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미하엘을 보듬으며 모친과 부친의 해맑은 낯을 가만히 떠올렸다.
연신 웃음을 쏟아내던 가엾고 어여쁜 것들을 대하는 일은 부모로 공경하기보다 아끼는 조카 손주를 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만 해도 그래. 겨우 놀러 가자는 말에 그렇게 놀라 기뻐하는 태가 귀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무도회라도 가는 마냥 온 가족이 같은 빛의 옷을 차려입고 외출할 생각으로 설레던 어미의 낯이나, 평소 근엄한 체 점잔을 떨던 아비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여 안달하던 일을 떠올리자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샜다.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잠든 아이를 힘주어 꼭 끌어안았다.
푹신한 거위 털 이불에 파묻힌 탓인지, 곤히 잠든 탓인지. 미하엘의 체온이 평소보다 뜨끈하니 높았다.
가족과 함께 보낼 두 달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 벌써부터 아까워 하루하루를 어찌 보내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 * *
여행은 여행이고, 단련을 쉬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하던 대로 가문의 연무장으로 나섰다. 내가 아카데미로 떠나간 뒤에도 꾸준히 아침 훈련을 했던 모양인지 쉰 명의 기사들 중 열다섯이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익숙한 면면들을 향해 인사를 건네자, 무리 중 일부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들 사이에서 은전이 오가는 모양새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인의 길을 걷는다면서 진중한 기색이 없는 그들을 탐탁잖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서로를 존중하고 걱정하는 섬세한 성정의 기사들은 이 자유롭고 온순한 영지에 잘 어울렸다.
“봐, 우리 도련님은 분명 제시간에 나올 거라고 했잖아.”
“설마 아카데미에서도 내내 새벽같이 나와서 수련했어요?”
“말해 뭐 해, 입만 아프지. 그렇죠, 도련님?”
“그래, 그랬다.”
에른하르트 백작 가문의 기사단은 목련 기사단이라고 불리었다. 친조부가 있는 백작저의 기사들과 지금 내가 사는 소백작저의 기사들이 서로 가깝게 지낸다 하였다.
그들은 연에 몇 번 함께 훈련을 하기도 하고, 일정 주기로 단원들을 교환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가정을 꾸리지 않은 기사들은 좀 더 잦은 주기로 두 영지를 오가면서 어느 쪽이 더 자신에게 맞는 일터인지 고른다고 하였다.
가문에 속한 기사들이 하는 일은 대체로 저택의 보안과 경비, 그리고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일이었다. 자연히 뭇사람들의 동경을 받았다.
꾸준히 몸을 수련하는 이들 특유의 멋들어진 품새가 사람들의 눈을 쉬이 사로잡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장한 몸을 지니고 일정한 월봉을 받는 것도 자랑으로 삼을 만했다.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스스로 종자를 자청하여 가문의 휘하로 들어왔다.
대단한 무골이 없어도 여덟 살에서 열 살 남짓한 나이부터 잔심부름을 하며 몸을 수련하면 삼류무사는 될 수 있었다.
더 훌륭히 정진하여 이류무사 정도의 수준이 되면 각자 모시는 주군에게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기사의 작위는 단승 작위로, 자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가문의 수장이라면 누구나 직접 기사의 위를 내릴 수 있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의 나는 이 연무장에서 몸을 빚었다.
팔과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일정 거리를 달렸다. 목검을 쥐고 삼재를 그었다.
단순하게 보일 수련만 한 것은 덜 자란 몸에 기초가 부족한 탓도 있었겠으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저도 훈련을 하겠다고 나온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다.
가문의 기사들은 내 속도에 맞추어 함께 훈련장을 달려주거나 검을 같이 휘둘러 주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 나 또한 기사들의 자세를 보아주고 함께 검식을 궁리하였다.
그러다 보니 절로 그들과 가까워졌다.
저들이 모셔야 할 주인의 아들이니 하대하라 몇 번을 권하기에, 다른 사용인들을 대하는 것과 달리 말을 편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혈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친근하고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클로버 로렌스 경은 대단한 노력가였다.
그는 내가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류 무인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십 년을 채우기도 전에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
시어런의 자연이 품은 기운이 맑고 기를 여러 방법으로 활용하는 수업을 듣고 자랐다는 것을 감안하여도 괜찮은 속도였다.
약관에 불과하던 로렌스 경은 이제 이립에 가까운 몸으로, 다섯 해 전에 모친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 중 하나와 에른하르트 소백작 저 연회장을 빌려 혼인을 치렀다.
혹여나 제 상관들에게 들킬까 수줍게 염려하며 몰래몰래 방에 숨어드는 것을 몇 번이나 보고도 모르는 척한 보람이 있었다.
은전들을 주머니에 갈무리한 로렌스가 이켠으로 다가오며 벙긋 웃었다.
“오늘도 도련님 덕분에 큰돈 벌었습니다.”
“데이지 양에게 가져다주려고?”
“그대로 가져다주는 것도 좋지만, 기념으로 꽃 한 송이 정도 같이 사 가려구요.”
장난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마주 웃었다.
일터에서 시작된 연정이라 유독 애틋한 건지, 일하는 시간에는 서로가 보고 싶어도 꾹 참아야 하기에 더욱 안달이 난다 주절거리는 것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연무장에 자리를 잡고 섰다. 기사들도 익숙하게 각자 서로의 검이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적당히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다들 어찌 훈련했나?”
“간단히 몸을 풀고, 도련님께서 가르쳐 주신 삼재검법을 가로베기, 세로베기, 찌르기 각각 오백 번씩 하는 것을 한 회로 삼았습니다.”
“오백 번?”
“예, 그렇습니다.”
“⋯.”
“⋯아니, 도련님 계실 때도 그랬잖아요? 천 번씩 하면 오후 근무에 차질이 있으니까 횟수를 조정해 주겠다고 하신 지 벌써 몇 년은 되었는데요.”
“몇 년은 된 일이잖아. 이제는 오백 번 정도는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텐데.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면 좀 더 욕심을 낼 줄도 알아야지.”
“그야 그렇지만⋯.”
주저하는 녀석이 너댓 명은 되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안주한 녀석들이었다. 당장에 몸이 괴로운 것을 참아내지 못하면 강한 경지는 요원한 일인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삼류, 이류 수준일 적에야 좀 더 강해지고 싶어 열심히 하였으나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뒤에는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여 훈련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의 나라면 크게 꾸짖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지 않고서는 그 목숨줄 붙여놓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독촉하고 혼을 내어 내 말을 듣게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급한 마음을 꾸며내려 해도 조급하지가 않았다.
“싫은 녀석들은 두고, 하고 싶은 이들만 기본 훈련을 천 번씩 하자. 오늘 하는 것을 보고 새로이 배운 검식을 알려 주도록 할 테니까.”
“예에?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와, 아니⋯. 큰 도련님이 시어런 아카데미에서 이상한 걸 배워오신 것 같은데.”
일전에 창천무애검을 견식하고 개중 일부를 배운 적이 있었던 기사단원들은 투덜대면서도 자세를 잡았다. 게으르던 놈들마저 눈을 빛내는 모습이 마음에 뿌듯하게 찼다.
기본 검식의 수련부터 내공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검식과 보법 등을 손수 골라내어 차근차근 내 손으로 가르쳐 여기까지 키워 낸 녀석들이었다.
내가 이들을 제자로 여기어 아끼는 연유가 있었다.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죽는다고 엄살을 부렸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첫 휘두르기가 시작되자마자 기사들 모두가 진지한 표정을 했다.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히 딛고 선 녀석들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검이 가야 하는 길을 따라 그었다.
바르고 바르다. 옳고 옳다. 그 반듯한 선이 긋는 도가 마음에 들어찼다.
조용하고 차분한 검이 어여쁘고 기특하여 자꾸만 벙싯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그들의 앞에 마주 보고 서서 나 또한 삼재를 그었다.
동시에 속으로 수를 헤아렸다. 그저 내 훈련을 하는 이와 가르치는 이는 이렇게도 기분이 달랐다.
마엘로 샌슨의 표정을 흉내 내어 은은히 웃는 낯을 하고 한 녀석씩 차분히 살펴보았다. 간간이 지적할 적마다 녀석들이 일부러 우는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나를 시어런 아카데미까지 배웅한 적이 있었던 이안 벤터스 경이 개중에 그나마 나았다.
이안 벤터스 경은 이제 마흔셋이 된 남성으로, 목련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직을 맡고 있었다. 익살스럽게 웃을 줄 알고 말씨와 행동에 여유가 넘치며, 어깨가 넓고 근육이 강건했다.
절정의 고수였다.
일개 영지의 기사로 남기에는 과분한 무위였으나, 종자 시절부터 에른하르트의 비호 아래에 자라 온 그는 빛나는 충성심을 꺾지 않아 가문 내에서 충분한 존경을 받는 사내였다.
절정의 고수에게 삼재가 어렵게 느껴질 리 만무하건만 그는 시종일관 진중한 태도로 훈련에 임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마엘로 샌슨의 훈련법을 고스란히 따라 가르치고 싶었으나, 아직 나의 경지가 부족하니 이렇게 보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려치기 오백 번은 가뿐하게 하던 이들도 천 번에 이르기 좀 전에는 자세가 연신 흐트러졌다.
그것을 다잡아 주느라 시간이 꽤 지나, 나머지 두 조도 마찬가지로 삼재를 연습한 뒤에는 날이 훌쩍 밝았다.
다음에 이어 하자 약속을 하고 자리를 파했다. 다들 얼른 씻고 아침을 먹자 하며 우르르 숙소로 이동했다. 나 또한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내 뒤를 따랐다. 벤터스 경이었다.
“무슨 일인가?”
“아뇨, 기왕 멀리 다녀오셨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우리 큰 도련님 키가 얼마나 자랐는지도 궁금하고. 아카데미 생활은 어땠는지도 말씀해 주셔야죠.”
“뭐⋯.”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집으로 돌아온 것이 실감이 났다. 그러나 가까이 선 그의 육중한 몸에서 폴폴 땀내가 나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씻고 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자. 오늘 아침 훈련에 나온 걸 보니 벤터스 경은 금일 오후 근무인 모양이야?”
“예.”
“그럼 아침 식사를 같이 하도록 하지. 미하엘과 동석하여 셋이서.”
“예!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아침 식사에 고기를 꼭 올리라고 주방에 언질해 두겠습니다.”
“⋯그래.”
새삼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아침 식사부터 고기라니. 하여간 저 큰 몸이 쉽게 만들어지진 않았을 터였다. 주방의 인물들 모두가 함께 빚어낸 몸이었다. 흐뭇하게 웃었다.
중원에서야 도를 닦는다, 기를 수련한다 하여 벽곡단(*폐관수련할 적에 주로 사용하는, 곡식 따위를 뭉쳐서 만든 식사 대용 알약)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잦았다.
허나 어릴 적에 잘 먹고 잘 자란 이들이 몸이 더 큰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음식을 가리지 않는, 깔끔하고 매너 있는 방식으로 엄청난 양을 먹어 치우는 대식가였다.
내가 아는 한 포크를 가장 날렵하게 사용하는 무인이기도 했다. 혹여나 포크로 대련하는 무술대회가 있다면 벤터스 경이 우승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였다.
그런 연유로 어릴 적의 나는 벤터스 경과 함께 식사하며 그의 넘치는 식욕을 닮고자 노력하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덮어 놓고 많이 먹는 것보다 적절한 양을 섭취하고 운동량을 늘리는 것이 내게 더 맞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지만, 벤터스 경과 식사하는 일이 낯설 일은 아니었다.
아침 식사를 온실에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시종이 전했다.
막 씻고 나온 나는 아직 오래 걷기에는 몸이 덜 자란 미하엘을 한쪽 팔에 얹고 온실을 찾았다. 그리고 식탁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나와 벤터스 경의 식사를 준비할 때 주방의 인원들이 혼신의 힘을 쏟아내어 풍성하게 꾸려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간만이라 그런지 무척 과하여 아주 우스웠다.
미하엘의 탄성과 손뼉이 귓전에 짜랑짜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