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세르벨 가의 별장에서 칠월을 맞이하였다.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 수련을 마치고 운기조식을 한 뒤 씻고 나왔을 때에, 아침 식사 자리에서 편지 꾸러미를 받았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로 발송된 친우들의 편지가 다시 세르벨 가 별장까지 옮겨 온 것이었다. 겨우 두 달을 떨어져 있을 그들과 안부 편지를 주고받아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에 잠시 놀랐다.
굳이 가족들과 있는 시간을 할애하여 곧 만날 동무들에게 안부 편지에 답신을 보내야 하나 귀찮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가도, 익숙한 붉은 장미 모양의 인장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옛날에 여러 가지 일이 있어 이런저런 아이들이 나를 참 아끼고 좋아했다는 이야기를 로건 세르벨이 귀가 따갑도록 읊어댄 까닭이었다.
나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상대에게 서운하게 대하는 것도 업을 쌓는 일이라 여겼다.
응접실 바닥에 그림판을 펼쳐 놓고 엎드려 있는 미하엘과 아스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깃펜과 먹을 꺼내어 글 쓸 준비를 하였다.
서재와 달리 책상의 높이가 낮아 자세가 불편하였으나, 아해들 놀기에는 이곳이 더 적당하여 다른 수가 없었다.
여럿에게 온 편지를 죽 펼쳐 두고 단번에 읽었다.
쉐이든과 다른 동무들은 사교계 행사를 무사히 치른 모양이었다. 이름을 거창하게 붙여 그렇지, 모두가 주인공인 생일 연회를 보는 것 같다 하였다.
황궁의 연회장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웠는지, 그 천장에 붙은 조명이 어찌나 화려하게 반짝였는지 따위에 대하여 상세하게 적어낸 편지를 읽자니 그 위엄을 짐작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 중 제 짝을 만난 이는 몇 없었던 모양으로, 서글서글하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몇 외에는 수줍어 춤을 청하기도 어색했다는 말이 편지 끝에 따라붙었다.
제 연인이 될 이를 처음 만날 자리라고 생각하여 너무 긴장이 되어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는 이반 홀모스의 편지를 읽고, 뻣뻣하게 서 있었을 멀대 같은 놈을 생각하며 실소했다.
쉐이든과 데미안은 짝을 찾는 일보다 친우를 사귀는 데에 힘을 쏟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발이 넓은 둘이 알고 지내는 동무라면 남녀 가리지 않고 댄스홀로 끌어다가 한바탕 춤을 춘 모양이었다.
그들이 재주를 부린 덕분에 어색하던 아해들도 다 같이 춤을 추며 즐거이 어울려 놀았다기에, 그 모습이 가히 짐작이 갔다.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을 것 같던 벤자민과 단비의 편지까지 읽고 나서 답장할 일을 골몰하였다. 이들이 갑자기 한데 모여 편지를 쓴 까닭은 제니의 편지를 읽고 알았다.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간 소리에 미하엘이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하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웃으며 손을 내젓고 다시 편지로 시선을 내렸다.
마리앤이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하고 시작된 제니의 편지가 구구절절하게 길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의 괄괄하고 활발한 성격을 어디로 치워버린 마리앤이 기운이 쏙 빠져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 골골하더니, 볕 좋은 창가에 앉아 한숨만 그렇게 내쉬더라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 생각하던 동무들이 마리앤이 걱정되어 논의를 하려 한데 모였는데, 나중에는 저들끼리 재미있어서 자리를 만들어 꾸준히 교류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내 생각이 나 다 함께 앉은자리에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 말이었다.
편지를 보낸 동무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으니 답장은 아무에게나 대표로 주면 된다 하는 말 뒤에 깜찍한 첨언이 붙어 있었다.
누가 답장의 주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내기를 하였으니 꼭 자신에게 답장을 달라며 별과 하트를 잔뜩 그려 놓은 제니가 하도 귀여워 결국 다시 웃었다.
동무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이 참 귀엽고 장하였다.
작위 가진 동기들 사이에서 저 홀로 지위가 낮아 눈치를 보던 제니가 제 편을 들어 주는 아이들 덕분에, 이제는 아카데미 내가 아니더라도 어깨를 쭉 펴고 다니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그 답신을 부탁받은 대로 제니의 앞으로 적기로 마음먹고 빈 편지지를 꺼냈다.
그러나 첫 자를 적기도 전에 아직 읽지 않은 편지가 남은 것을 보고 다시 펜을 내려놓았다.
다 같이 모여 이런 작당을 할 동무가 더 있지 않을 터인데 싶었다가, 제게 편지를 보낼 이가 또 하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베르 안티 시어런. 시어런 제국의 2황자였다.
하긴 동무들끼리 서로 정이 끈끈하여 얼굴만 봐도 꺄르륵 웃어 넘어가는 야영 수업 아해들과 달리, 루베르 녀석은 저 친한 사람도 없는 연회장에서 얼마나 심심할까 싶었다.
그냥 황자인 것도 아니고 황제를 노리는 입장이니만큼, 여러 손님들을 대하며 점잔을 뺄 흰 낯의 소년을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내게 보이는 모습만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님을 이제는 알게 되었으나, 나란 사람이 원체 아둔하여 내 눈이 가장 옳게 보이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세계사 노트 필기로 획 하나의 삐침마저 익숙하게 된 단정한 글씨가 차분한 인사말을 먼저 건넸다.
에른하르트 영식에게, 하고 시작되는 글을 차분히 읽어 내렸다.
예상했던 대로 별 내용이 없었다. 그저 연회에서 사람들이 저들끼리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났다든가, 방학 기간 동안 무엇을 하러 어디에 갔는지 궁금하다든가, 아카데미에 나가지 않는 동안에는 어떤 방식으로 수련을 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한다든가 하는 평범한 안부 편지였다.
이쪽이 더 빨리 끝날 것 같아 루베르에게 전해 줄 답신을 먼저 쓰기 시작했다.
루베르 안티 시어런 선배에게, 하고 먼저 써 내린 뒤 오늘 날씨를 적고 간단한 안부를 물었다.
적을 것이 많아 펜이 머뭇거리는 일이 없었다. 지금 나는 세르벨 가의 별장에 왔다, 세 남매와 어울려 수영과 승마를 즐기며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 지금 곁에 있는 동생들이 귀염을 부린다 하고 자랑할 일을 서두에 적었다.
중요한 대답은 부러 뒷장부터 적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나도 휴가 일정이 번잡하여 오전 이른 시간과 밤늦은 시간에만 시간을 낼 수 있지만, 아침과 저녁에 각각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이상씩은 몸을 단련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다음에는 일이 바빠 어렵더라도 하루 한 시간은 꾸준히 단련하는 것이 팔의 근력이 떨어지지 않는 방도이니 꼭 실천할 것을 권했다.
루베르가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커 다 자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그의 손과 발의 크기나 팔다리의 뻗은 모양새를 보면 앞으로 한 뼘은 더 넘게 자랄 터였다.
하여 수련할 때 너무 무거운 물건을 들고 근력을 단련하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비도술을 잘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모든 무의 기본은 자신의 신체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검으로 끝나는 것이니 몸의 중심을 단단하고 곧게 하라 적다가, 선배에게 너무 건방진 말을 하는 것인가 싶어 지금도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만 하라는 말을 한 줄 덧붙였다.
루베르가 제 키에 비하여 검을 짧게 뻗는 경향이 있는 것을 지적하고, 익숙한 대로 검식을 그으려 하니 그런 습관이 생기는 것이라 좀 더 팔을 넓게 써서 품 안의 간격을 의식한 채 움직일 것까지 당부하고 나니 완성된 편지가 여덟 장이나 되었다.
평소 그가 나보다 배분이 높은 것을 고려하여 조언하고 싶어도 입을 열지 못하였던 말들이었다. 그가 먼저 내게 배움을 청하니 기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편지를 받고 뿌듯해할 소년을 생각하니 나 또한 무척 흐뭇하였다.
시종들에게 편지지를 더 청하여 1학년 동기들에게 묶어 보낼 편지를 적었다.
이 또한 초반의 내용은 엇비슷했다.
다만 아해들이 내 생활을 더 궁금해하여 자세히 적은 부분이 있었다.
로건 세르벨이 동무들과 몇 번 인사한 사이라 하여 대신 안부를 전하고, 내 동생들이 무척 어여쁘단 이야기로 또 한 장을 채웠다. 마지막에는 마리앤이 우리 중 가장 먼저 혼인할 것 같아 마음이 기쁘다, 꼭 축하하러 가겠다 하는 말을 덧붙였다.
시종에게 답신을 표국에 전달할 것을 부탁하고 있자니, 미하엘과 아스델이 나를 그린 것이라며 넓은 종이짝을 번쩍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참 잘했다 칭찬하며 그 통통한 뺨들을 몇 번 물었다 놓고 또 함께 나들이를 나갔다.
* * *
아침저녁으로 한 달 남짓한 시간을 함께 어울리고 있으니 자연히 로건 세르벨, 레일라 세르벨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린아이들은 저들끼리 놀라고 풀어두고 셋이 함께 잔디밭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고, 내가 그들에게 간단한 체술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로건 세르벨은 경영부 3학년이고 레일라 세르벨은 학술부 2학년이었다.
둘 다 짙은 금갈색의 머리에 푸르스름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그 걸음이 서툰 구석이 있는 에반 세르벨이 밝은 금색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 색이 짙어지는 모양이었다.
둘 다 체술이나 무술과는 연이 없어 관련 수업에는 근처도 얼씬하지 않는다고 하여 탐탁지 않았다.
중원에서는 머리가 좋은 것으로 유명한 제갈 가의 인물이라도 몸을 닦아 무예를 수련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본디 바른 생각은 바른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 남매를 닦달하여 간단한 호신술을 가르쳤다.
남매 또한 받기만 할 수 없다면서 이런저런 책을 꺼내 와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었는데, 책을 펼쳐 두고 이야기를 조금 나누다 보면 로건과 레일라가 언성을 높여 토론을 시작하기 때문에 크게 불편할 일은 아니었다. 그 내용을 듣다 보면 꽤 재미있기도 하였다.
오늘의 토론 주제는 빈민 구제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이 땅에도 빈민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는데, 일전에 수도 저잣거리의 뒤편에서 마주한 사내들도 낡은 모자를 쓰고 있긴 했으나 행색이 멀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뺨이 움푹 패어있지 않고 아랫배가 판판한 것은 배가 고프다 하여 돌이나 모래 따위를 주워 먹은 적이 없다는 말일 터였다.
그네들은 먹을 것과 먹으면 안 될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은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을 향해 손속을 아끼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로건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하였다.
세르벨 남매는 영지의 복지정책에 관심이 무척 많았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말을 일러 주는 것을 달게 들었다. 그중에서도 로건 세르벨은 일정 기간 재물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였고, 레일라 세르벨은 교육을 통한 성장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 모두가 낯설어 한참을 이런저런 것을 캐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