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6화 (66/176)

66.

시어런 제국의 도로는 매우 잘 닦여 있었다.

각 영지는 다스리는 자의 성격과 통치 이념에 따라 그 모양새가 약간씩 달랐으나, 넓은 도로를 선호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영지는 조금이라도 더 경작하기 위하여 사잇길을 좁게 내는 편이지만, 도심에 가까운 곳은 마차 다섯이 한 번에 지나갈 수도 있을 만큼 넓은 길을 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언덕길은 사람이 살지 않는 야트막한 동산이었는데도, 그 길의 너비가 마차 두 대는 엇갈려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각 영지를 잇는 사이사이에는 대략 반나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너른 공터가 드문드문 있기 마련이었다.

따로 관리하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길을 건너는 나그네들이 저들 필요할 적마다 풀을 베고 너른 땅을 다져 그 위에서 불을 피우고 땅을 덮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생겨난 공터였다.

수렵과 야영 시간을 주로 보냈던 시어런 아카데미의 내부 공터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였다. 해마다 수업을 듣는 이들이 공터 근처의 풀을 베고 나무를 꺾어 잘 정돈해 한 학기를 사용하였다.

다음 학기의 학생은 방학 동안 웃자란 풀을 베어내야 한 학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어런 제국의 수도는 시어런의 중심부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에른하르트 영지는 수도로부터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 가고 있는 세르벨 백작가의 영지는 수도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따뜻한 기운을 받고 자란 식물들이 에른하르트의 것보다 잎이 넓고 색이 짙었다.

이번 여행에 따라온 기사들의 수는 총 열 명으로, 저택에 도착해서는 다섯씩 교대로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나머지 다섯은 휴양지를 즐기는 것으로 약속해 두었다.

시종 시녀들도 엇비슷한 방식으로 일하기로 했기 때문에 넓은 공터가 좁아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먼 길을 떠날 적에는 주로 커다란 솥을 걸어 스튜를 끓이는 것이 보통이라 하였다. 아해들을 데리고 구경을 하겠다고 옆에 섰다.

모닥불 세 개가 간격을 두고 피워져 있었고, 둥그렇게 생긴 철 받침대 위에 커다란 솥을 흔들리지 않게 올려 두었다. 세 개의 다리로 묵직한 솥을 지지하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받침대가 유용해 보였다.

“이건 무엇이지?”

“잘 끓인 물에다가 가지고 온 채소와 육포, 건량을 넣고 소금과 향신료로 간을 맞춘 것입니다. 밀가루를 개어 만든 반죽을 많이 넣으면 국물이 끈끈해져 맛이 더 좋아집니다.”

“오빠, 나 이거 먹어보고 싶어!”

“간을 좀 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그래도 되겠나?”

“물론이죠.”

주방장은 손바닥만 한 그릇에 생으로 먹어도 괜찮을 법한 잎사귀 채소 몇 장과 국물 조금을 담아, 숟가락과 함께 내주었다.

국물을 후후 불어 아스델에게 먼저 맛을 보게 하고, 미하엘에게도 한 수저 떠먹였다.

나도 맛을 보니 야채와 고기가 들어간 맑은 탕과 다르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이런 야외에서 제대로 된 뜨끈한 국 한 사발 먹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담아 고맙다 인사하자, 아해들도 지저귀듯 맛있다, 좋다, 얼른 먹고 싶다, 하고 귀여운 소리를 쏟아냈다.

주방장을 비롯하여 요리하던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주변의 풀꽃들을 구경하다가 식사하라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재게 놀렸다. 적당히 동무들끼리 둘러앉은 사용인들처럼 나 또한 가족들과 둘러앉았다.

이동식 테이블에 얹은 커다란 그릇에서 숟가락만 사용하여 스튜를 떠먹었다.

정말 오랜만에 먹는 기자(*수제비)였다.

이 탕에 연근이나 죽순을 좀 썰어 넣으면 딱 좋을 것을. 익숙하고 그리운 맛에 절로 애달픈 기분이 들어 과식을 하게 되었다.

다 먹고 두 번을 더 청해 세 그릇이나 먹고 나서야 배 속이 그득하여 수저를 내려놓았다.

정비를 마치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 * *

배가 불러 노곤해진 아해들과 얽혀 한잠 자고 일어나니 밤이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탓에 객잔 일 층의 식당에서 먹는 식사는 좀 더 간단히 하였다.

아스델은 양친이 데리고 자고, 미하엘은 내가 끼고 자기로 하였다.

양친은 온 가족이 다 함께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면 하는 기색이었으나 그렇게 큰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스델이 매번 내가 미하엘만 챙기는 것 같다며 볼멘소리를 내었으나, 남녀가 유별한 것을 차근차근 설명하니 다 듣지 않고 앵 돌아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족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을 적에 내가 생각했던 것과 지금 하는 일이 다르기는 하였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 식솔이 마차를 타고 어디 괜찮은 곳에 유람을 가면, 그나마 노지에 익숙한 내가 다른 이를 대신하여 나뭇가지를 꺾어 불을 피우고 사냥해 온 토끼나 멧돼지 따위를 구울 생각을 하고 떠난 길이었다.

중원에서 어린 아해들을 데리고 본가로 돌아갈 적에 종종 그러했듯이.

지금 생각하면 우스갯소리도 되지 않을 말이었다.

태어나기를 귀하게 태어나 많은 이들의 시중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들인 것을, 그들의 성정이 선하고 품행이 바르고 얌전하기에 종종 잊곤 하였다.

여행이라기보다는 호화로운 유람에 가까운 일들은 하나하나가 새롭고 낯설었다.

싫지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중원에서의 내게 여행이란 방랑과 같은 말이었다.

내 한 몸 지킬 자신이 있으니 검 하나 허리에 차고 여기저기 떠도는 길에 어느 산이 풍광이 좋다 하면 훌쩍 구경을 가고, 또 어느 강이 그렇게 아름답다 하면 멀찍이 서서 한참을 바라보는 것이 보통의 일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좋았던 적이 많지 않아 좋은 음식은 먹지 못하였다.

무림맹에 들를 일이 있을 적마다 동정호(*중원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 앞에 세워진 높은 누각에서 차 한잔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은 좋아했다.

그렇게 앉아있으면 제갈 그 친구나 모용 그 친구가 무슨 청승을 부리는 중이냐며 소란스레 다가와 이런저런 요리를 시켜주고는 하였다.

동정호에서는 특히나 병어 요리가 유명했다. 하여, 흰 생선 살을 잘 빚어 튀긴 완자나 붉은 양념을 하여 푹 찐 것을 화주(*독한 술의 한 종류)와 곁들여 먹고 있으면 세상 부러운 일이 없었다.

천마대전이 끝나면 그때 멀리 유람이라도 가자고 했던 놈이 있었는데, 그치가 무당에서 온 놈인지, 화산에서 온 놈인지 영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다.

일찍이 사귀었던 오대세가의 놈들은 천마대전이 시작할 무렵에는 산 놈보다 죽은 놈이 더 많았으니 구파일방의 녀석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였다.

졸리다 칭얼거리는 미하엘의 몸을 답삭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쩐지 흰 살 생선 요리가 먹고 싶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조금은 한스러웠다.

그 밤 꿈에는 잊은 지 오래된 동무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갈 놈의 머리가 희끗희끗하지 않고 까맣고 반드르르 한 것을 보고 꿈인 것을 알았다.

어여쁜 낯을 한 모용 아무개가 접선을 살살 부치며 이켠을 넘겨다보았다. 그의 누이와 함께였다. 그 옆에 오룡삼봉 놈들이 젊은 얼굴을 뽐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성정은 순박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과격하고 무식하여 가까이하지 않으려 애썼던 황보 놈과 팽가 놈이 저쪽에서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반걸음 다가섰을 때, 발끝에 무언가 축축한 감촉이 전해져 걸음을 멈추었다.

시꺼먼 강이 그들과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음.”

들리는 소리가 없기에 소리를 낼 수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흘린 침음성이 천둥처럼 우렁우렁하였다.

발끝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삼도천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 저편에 서 있는 낯익은 이들 말고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삼도천의 근처에는 나무가 하나 서 있어, 그 나무에 옷을 벗어 걸어두면 남녀 노인이 나타나 살아생전에 쌓아두었던 업을 가늠하여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았을 때, 별안간 선행을 해야 한다며 동냥을 하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던 당가 놈이 해 준 말이었다.

그럼 이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아닌 것인가 생각하며 술렁이던 마음 한켠을 쓸어내렸다.

저들이 있는 곳이 저승이고 내가 선 곳이 이승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모를 일이란 생각이 꿈처럼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리운 얼굴들은 펄쩍펄쩍 뛰기도 하고, 팔을 흔들기도 하고, 손짓을 하기도 하였다.

어느 놈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였는데, 그 녀석의 가슴팍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았던 내 심정으로는, 기왕에 꿈에 나온 거 좀 웃는 얼굴을 보여 주지 싶었다.

안력을 힘껏 돋우어 녀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었다.

젊은 놈도 있고 늙은 놈도 있었다. 모두 나와 가장 친밀하던 시절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운 마음이 물씬 일었다.

문득 알았다. 전쟁이 끝나고 강호 유람을 하자 칭얼거린 놈이 무당 놈이었구나. 쓰게 웃었다. 녀석은 나보다 보름 먼저 죽었다.

나는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를 부르려 손짓하던 놈들도 팔을 내렸다. 울던 놈은 웃었고, 웃던 놈은 울었다.

저들과 얽혀 살았던 모든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지만, 이런 허상에 흔들릴 만큼 마음의 수양이 얕지는 않았다.

과거는 과거에 두어야 아름답고, 지금을 살아야 현재가 보람차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내 꿈속에서나마 그 강을 건너 이켠에 선 이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평범하게 죽었으나 이렇게 좋은 땅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내가 알고 지내던 동무들 중에 그런 행운을 얻은 이가 한둘쯤 더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때, 첨벙. 물 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강물 속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이쪽을 향해 헤엄치는 놈은 시꺼먼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살펴보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그저 개꿈이다, 헛일이다. 그리 생각하려 하여도 어쩐지 마음 한켠이 수런거렸다.

그 서슬에 잠에서 깬 미하엘의 이마에 입술을 누르며 아이의 등을 토닥거렸다. 새근새근 달큰한 숨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내가 지킬 것은 여기 시어런에 있었다.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던 꿈속의 나를 책망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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