“나 아가 아니야.”
“맞아. 우리 미하엘은 이제 아가가 아닌데 왜 이렇게 떼를 쓰지?”
“⋯나 아가야.”
금방 말을 바꾼 미하엘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훌쩍거리는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관자놀이에 대고 뺨을 부볐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익숙하여 몇 달 치의 이별이 크게 와닿지 않았으나, 그 사이에 아이가 또 훌쩍 클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차근차근 아이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건네는 목소리는 어쩔 도리 없이 케이크 위에 얹은 크림처럼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얼른 갔다가, 또 얼른 만나러 올 거야. 아니면 저번처럼 중간에 미하엘이 날 보러 와도 좋고⋯. 매일 곁에 있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 서로 노느라 공부를 할 수가 없잖아. 그렇지?”
“난 아가라서 공부 안 할 건데.”
“미하엘.”
아이가 마음에 없는 말로 투정을 부리는 것을 알았다. 그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조금 떨어트려 시선을 마주했다.
말끄러미 바라보자 아이는 거짓말이야, 웅얼거리며 다시 내 어깨에 이마를 폭 박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이별의 순간을 좀 더 길게 가지려는 것을 빤히 알아 다시금 떼어내는 일이 참 어려웠다.
폭, 한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드니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아스델 에른하르트가 조막만 한 양손을 제 허리에 올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같은 분홍빛 머리칼을 하나로 땋아 내린 아해의 얼굴에 의젓함이 가득했다.
“작은오빠는 내가 돌볼게. 큰오빠는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어어.”
“싫어! 나도 아카데미 갈 거야.”
“아이, 정말! 자꾸 어린애처럼 굴 거야?”
아스델이 미하엘의 옷깃을 억세게 잡아 끌어당겼다.
아무리 의젓하게 군다고 해도 겨우 다섯 살배기인 아스델이 미하엘의 몸을 온전히 받칠 수 있을 리가 없어, 둘이 투닥거리는 것을 말리면서 아이를 안전히 내려놓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 옆에서 모친이 깔깔 웃으며 부친의 귓가에 대고 속살거렸다.
“이렇게 보면 아스델이 미카엘을 똑 닮지 않았어요?”
“그 피가 어딜 가겠어요. 제가 보기엔 당신을 똑 닮았습니다.”
“전 저렇게 똑똑하지 않았다니까요.”
“글쎄요⋯.”
나를 닮았다고.
미하엘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서, 나는 야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스델도 한 번 품에 꼭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이 조막만 한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결국 눈물을 보인 미하엘을 어르고 달래느라 출발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만스러워하는 이가 없어 다행이었다.
아카데미로 가는 길이 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위를 간단히 꾸려 준비할 것이 많지 않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세르벨 가 별장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갈 예정이었다.
이것저것 정비하고 떠나더라도 한 달 내로는 영지로 돌아갈 것이니 편지는 에른하르트 가로 보내라 이르기에 그러겠다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