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4화 (64/176)

64.

사람은 셋인데, 열 명이 둘러앉아도 좋을 만큼 거대한 원탁이 온실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그 위를 덮은 흰 테이블보가 푸른색으로 칠해진 접시들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 큰 몫을 했다.

넓고 커다란 접시에 각종 요리들이 태산처럼 높이 쌓여 있었고, 개인 접시에 덜어갈 수 있도록 요리마다 집게가 깃발처럼 꽂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린 돼지의 몸통에 칼집을 내어 바삭하고 윤기 나게 구운 것이었다.

부드럽게 삶아 얇게 저민 사슴 고기 위에는 향신료를 듬뿍 쓴 흰 소스가 얹혀 있었다.

실로 동동 묶어 잘 구워낸 이름 모를 새 고기의 품에는 조그마한 크로켓이 들어있었다.

접시의 수가 십수 가지가 넘었다.

푸릇한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고기가 지나치게 많았다.

과일과 야채를 좋아하는 미하엘은 여즉 잠에 취해 눈을 부비적거렸다.

아이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오늘, 누구 생일이야⋯?”

“큰 도련님이 처음으로 방학을 맞아 돌아오신 것 아닙니까. 주방 사람들이 큰 도련님을 많이 그리워했던 모양입니다. 그간 돌아오시면 해드려야지, 했던 요리들이 이렇게나 가짓수가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아아⋯! 맞아! 오리 로스는 형이 좋아하는 거야.”

“저도 좋아하고, 우리 작은 도련님도 좋아하시죠. 그릇에 덜어드릴까요?”

“응!”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하여 싹싹하게 대답한 벤터스 경이 아이의 식사를 챙겼다.

소박한 식사 자리가 될 줄 알고 아이는 내가 챙길 터이니 시중을 들지 않아도 된다며 사람을 물렸던 나는 머쓱하게 내 몫으로 윤기 나는 갈비 석 점을 접시에 끌어왔다.

달고 부드러운 음식에 길든 몸이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음식들도 그 맛이 뛰어났으나, 새로 태어나 십여 년간 몸에 익은 집밥만은 못하였다. 먹다 보니 절로 손이 빨라졌다.

접시 곁에 놓인 그릇에 잘 발라낸 짐승의 뼈가 그득하게 쌓였다.

질긴 것은 부드러워질 때까지 잘 끓여 조리하고, 부드러운 것은 흩어지지 않도록 데치듯 삶아 뜨거운 소스를 끼얹어 잔열로 익히는 수가 대단하였다.

푸성귀들도 파릇하여 입에 잘 맞았다. 과일과 야채를 한데 섞어 레몬 향이 물씬 나는 소스에 푹 적신 샐러드가 산뜻했다.

과연 내 입맛을 잘 아는 이들이다 싶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중원에 있을 적에는 이런 귀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혼자만 이런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불편하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중원과 달리 시어런은 비옥한 땅이 많았고 굶는 이가 적었다.

나는 마음 놓고 양껏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미하엘이 상상할 수 있는 시어런 아카데미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어, 벤터스 경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것을 듣는 편이 아이에게도 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사귄 동무들과 그들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한 이들과 어떤 놀이를 하며 노는지도 이야기했고, 황자와 황녀의 성격과 그들과 함께 비도술 연습을 한 이야기도 했다.

내가 듣는 수업의 교수들은 모두 말투가 독특하다는 이야기도 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교수의 이름이 마엘로 샌슨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숙한 질문을 받았다.

“마법을 배우셨다고요? 검술을 배우겠다고 가셨으면서?”

“겸사겸사 재능이 있는지만 보려 하였지. 마나를 유도하는 법은 배웠으되, 수식에 외워야 할 것이나 계산해야 하는 것도 많아서 나와 잘 맞지는 않았어.”

“형, 마법 쓰는 거 보고 싶어!”

“지금? 으음.”

앤젤라 스팅 교수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했던 것이 아닐까?

식사 자리에서 갑작스럽게 마법 요청을 받은 검술부 학생이 곤란하지 않게 시연할 수 있는 마법식을 알려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기꺼이 마나를 끌어올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 앞의 포도 주스 잔을 든 채로 수식을 따라 그었다.

결집, 방열, 침잠, 냉각, 축소⋯ 그리고 알파.

멀리서 끌어온 마나가 푸른빛을 띠고 중단전을 따라 돌았다가 진보랏빛 액체에 스며들었다. 포도 주스의 가운데에서 얼음꽃 결정이 피어올라 그 옆으로 번졌다.

술식의 단순한 모양새에 비하여 효과가 뚜렷하여 알아보기 쉬웠다.

사그락거리는 자잘한 얼음이 된 포도 주스를, 디저트 스푼으로 휘휘 저어 미하엘의 앞에 내려놓았다.

졸지에 식사 중에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게 된 아해의 낯에 환한 빛이 반짝 어렸다.

“우와! 우와! 형은 마검사야?”

“할 줄 아는 마법은 하나뿐이지만,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지.”

“⋯와, 방금 수식 시전 속도가 무척 빨랐던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원래도 단순한 수식이야. 이 수식 하나만 줄곧 연습해서 더 그렇고.”

“소드 마스터 전에 대마법사가 되시면 어떻게 합니까⋯?”

“농담도.”

미하엘이 파드득 놀라 디저트 스푼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제 형은 반드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기사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하여간 이놈도 저놈도 아이 놀리는 데에 진심인 것이 우스웠다.

“흥미가 없다고 하지 않아. 이번에 좋은 교수님을 만나 검술에 큰 진전이 있었으니, 목련 기사단에도 이런저런 것을 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야.”

“진전이 있었다니 축하드립니다. 큰 도련님께 사사를 받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유난히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날 놀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였다.

한숨을 삼키며 고기의 살을 잘 발라 미하엘의 접시 위에 얹었다. 아이는 안심한 기색으로 고기를 집어삼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영광이야.”

“너는 왜?”

“형에게 사사 받게 되어서.”

나는 잠시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나는 시어런과는 맞지 않는, 혹독한 방식으로 사람을 가르쳤다.

당장에 연무장을 도는 것도 겨우 하는 미하엘에게 몇 시간 동안 기마 자세를 유지하게 시킨다거나 삼재검법을 익히게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체력과 근력이 상당하여 내 고된 수련을 따라올 수 있는 기사들과 미하엘을 비교하는 일은 괜히 아해에게 상처만 줄 것이 뻔했다.

또한 아해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은 기사의 길이 아니라 장부를 다루는 경영인의 것이라 머뭇거렸다.

“검술은 여덟 살은 되어야 익힐 수 있는 것이래도.”

“형은 다섯 살부터 검술을 수련하였다면서?”

“그야, 나는⋯ 네 말대로 천재였으니까. 어릴 적부터 검 외에 다른 것은 다룰 수 없을 것 같아 일찍이 꿈을 정했단다. 하지만 난 네가 검을 익히는 것도 좋고, 포도를 구분하는 것도 좋고, 숫자 계산을 잘하는 것도 좋아 당장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미하엘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아이의 접시 위에 뼈를 잘 바른 고기들을 얹어 주며 얼른 벤터스 경에게 눈짓하였다.

내 의도를 읽은 그가 곤란한 기색으로 자신의 광대뼈를 검지로 긁적거리더니 짧게 웃고 어깨를 으쓱했다.

“큰 도련님이 둘째 도련님에게 질까 봐 무서우신가 봅니다.”

“음?”

“어어?”

나는 미간을 좁혔고, 미하엘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어!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됩니까? 미하엘 도련님은 벌써 다섯 자리 덧셈까지 하지 않습니까. 큰 도련님이 무서워할 만하지요. 이제 검술도 익히면 큰 도련님보다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되실지도 모릅니다. 기왕이면 뭐든 빠르게 익히는 게 좋긴 하죠.”

“싫어! 형이 가르쳐주는 게 좋단 말이야.”

“작은 도련님이 큰 도련님을 가르쳐 줄 수도 있지 않아요?”

내게는 벤터스 경의 말이 어디까지나 이죽대는 것으로만 들렸는데, 생각 외로 효과가 좋았다. 미하엘은 검술에 대한 관심을 바로 거두어 버렸다.

그러나 기겁하여 도리질하는 아해를 보자 나는 되려 무척 의아해졌다.

미하엘이 나를 앞서고 싶어 하는 마음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서로의 모습을 선생이자 경쟁자로 삼아 끊임없이 비교하고 저울질하게 되어 있었다.

가장 좋은 아군이자 가장 훌륭한 적수로 여김이 마땅했다.

나를 따르는 것은 좋았으나, 나를 조금도 뛰어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미하엘의 접시에 얹기 위해 손질하고 있던 양갈비를 입에 밀어 넣고 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미하엘 네가 나보다 빨리 고수가 될 수도 있지 않겠니.”

“하지만, 나는 형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은걸. 형이랑 계속 사이좋게 지낼 거야.”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나는 당황하여 아이를 돌아보았다. 발갛게 홍조가 어린 귀엽고 볼록한 뺨으로는 알 수 없던 깊은 마음이었다.

무심코 잡은 아이의 손끝이 차게 식은 것에 놀라 손으로 문질러 열을 전해 주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우린 계속 사이가 좋을 것이야. 누가 그런 말을 했어.”

“누가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알았어. 형이 나를 무척 예뻐하는 걸 알면서, 형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고 싶지는 않아. 난 그냥⋯ 내가 형이 좋아하는 걸 잘하면⋯ 형이 날 더 많이 예뻐해 줄 것 같아서 해 보고 싶었던 거야.”

이미 어미와 아비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는 일곱 살배기 어린애가 할 말은 아니었다.

벤터스 경도 나만큼이나 당황하였는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분위기가 묘해진 것을 알아차린 아이는 씩씩한 태도로 뼈가 없는 고기 살점 하나를 잡아다가 자신의 접시 위에 얹더니 서툰 칼질로 고기를 잘랐다.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리는 모습이 제 아비를 닮았다.

“그러니까 형도 알아 둬. 나는 나이를 더 먹어도 형의 것을 빼앗지 않아.”

“그게 내 것이 아니면?”

이번에 단단히 말해두어야겠다 싶어 냉큼 대꾸하였다. 미하엘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이켠을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감싸 쥐고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내가 검술만 익히고 싶고 다른 것은 좀처럼 하기 싫어서, 다 놓고 도망가고 싶다고 엉엉 울면 어찌할 테야. 그러면 미하엘 네가 가문을 이어받아 주어야 하지 않겠어?”

“⋯아, 안 돼! 형, 가면 안 돼. 그럼 미하엘도 못 보는데 괜찮아?”

“안 괜찮겠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게야. 오래 살다 보면 다 그렇게 된단다.”

“⋯!”

아이는 당혹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 눈물을 닦아주며 슬쩍 말을 덧대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것을 미하엘 네가 대신 해 주면 계속 같이 살 수도 있지 않겠어.”

“⋯.”

나는 부모의 유산과 에른하르트의 대를 잇는 이름을 미하엘에게 주고 싶었다.

아주 이전부터 그랬다. 양친을 진짜 부모로 여기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진정한 에른하르트가 맞는지를 간혹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하엘이 물려받아야 할 것을 가로채버린 꼴이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아이가 냉큼 고개를 끄덕일 줄로만 알았다.

미하엘을 너무 어리게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미하엘은 자신이 썬 고기 한 점을 내 접시 위에 얹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을래. 형도 나도 아직 어려서, 지금은 뭐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형이 나중에 마음이 바뀌지 않게 된다면 그때 들을래.”

벤터스 경이 딱 벌렸던 입을 닫으며 내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넓은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미하엘의 작은 몸을 끌어다 품에 꼭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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