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70화 (70/176)

70.

호수 안쪽에서 크고 화려한 물고기를 발견한 아스델이 그 물고기를 쫓아가자고 졸라 로건과 나는 노를 재게 놀렸다.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로건이 기진맥진해 있기에, 호숫가에 대강 배를 세웠다. 자리를 옮기기 위함이었다.

계속해서 노를 저을 내가 가운데에 앉고 두 아이가 내 앞쪽으로, 로건이 내 뒤쪽으로 앉아 균형을 맞추기로 하였다.

로건은 몇 번이나 혼자 노를 저어도 괜찮겠냐고 물었으나 이제 막 흥이 나고 있는 나로서는 해가 지기 전에 놀이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세르벨 가의 어린 도련님, 에반 세르벨도 데리고 와 함께 놀고 싶었으나 내가 팔이 두 짝이라 만약의 일이 생겼을 때 세 아이를 건사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워낙에 가벼운 배였다. 혼자 저어도 앞으로 쑥쑥 잘도 나갔다.

남 부려 먹기가 미안했던 것인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저어하던 미하엘도 내가 홀로 노를 젓기 시작하자 귀 끝이 발개지도록 흥분하여 이쪽이다 저쪽이다 삿대질을 하여 방향을 알렸다.

결국 화려한 비늘을 가진 팔뚝만 한 물고기가 제 서식처로 보이는 수초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를 목격한 다음에야 아이들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지쳐 늘어졌다.

그렇게 달떠 동동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은 것이 무척 기특하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다들 재미있게 논 것이 분명하였다.

특히 내 부친과 세르벨 백작은 오랜만에 노를 저으니 진이 빠져 돌아가는 길에 고삐를 쥐는 것도 버겁다고 엄살을 부렸다.

겨우 이 정도로 우는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몸이 허한 것이 분명했다. 부친에게도 검술을 가르치는 것이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슬쩍 언질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노곤하여 저녁 식사는 간단히 하였다.

아이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어른들도 마사지를 곁들인 목욕을 오래 즐기겠다 하였기에 할 일이 없어진 나는 검을 들고 일전에 안내받았던 정원 한켠에 서서 검식을 수련하였다.

길게 뻗고 짧게 거두는 검날이 달빛을 받아 번쩍번쩍하였다.

푸른 하늘로 시작한 검식의 중간에 꽃이 피었고 파도가 일었다. 잡스러운 것이 섞여 들었다 거리낄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을 고스란히 담는 과정이었다.

오늘 본 화려한 물고기의 움직임을 흉내 내어 미끄러지듯 걸으며 검을 옆으로 휙 떨쳤다.

푸른 하늘을 헤엄치는 금빛 잉어를 떠올렸다.

미끄러지는 걸음과 걸음 사이의 간격이 화려한 지느러미인 양 길고 낙낙했다. 언젠가는 이 잉어가 용으로 거듭나는 날이 올 것이다. 내 꼭 그리 만들겠다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다음 날은 승마를 하였다.

어린 아해들은 어른들과 함께 울타리가 쳐진 안에서 저들끼리 당나귀를 타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도록 두고, 로건 세르벨과 레일라 세르벨 두 남매와 함께 평탄한 언덕길을 올랐다.

레일라 세르벨은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소녀로, 다섯 살의 내가 멋모르고 이 여인과 혼인하여 아이를 낳으면 어떻겠냐 떠들어 댄 적이 있었다.

그녀는 쾌활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로, 현재 시어런 아카데미 법학부에서 수학 중이라고 하였다.

고삐를 감아쥐고 말의 옆구리를 두드려 속도를 내었다. 웃자란 잔디를 헤치고 쏘아지듯 달려 나갈 때마다 평소보다 묵직하게 안면에 닿아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그러고 보니 경공 수련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때를 찾기가 영 어려웠다.

한참을 뛰어놀다가 말들이 헐떡이기 시작하여 자유로이 풀을 뜯으라 풀어 주고 풀밭에 둘러앉았다.

레일라에게 로건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하였다. 루베르 황자가 그렇게 차가운 인상이냐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미남보다는 좀 쌀쌀맞고 차가운 미남이 낫죠.”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저는 2황자가 자신의 셀링 포인트를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해요. 검술 수업 중에도 흰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땡볕에 오래 서 있지 않잖아요.”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어안이 벙벙했다. 레일라는 차분하게, 아주 대단한 진실을 몰래 귀띔해 주는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1황자 리차드는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학자형 미남이거든요. 그러면 검술부 출신 루베르는 사납다거나 거친 이미지를 갖고 갈 만도 한데, 절대 그렇지 않잖아요? 그게 다 설득력 있는 얼굴의 힘이죠. 차갑고, 서늘하고, 냉철하고, 고고한.”

“⋯그냥 루베르 황자가 햇볕을 싫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요. 지나가던 새도 멈춰서서 뒤돌아볼 만큼 잘 생겼는데 희고 고운 피부를 가졌다니! 그야말로 로열 블러드의 후광을 제대로 입은 외모 아니겠어요?”

내 말을 듣는 기색이 없었다.

“어깨도 탄탄하고, 허리도 잘록하고. 뭐 빠지는 게 없죠. 그린 듯한 눈썹에 속눈썹도 길고 그윽한데 눈빛은 매섭잖아요. 콧대는 베일 듯 높고 그 나이에 벌써 젖살이 빠져서 턱선이 살아있는데⋯. 어우, 그 얼굴은 황제를 해도 어울리고, 북부대공을 해도 어울리고, 하다못해 수도에서 카페를 열어 커피를 내려도 어울릴 관상이에요.”

“⋯예?”

“⋯레일라의 이야기는 반 정도 흘려들어. 원래⋯ 가끔 이래.”

시어런 사람들의 얼굴 생김을 구분하기까지도 한참 시간을 들인 나였다. 누가 더 잘났고 못났는지를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루베르가 그렇게 잘생겼던가? 눈썹이 짙고 콧대가 높아 사내다운 생김이라 잘생겼다 여기기는 하였으되 그 외모가 시어런 사람들 눈에도 유난히 빼어난 줄은 몰랐다.

그래서 루베르가 차갑게 생긴 것은 맞다는 이야기인가? 알 수 없었다. 그 까만 눈과 곧은 눈썹을 떠올렸다.

허나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곰곰 생각하니 맞는 말이었다.

균형 잡힌 얼굴이긴 했다. 어린 나이에도 벌써 키가 훌쩍 크고 어깨와 가슴이 두툼했다. 친한 녀석이 칭찬을 받으니 싫지는 않았다.

다만 여인의 눈으로 보는 녀석이 새삼스러워 멋쩍고 어안이 벙벙했다.

레일라는 루베르의 외모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였다. 그 눈매가 깊어 빠질 것 같다느니, 자주 웃지 않아 가끔 입꼬리를 올릴 적에는 애간장이 살살 녹느니 하는 류의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루베르는 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놈이었다.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을 뿐이지, 겁도 많고 수줍음도 많았다. 눈이 마주칠 적마다 부끄럽게 웃었다.

얌전하고 조용한 성정을 지닌 놈은 늘 부지런해서, 노트 정리도 열심히 하고 검술 수련도 열심히 했다. 외모를 신경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잘나게 태어난 것이 그 아이의 잘못은 아닐 터였다.

그런 생각에 얌전히 듣다 어이가 없어 픽 웃었더니, 아직 나는 어려 그녀의 취향이 아니니 분발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크게 웃으며 그러겠다 순순히 대답하였다.

* * *

즐거운 날은 빠르게 지났다.

그다음 일주일은 매일 이른 아침과 자기 직전에만 손에 검을 쥐었다. 새벽에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서 깊은 밤에는 모두 지쳐 일찍이 침소에 들었기에 수련하기에 좋았다.

그 외의 모든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냈다.

낮에는 약속한 대로 에른하르트 가와 세르벨 가 일원들이 모여 수영을 즐기기도 하고, 낚시와 사냥을 하는 일에 어울리기도 하였다.

따뜻한 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에서 책을 읽기도 하였고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쌓아 두고 먹부림을 하기도 하였다.

벼르고 벼르던 대로 부친과 장기, 아니. 체스를 두기도 하였다. 개별 응접실에 마주 앉아 달고 맛 좋은 음식과 향긋한 차를 차려 두고 보내는 시간은 안온했다.

체스말을 옮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개중에는 에른하르트 가문에서 응원하고 있는 황제 후보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부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정히 웃었다.

그 단정한 웃음에서 기특하고 대견해하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소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글쎄, 에른하르트 가에서는 아직 누구 하나를 정하고 지지하고 있지는 않단다. 굳이 말하자면 우리는⋯ 발렌티아 공작가와 함께할 생각이야.”

“외조부님과요?”

“그래. 우리 말고도 발렌티아 공작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많은 백작 가문들이 다 비슷하겠지. 나는 직접적으로 정쟁에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하는 일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

“그렇습니까.”

“지금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단다. 아직 황제 폐하께서 정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계시잖니. 십 년은 더 뒤의 일이지.”

“⋯음.”

“그저 새로운 황제를 정하기 전, 귀족회의가 열렸을 때. 표결이 필요할 만큼 서로의 세력이 비등하다면⋯ 아무래도 공작가에서는 안티네스 후작가의 손을 들 것 같다는 생각은 드는구나.”

“어째서입니까?”

“글쎄, 안티네스 후작가의 평소 행실이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플로이드 왕국에서 뭔가 대단한 것을 약속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요즘 여러 조약에 시비를 걸고 있는 모습을 봐서는 영 대단치 않을 것 같구나.”

안티네스 후작가라면 루베르 안티 시어런의 외가 친척이었다.

부친의 말을 듣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저를 잘 따르는 소년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내가 적잖이 안도하는 기색이었던지 부친이 체스 말을 옮기며 슬쩍 물었다.

“루베르 황자와 좀 친해진 모양이지?”

“예. 어쩌다 보니 성격이 잘 맞아서.”

“하긴. 너도 그렇지만 2황자도 사람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하니 잘 맞겠구나.”

“⋯음.”

굳이 부친에게까지 루베르의 하는 짓을 숨길 까닭이 없어 어깨를 으쓱하고 그간 속에 두었던 말을 꺼냈다.

녀석이 사람을 가리기는커녕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는 귀여운 놈이고, 수줍음이 많아 제 할 말도 다 못하더라 이야기하니 부친 윌리엄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가 체스 말 하나를 옮겼다.

“체크메이트.”

“⋯아.”

“우리 아들이 아직 모르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알려 주어도 좋을지 모르겠어서 고민이 되는구나. 일단 이야기를 할 테니 듣고,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으면 흘려보내도 괜찮아.”

“예. 달게 듣겠습니다.”

“누군가가 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님을 기억해 두어라.”

“⋯예.”

나는 그제야 내 실책을 깨달았다.

어린아이에게서도 늘 배울 점이 있다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중원과 이곳 시어런의 문화와 풍습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르니 속내를 숨기는 이유도 방식도 모두 다른 것이 마땅하였다.

무림인이란 자고로 말보다 검을 먼저 뻗는 놈들이었다.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이들은 대개 그들의 생명을 하루라도 더 연장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악인들이었으니 구별하기 어렵지 않았다.

나를 두려워하여 납작 엎드리는 이들은 악인이었고, 눈물을 쏟으며 품에 안겨들 듯 구는 이들은 약자였다. 내 뒤를 따르며 눈을 빛내는 것들은⋯.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서글프고 그리운 얼굴들 탓에 표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부친의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하고 따뜻하였다. 그 시선 앞에서 정말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쓱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한동안 루베르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