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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8화 (68/176)

68.

나란히 벤치에 앉아 저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청량한 하늘이며 푸른 정원 따위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안력을 조금 돋우니 소담한 꽃잎이 산들거리는 것도 보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허공에 거미줄처럼 얽혔다.

로건은 나란히 앉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자 좀 더 편한 말투가 되었다. 그편이 내게도 좋아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한데?”

“쉐이든과 내가 어찌 만났기에 그 아이가 나를 자꾸 챙겨 주려 구는지. 그리고 내 생일 연회에 참가한 아이들끼리 저들의 무리를 따로 가지고 있는지 같은 것이.”

“어⋯ 사실 로제 영식은 언제나 널 챙겨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생일 연회에서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 기억에 남지 않더라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물음에 답하는 대신 하잘것없는 것을 물었다.

“그⋯ 왜 파티를 연회라고 부르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니.”

“⋯그으, 래. 이런 건 정말 안 변했구나. 뭐,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라 새삼 말하기 어색하기는 한데. 네 다섯 살 생일에 다 같이 방에서 놀다가 단비가 밖에서 놀고 싶다고 졸라서 나갔던 일이 있었거든. 혹시 기억나?”

나는 로건 세르벨도 데미안 필라로이를 단비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잠시 당황하였으나, 내 생일 연회에 참여한 아해들끼리는 다들 그렇게 부르겠거니 하고 적당히 넘겼다.

기억하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원을 잘 꾸며 놓았으니 자랑할 법도 했다. 어린 아해들이 우르르 몰린 자리에서 방 안에서만 놀게 두는 것도 우스웠다. 날 좋은 바깥 정원으로 나가 기운 빠지게 숨바꼭질 따위를 하는 일은 연례 행사였다.

“그날에 쉐이든 로제 영식이 나무 뒤에 숨으려다가 연못에 빠졌던 적이 있었잖아. 그걸 겨우 다섯 살 난 네가 물속에 뛰어들어서 구해줬고. 나이 먹은 영식들이 나뭇가지를 구해 온다, 물에 들어가야 한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말이야.”

“⋯그랬었나?”

이건 기억에 없었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졌다면 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루에 한 번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마땅한 일이다. 기억에 남겨 둘 리 없었다.

“그때 로제 영식이 엉엉 울면서 고맙다고 하니까, 네가 그랬잖아.”

“음?”

“친구끼리는 그런 말 할 필요 없다고. 그다음부터 로제 영식이 여기저기에 너랑 가장 친한 친구는 자기라고 얼마나 떠들고 다녔는데.”

“⋯.”

나는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 쉐이든 로제의 이름과 얼굴을 외우지 못했다.

이유는 정말 많았다. 내 생일 연회에 참석한 아이들 중 붉은 머리의 소년이 정말 많았고, 아해들은 한 해가 다르게 쑥쑥 커서 그 얼굴 모양새가 매번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매번 다른 색의 옷을 입고 다른 모양의 장신구를 하고 와 행색으로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 생김새가 중원과 달라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웠고⋯.

그런데도 어쩐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입학식 날에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아 파들파들 떨리던 녹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아이와 친해진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마른세수를 하며 침중한 마음을 달래는 나를 보고 로건 세르벨이 머뭇거리다가 내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위로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굳이 떨치지 않았다.

“그때 네가 정말 멋있기는 했어. 지금 내 허리까지도 안 오는 아주 작은 꼬마였는데, 정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연못에 뛰어들었잖아. 버둥거리는 로제 영식의 몸을 잡아서 네 어깨에 이렇게 걸치고 잡아, 하더니 앞으로 막 헤엄치는데⋯.”

“⋯.”

“로제 영식이 자꾸 엉엉 울면서 매달려서 물속으로 몇 번을 가라앉았는데도 울지도 화내지도 않고 물 밖으로 나와서는, 됐으니까 시종 불러서 옷부터 갈아입어. 하고 완전 명령조로.”

“⋯그만하면 됐다. 그런 일이 또 있었어?”

“어⋯ 많았지.”

“⋯쉐이든이랑만?”

“그럴 리가 있어? 그다음 해에는 네가 구해줬으면 해서 일부러 연못에 뛰어드는 영애들도 있었어. 미리 시종들이 대기하고 있어서 바로바로 구해낸 덕분에 큰일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그렇게 로건 세르벨이 영웅담을 늘어놓듯 얘기하는 과거 일화를 듣고 있자니 마리앤의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과 같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물에 빠진 놈을 건져 오고, 나무에 올라간 놈을 내려 주고, 넘어진 놈을 달래 주고, 싸운 놈들을 화해시키고⋯. 그런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정말 별것 없었다.

아이들을 우르르 한 곳에 몰아두면 속에 든 것이라도 어른인 내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런 걸로 많은 아이들이 나를 친근하게 여겼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민망하였다.

“혹시 데미안 크리스토퍼와 벤자민 클라우디안도 내 생일마다 찾아오곤 했었나?”

“어, 클라우디안 영식은 아닐걸. 아무래도 영지가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쉽게 찾아오기는 어려웠을 거야. 데미안은 한 번 빼고 전부 참석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쉐이든과 데미안이 많이 친해?”

“아무래도 영지가 서로 가까우니까? 딱 에른하르트 가와 세르벨 가 정도의 거리거든. 영지끼리 맞닿아 있고, 마차로 사나흘밖에 안 걸리고.”

“그래⋯.”

분명 나도 자리에 함께했는데 저들끼리만 기억하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자 함께 조용히 있던 로건이 다정한 말씨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도 시어런 아카데미 생활에 꽤 많이 적응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제 사람 이름도 잘 외우는 것 같고. 또 친해진 사람은 없어?”

“뭐⋯.”

나는 잠시 고민하였다. 생각나는 얼굴이 많았다.

그간 참 많은 아이들을 만났고, 얼굴을 익히고, 함께 다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중에서 문득 흰 낯짝을 새빨갛게 붉히고 방학 중에도 보고 싶을 것이다 웅얼거렸던 소년이 떠올랐다.

퍽 귀여운 놈이었다. 올해는 제대로 짝을 찾았을까 궁금했다.

“루베르 황자랑⋯? 좀 친해진 것도 같고.”

“⋯2황자님이랑? 아니, 잠깐⋯ 2황자가 이제 2학년인데? 어떻게?”

“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의아하였다.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로건에게 나와 루베르가 친한 것이 이상한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고심하였다.

로건 세르벨도 황위 계승 싸움에 나 때문에 함께 얽히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내가 단단히 일러두어 가문의 일로 번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 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어서, 일찍이 마엘로 샌슨 교수의 검술 수업을 듣고 있거든. 그 수업에서 서로 알게 되었는데 아이가 착하고 순박하며 베풀 줄을 알아 어찌어찌 친해지게 되었다.”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옆을 돌아보았다.

로건이 턱이 떨어질 것처럼 입을 떡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의 턱 아래를 밀어 올려 입을 닫아 주었다.

녀석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잠시 그대로 굳어 있다가 내 귓전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뭐어어?”

“아니, 내가 수련을 그렇게 일찍이 시작하였는데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로 놀랄 일은.”

“내가 그걸로 놀란 것 같아? 아니, 누가 착하고 순박해? 루베르 안티 시어런 2황자를 말하는 게 맞아?”

“그럼. 머리도 눈도 까만 건 그 녀석뿐이라고 하던데.”

로건의 입이 두 번째 벌어지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입을 닫는 것을 도와주었다.

로건 세르벨이 너무나도 놀라는 기색이기에 무언가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루베르의 성정이 본디 어떠한지 물었다.

로건은 몇 번이나 대답을 망설였는데, 자신이 이간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몇 번이나 달랜 후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로건 세르벨이 알기로 루베르 황자는 서늘한 성정으로 유명하다 하였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어 흰 낯짝이 더 뽀얗게 보이는 것도, 제 또래보다 우수한 검술 실력도, 차갑고 위엄 있는 명령조의 목소리도 모두 다 그를 우러러보게 만든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로건 세르벨의 정확한 나이를 들었다.

로건은 나보다 네 살이 많은 열일곱이었다. 이미 옛적에 졸업한 줄 알았던 그가 현재 아카데미 3학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입학하였을 루베르에 대하여 나보다 잘 아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쩐지 영 믿기지 않았다. 그와 가까이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 수줍음 타는 것을 냉한 성격으로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이 가득하였다.

“아니야. 생각보다 귀엽게 굴던데.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말수가 적어 동무가 많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성정으로 어찌 황제가 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알아서 잘하겠지.”

“⋯.”

로건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을 돌렸다.

“다른 친구는? 또 친하게 사귄 친구는 없어?”

“마법부의 마리앤 필로덴도르와도 가까이 지내는 편이다. 그 동무인 제니라는 아이도 있는데, 둘 다 똘똘하여 함께 어울리다 보면 배우는 것이 많아.”

“아, 마법부. 이번에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대련했다는 것은 들었어.”

“아. 그래, 에드윈과도 친하게 지내기로 하였다.”

“⋯뭐?”

“내기 대가로 친하게 지낼 상대를 소개해 달라고 하였는데, 자신을 주겠다기에.”

“⋯잠깐, 잠깐. 나 지금 뭔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누굴 준다고? 준다고 그냥 받았어?”

“아이가 진중하게 사과를 하더라.”

로건 세르벨은 아까의 내가 그러했듯이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였다.

동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힘들어하는 까닭을 몰라 그대로 두었더니, 저 혼자 입을 벙긋거리거나 얼굴을 쓸어내리며 부산을 떨었다.

무언가를 한참 감내하는 모습을 의아하게 구경하고 있자니 소년이 곧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이동하려나 싶어 그를 따라 몸을 세웠다.

“아니야, 더 묻지 않을게. 그냥⋯. 아니, 그⋯ 공터로 안내해 줄게, 가자. 더 궁금한 거 없지?”

“음.”

로건이 알고 있는 아이들의 성정이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기는 하였으나 그가 매우 질색하는 것 같아 그만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별장에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머무를 예정이니 기회는 많을 터였다.

안내 받은 곳은 너른 잔디밭으로 바닥이 평탄하여 크게 나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검을 수련하는 것보다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신법을 연마하는 것이 좋겠다. 로건을 향해 안내해 주어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했다.

뜨끈한 바람이 로건 세르벨의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그 탓에 푸른 눈동자가 가려져 녀석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로건은 지친 목소리로 열심히 수련해서 얼른 네가 원하는 경지에 오르길 바란다며 좋은 말을 해 주었다. 어릴 적부터 느꼈지만, 참 성격이 좋은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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