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중원에서도 머리싸움 하는 이들이야 회의 테이블에서 내내 예리한 눈빛과 전음(*내공을 사용하여 특정한 상대에게만 말소리를 전하는 무공)을 사용하여 수작을 부리고는 하였다.
허나 그런 것은 가문을 이어받을 직계손이나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일개 방계인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 하기에 한 번도 염려해 본 적이 없었다.
시어런에 태어난 이후로도 십 년이 넘도록 눈앞에 있는 부친의 울타리 안에서 한 번 걸러진 좋고 부드러운 것만 먹고 입고 접하며 살았음을 이제는 알았다.
나는 속내를 숨긴 이들을 대하는 일에 무척 서툴렀다.
혼자 고민하여 해결될 일이 아님에 곧장 부친을 향해 물었다.
“그럼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제부터 네가 생각해야지.”
“예?”
부친은 다정히 웃었다.
내가 다음 수를 놓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체스판 위의 전장은 위태한 순간에 멈춘 채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부친이 이 전장을 굳이 끝내려 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가 뻗은 손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아, 복슬한 결을 따라 찬찬히 쓰다듬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어찌 정답이 있겠니. 네게 진정으로 솔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거짓으로 대하는 이도 있겠지. 앞으로 만날 좋은 사람을 전부 의심하라고 말할 수도 없고, 싫은 사람의 사정을 하나하나 봐주라는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구나.”
“⋯.”
“난 그저, 내 아들이 마주칠 누군가를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 하고 단언하는 대신에 오래도록 살펴 그의 여러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였다.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에 정수리를 부비며 어린 척을 하였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물었더니, 한참을 고뇌하던 부친이 모친에게 가 물으라 하였다. 부친이 손을 거두고 체스판을 정리하기에 나 또한 그를 도왔다.
모친과도 따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어런의 언어를 막 익히기 시작하였을 무렵에는 시름에 찬 그녀를 달래기 위하여 종종 차를 청하고는 하였다.
모친도 나와 같은 날을 떠올리는 듯,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내 찻잔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주며 싱긋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는구나.”
“저도 그렇습니다, 어머니. 그때에는 데운 우유에 설탕을 타 주셨지요. 그때에도 지금도, 참 달고 맛이 좋습니다.”
“그래, 그때도⋯ 넌 그렇게 말해 주었지. 정말 귀여웠는데.”
모친의 목소리가 추억에 젖어 꿈결처럼 나긋나긋 풀어지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았다.
갓 눈을 떠 마주했던 그녀는 잘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금방이라도 또각 부러질 것만 같은 파리한 낯의 여인이 내 어미라 하기에 어찌나 놀랐던지,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제 뽀얗게 살이 오르고 뺨에 발갛게 홍조가 이는 모친을 앞에 두고 있으니 좋았다.
“뭇사람들이 제가 외탁을 하였다 하던걸요.”
“글쎄⋯? 머리 색이랑 눈 색은 그렇지만, 사실 난 너처럼 똑똑한 어린아이는 아니었단다. 네가 아니었다면 그이가 날 볼 때마다 부끄러워서 도망갔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
양친을 꾸짖어 화해하게 한 직후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들어도 들어도 우스웠다. 제 부인 얼굴 보기가 수줍어 도망을 다니는 새신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실소를 참기 위하여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소리 없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 잔을 내려놓는 법은 모친에게서 배웠다. 그 손끝의 방향과 손목의 각도 같은 것도 정해져 있다 하기에 한 가지를 정하여 몸에 바르게 익혔다.
덕분에 어디서든 찻잔을 들 일이 있을 적에 민망할 일이 없어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부친과 모친이 함께 있을 때 혼인 전에 있던 일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었다. 양친이 그 일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을지가 주책스럽게도 새삼 궁금하였다.
내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을 빠르게 읽은 모친이 먼저 물었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니?”
“제가 이런 것을 궁금해하여도 되는지 모르겠어서 그렇습니다. 혹여 버릇없이 물은 것이라면 꾸짖어 주십시오.”
“으응, 그럴게. 그래서 뭐가 궁금해, 우리 아들?”
“⋯전에 중간고사가 끝나고 두 분을 뵈었을 적에, 외숙부님께서 두 분의 혼인을 주선해주신 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잖습니까.”
모친이 갑작스럽게 사레가 들려 기침하기에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건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또 얼마나 대단하고 어이없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꺼낸 물음을 거두지 않았다.
내 그 혼인식을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이었다면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 하며 웃어넘겼겠으나, 내 부모의 일이 되고 나니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 나이가 차서 이런저런 것을 배우기 위하여 본가를 떠나 사는 입장이니 이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때가 맞지 않아서⋯.”
“때, 라니?”
“혼인식 날에 두 분이 처음 서로 얼굴을 마주하였는데, 아버지가 내내 피해 다니기만 하셨다면⋯ 어찌 제가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
“아버지께 여쭤보았더니, 대답을 영 못하시다가 어머니께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이가?”
“예.”
아주 긴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 휴가가 끝나기 전에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친이 고뇌하는 것을 두고 쿠키나 축냈다.
달큰한 초콜릿과 라즈베리가 잔뜩 박혀있는 쿠키는 씹을수록 새콤달콤한 것이 감칠맛이 돌았다.
모친이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부친에게 가서 도로 묻는 수도 있었기에 마음이 급하지 않았다.
부친이 직접 말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을 구태여 모친에게 물으라 한 까닭이 있기는 할 터였다.
“⋯내가.”
모깃소리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경지에 오른 내 귀에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모친이 입을 여는 기색이기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공손히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모친은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힘겹게 이었다.
“⋯긴장한 것은, 술을 마시면 해결이 된다고 들어서.”
“⋯.”
“그날 내가 술을⋯ 가져갔는데. 그게 좀⋯ 독했, 단다. 그래서 그이가 좀 힘들어해서⋯.”
“⋯.”
“너는 그이와 내 아들이 맞아. 그건, 그, 의심하지 않아도 된단다.”
“⋯아버지께서는 왜 어머니께 물으라고 하신 겁니까⋯?”
“⋯그이가.”
“예.”
“기억이 없대.”
아. 나는 그만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그간 정인이 없었다 하여도 나이를 그쯤 먹었는데 운우지락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짐승도 교합을 하여 아이를 낳는데 사람 또한 그런 것이 마땅하였다. 교합 없이 내가 태어났다 함은 말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어릴 적에는 혹여 모친에게 또 다른 정인이 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던 적도 있었다.
허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부친과 모친이 서로를 피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이가 끼어든 낌새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도 내가 의심을 거두지 못한 것은 내 터럭 색과 눈 색이 모친만을 고스란히 닮은 탓이었다.
두 동생은 모친과 부친의 외형을 번갈아 닮았는데, 나는 모친의 것만 물려받은 것이 심상찮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들어 보니 혼인 첫날에 술을 과하게 마신 남녀가 정을 나누었는데, 아비에겐 침상에 딸린 고즈넉한 테이블에서 술잔을 기울인 것이 마지막 기억이라 남우세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다음날 모친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던 것이 불화의 시작이라 하였다.
그간의 고뇌가 모두 헛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우습기만 하였다. 집안의 모두가 태평하던 까닭이 있었다.
모친이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양 제가 그이를 무섭게 한 것이 잘못이었던 것 같다느니,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느니 하며 이런저런 말을 덧대었다.
“아뇨, 제가 두 분의 자식임이 분명하다면 되었습니다.”
“그럼, 다른 건 몰라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누가 뭐라고 해도 미카, 너는 자랑스러운, 나와 그이의 아이야.”
“⋯예. 괜한 것을 물어 죄송합니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알고 싶다는 생각에 그만.”
고개를 내젓자 모친이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아 왔다. 나는 순순히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시종일관 수줍어 부채질을 하다가, 손수건을 쥐다가 하던 그녀는 또렷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카, 넌 아직 어려. 나는 네가 혼자서 고민하지 않고, 이런 것을 부모에게 먼저 상담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정말 기쁘단다. 물론 윌리엄과 내가 처음에는 부모답지 못하게 굴었기는 해. 그때는 우리도 어리고 잘 몰라서 그랬어. 앞으로도 잘 모르는 일이 많기는 할 거야. 그래도, 미카.”
“⋯예, 어머니.”
“뭐든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함께 의논하고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우린 가족이잖니.”
진지한 얼굴에 대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모친의 손등을 도닥이자,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뺐다. 어릴 적에 그러했던 것처럼 쿠키 하나를 집어 내 손에 쥐여주기에 순순히 받아 한 입 물어 삼켰다.
어찌 보면 우스운 오해였고, 민망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꽤 깊게 감격하였다.
나에게 있어 가족과 혈연이란 것은 뜨겁고 무거운 것이었다.
전생에서는 태어나는 첫 숨이 트일 적부터 호적이 지워지기 전까지 나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이 남궁 두 글자 아래에 있었다.
이제 나는 에른하르트의 이름 아래 온전히 바로 섰다.
더 좋은 것보다 익숙한 것을 찾고야 마는 것이 나라는 인간의 습성이었다. 피를 이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감각에 체기가 가신 듯 가슴 한켠이 시원하였다.
입에 물고 있는 쿠키에서는 그리운 맛이 났다. 달큰한 친애의 맛이었다.
모친과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자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그녀는 나를 배 속에 품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를 가진 초반에는 먹는 입덧이 있었다고 했다. 난생처음으로 그렇게 음식 욕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서럽고 무서울 만큼 보이는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만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 몸이 무거워질 무렵 갑자기, 정말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뱃속에 들어앉은 내가 태동도 없이 잠잠해지더니 아무리 불러도, 무엇을 먹어도 꿈쩍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아이를 무서워해서, 제가 나쁜 마음을 먹어 그런 줄로만 알고 내게 미안해서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물을 보이기에 그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내가 태어난 뒤에는 꼭 많이 놀아줘서 활발한 아이로 기르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결국에 내 덕에 모친이 기운을 차리게 된 것이 고맙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결국 의자를 옮겨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손을 맞잡은 채로 다음 이야기를 졸랐다.
내 처음 말문을 열었을 적에 모친을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라고 부른 것을 듣고 깜짝 놀란 날의 심정과 내가 모친을 불러다가 식사를 챙기고 몸을 아껴라 혼을 낸 나이가 만으로 세 살이 안 되었던 때였던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편지로 전해 들은 외가 식구들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우르르 쫓아와 내 얼굴을 구경하였던 때의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의 내게는 크게 인상 깊지 않은 일들이라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는 모친의 표정이 크게 편안해 보였기에 한참을 손을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