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여행길에 두 번은 더 생선 요리를 먹었다.
야들야들한 살이 퍽 맛이 좋았다. 내가 잘 먹는 것을 보고, 부친이 별장에 도착해서는 직접 낚시를 해 보자 하여 그러겠다고 대꾸하였다.
내기를 걸자 하는 말도 덧붙였더니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우습고 귀여웠다.
중원에서 내가 어옹(*고기 잡는 노인)으로 불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그리 선뜻 응했을 터였다.
마차를 타고 가다가 멈춰서 밥을 먹고, 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멈춰서 잠을 자고 하는 일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가문에 있을 적에도 수련을 한다, 수업을 듣는다 하여 바빴던 나였다. 식솔끼리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부친이 내가 알던 것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친이 짓궂은 성정으로 누군가를 놀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새삼스레 배웠다.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다정한 마음이 서려 있어 듣기 좋았다.
세르벨 백작 가문의 별장에 도착하였다.
별장이라고 하기에는 유난히 컸다.
사 층 높이 본관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삼 층 크기의 별관을 한 채씩 세워 총 세 채의 건물이 야트막한 담장 안쪽에서 품(品) 자를 그리며 서 있었다.
담장에는 붉은 꽃송이가 주렁주렁 덩굴에 매달려 있었다. 꽃이라기보다는 열매를 닮은 모양새가 퍽 어여뻐 시선을 빼앗겼다.
마차가 활짝 열려 있는 너른 문 앞에서 멈추기에 훌쩍 먼저 마차에서 내려 일행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부친과 모친의 손을 잡아 내리는 것을 돕고, 두 아해는 번쩍 들어 땅에 내려 주었다.
마중 나온 것이 분명한 세르벨 가 사람들의 면면이 모두 낯이 익었다.
세르벨 백작이 부친에게 와 반가이 인사하며 포옹하기에, 나 또한 내게 다가오는 놈을 안으며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 품에 안긴 놈이 머뭇거리다가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그를 놓아주었다.
“잘 지냈어, 미카엘? 어쩐지 좀⋯ 밝아진 것 같네.”
“덕분에. 로건 맞지?”
“⋯너 진짜⋯ 아카데미 입학했다더니 성격 많이 좋아졌구나.”
로건 세르벨은 어쩐지 감격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시어런의 방식대로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다섯 살 남짓하던 어린 시절부터 오래 보아 온 녀석이라 어색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여겼건만, 로건의 눈에서 어색함을 읽어내고 잠시 의아하였다.
하긴, 해마다 겨우 한 번씩 마주했던 놈이다. 중간에 그가 안부를 전하겠다 찾아와도 둘이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나야 중원의 동무들을 해를 건너 한 번 만나는 일이 흔하였으니 지금처럼 오랜만에 보아도 친밀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곳 시어런의 소년 소녀들은 쉬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는 했다. 나와 감상이 다를 법도 하였다.
그간 내가 로건 세르벨과의 교류를 위하여 노력한 것이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삼 년 전에 그가 보냈던 편지에 지금이라도 답장을 할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백작은 부친을 챙기고, 백작 부인은 모친을 챙기고, 로건은 나를, 레일라는 아스델을, 에반은 미하엘을 챙겼다.
이렇게 보니 저 가문도 우리와 꼭 같이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은 것이 마치 짠 듯하였다.
그들의 막내 에반 세르벨이 태어났을 적에 동생을 갖고 싶다 부친을 졸라 미하엘을 얻어낸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그저 마음이 급하여 가족과 후손을 많이 갖고 싶은 마음에 세르벨 가의 다복함을 부러워하여 꺼낸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잘한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오랜만에 뵙지요? 아카데미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축하 인사를 아직 드리지 못했군요.”
“감사합니다. 세르벨 백작님.”
어른들끼리의 인사를 모두 마친 듯 세르벨 백작과 백작 부인의 시선이 내게도 돌아왔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간단한 묵례와 함께 겸양 인사를 곁들였다. 일전에 했던 인사들과 크게 다른 바가 없어 가타부타 말을 덧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백작의 인도를 따라 본관에 들어섰다.
우리에게 본관을 양보하겠다는 말에 부친이 한 차례 사양했지만, 세르벨 가의 법도가 그렇다고 하니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세르벨 가는 동편의 저택을 사용할 터이니 찾을 일이 있으면 시종에게 언질을 주라는 말에 그러마 하였다.
침실과 응접실, 식당과 휴게 공간을 소개받은 뒤에는 여독을 풀어야 한다며 자리를 파했다. 세르벨 백작 내외는 자리를 떴지만, 아이들은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시종과 시녀들이 짐을 옮기는 동안 아이들은 기운차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일곱 살 난 미하엘보다 겨우 한 살이 더 많은 에반 세르벨이 의젓하게 미하엘의 손을 잡고 저기엔 그네가 있다, 저기에 있는 놀이 기구가 재미있다 이것저것 일러주는 것이 어여뻤다.
아이들을 구경하는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던 로건 세르벨이 꺼낸 첫마디가 또 우습기 짝이 없었다.
“⋯그, 연무장은 없지만 공터 정도는 있어. 안내해 줄까?”
“크흠!”
크게 웃으면 안 될 것 같아 헛기침을 하여 숨기려 했으나, 내 얼굴이 이미 웃고 있어 큰 의미가 없었다.
로건 세르벨이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민망해하기에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아니,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차였다. 가족 여행이니만큼 수련에 몰두할 생각은 없지만 새벽 시간에는 심심할 것 같아서. 안내해 줘, 로건.”
“⋯그래.”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아.”
“아, 어, 그게⋯. 언제부터 나를 이름으로 불렀어?”
“음?”
녀석이 영 어색한 표정을 하고 있기에 건넨 물음에 곧장 질문이 되돌아왔다.
내가 소년을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던가? 생각해 봤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하긴,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의 나는 쉽게 말을 놓았으되, 공공연한 자리에서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자칫 헷갈려서 민망한 상황이 일어날까 걱정이 되었던 탓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제 이름을 불러달라 졸라대던 몇몇 이름자가 기억에 어설프게 남아 있었다.
단비 역시 그러한 소년 중에 하나였을 터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불러달라 조르니 대강 입에 붙는 대로 별명을 지어 붙인 것이 분명하였다.
“예전에는 다른 아이들이 많아 샘을 낼까 싶어 그랬다. 네 이름은 알고 있었어, 로건 세르벨. 자주 봤고, 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도와줬으니까.”
“⋯와, 아, 아니. 그랬단 말이야⋯? 이거 엄청 영광인데⋯. 아, 이쪽이야.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나가는 게 더 빨라. 피크닉을 즐길 수 있게 일부러 넓게 계획해 둔 구획이라서 꽃나무가 적은 편이거든.”
“음.”
녀석의 뒤를 쫓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꽃나무들이 이리저리 어울려 심겨 있었다. 희고 붉고 푸른 꽃이 대중없이 얽혀있는 모양새에 시선을 빼앗긴다.
로건 세르벨이 걸음이 빠르지 않아 걷다 보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로건은 나보다 반 뼘 정도 컸다. 또래 사내치고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내 생일 연회에서 마주했을 때에는 상당히 쾌활한 녀석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둘이 보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 꽤 쑥스러움을 타는 놈인 모양이었다.
지나치는 꽃나무의 이름자나, 근처에 있는 호수까지의 거리, 호수에서 할 수 있는 놀이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늘어놓는 녀석의 말을 자르고 나 궁금한 것을 먼저 물었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지? 열다섯이 넘으면 다들 짝을 찾는 파티에 가야 한다고 하던데.”
“⋯.”
무어라 대답을 하려던 로건 세르벨이 혀를 씹어 양손으로 제 입을 딱 가리기에 그저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녀석의 얼굴과 목덜미가 토마토마냥 새빨갛게 익었다. 작년보다 그을렸는지 안 그래도 까무잡잡한 소년의 얼굴이 먹물을 옴팡 뒤집어쓴 듯했다.
“아, 그⋯ 그게. 음, 조금, 여러 일이 있어서⋯.”
“여러 일?”
“으응. 그냥 개인 사정으로⋯ 이번에는 만나지 않는 게 좋다고⋯.”
“상대가 그렇게 말한 것이야?”
“⋯그으, 건 아닌데⋯.”
짝이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인데 그가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벌건 낯을 보고 있자니 더 물어볼 마음이 들지 않아 입을 다물어 주었다. 어물거리던 로건 세르벨이 곧 다른 화두를 꺼내었다.
“아카데미 생활은 좀 어때? 친해진 친구들은 많아?”
“음, 꽤? 일단 쉐이든 로제랑⋯.”
“⋯! 드디어?”
“음?”
“아, 아니. 로제 영식이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노력 많이 했었잖아. 그래도 아카데미에서는 꽤 친해졌다니까 좋네.”
“⋯그 아이가 나랑 친해지려고 노력했다고?”
그야 꾸준히 생일 카드에 제 이름자를 적어 보내기는 하였었으나, 그 이외의 일은 금시초문이었다.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던 로건 세르벨이 의아한 표정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 그랬지. 설마 기억 안 나?”
“전혀. 내게 말을 걸었어?”
“⋯백 번도 넘게 말을 걸었을걸.”
“⋯음.”
나에 대한 이야기는 좀 더 들어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로건 세르벨이 나의 교우 관계에 대해 생각 외로 깊게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적당한 거리에 놓여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로건은 조금 헐떡였는데, 내가 빠르게 걸은 탓인 것을 뒤늦게 알아 조금 민망하였다.
로건은 손수건을 꺼내어 자신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두어 번 톡톡 두드리더니 양손으로 그 손수건을 곱게 쥐었다.
하는 모양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얌전하여 괜히 나 또한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게 되었다.
“쉐이든과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게 있어?”
“어어?”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자존심 상해 할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신경 써주는구나, 이제.”
로건의 표정이 마치 이제야 사람이 되었네,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멋쩍어 내 짧은 머리칼이나 헝클어뜨려 쓸어 넘겼다.
로건 세르벨은 잠시 고민하다가 당사자니까 괜찮겠지,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