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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2화 (62/176)

62.

영 헤어지기 싫어 미적거리는 루베르를 2학년 기숙사 앞까지 배웅해 주고 나서야 내 기숙사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미 짐을 다 싼 쉐이든 로제가 식사부터 하자 하기에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는 말에 물어보니, 꼭 필요한 물건만 가지고 돌아가고 나머지는 방에 그대로 남겨 둘 생각이라 하였다.

교복이야 돌아와 입었을 적에 그 품이 맞으면 입고 아니면 다시 아카데미에 반납할 생각이니 굳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으며 나머지 옷들도 마찬가지다 하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또한 생각해보니 방학 동안 연습할 때 사용할 비도들과 늘 갖고 다니는 검 한 자루 정도만 챙기면 될 것 같았다.

짐을 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걸 알자 루베르와 함께 보낸 시간이 더 이상 아깝지 않았다.

가뿐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와 귀가할 준비를 마저 하였다.

시어런 아카데미에 갓 입학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여름 방학에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협객행을 하기에는 모자란 실력이어도 내 혈족이 머무르는 주변에 위험한 것이 있다면 영물이든 산군이든 베어 넘기리라 굳게 다짐하며 불쑥불쑥 일어나는 괴로운 걱정을 삭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무사히 끝마치고 다음 학기에 신청할 수 있는 수업들이 적힌 유인물을 받아 쥔 지금은 본가로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겠다 하는 여유작작한 생각만 가득하였다.

지난 여름날 에른하르트 가의 식구들이 바닷가나 호수 구경 가자는 것을 몇 차례나 거절한 것이 아쉽고 미안했다.

혹여나 미숙한 몸을 가진 내가 혈족을 지키지 못할 일이 있을까 저어하여 멀리 나가는 것을 꺼렸던 때의 일이다.

중원에서도 젊은 날에는 친우들과 함께 좋은 산수를 구경하며 세상을 거닐던 때가 있었다.

자주 어울리던 놈들 중에서 제갈 아무개란 이가 있었는데, 그는 귀한 술로 목을 축이며 시조 읊조리는 일을 유난히 즐겼다.

높은 전각에 이런저런 음식을 차려 두고 술잔을 기울이면 신선이라도 된 것마냥 우쭐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내 외우고 있는 몇 자 안 되는 시조도 모두 그때 배운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일들도 모두 협객행 중에 있던 일이라, 배를 채우던 중에 검 들고 뛰어드는 것들을 베어 넘기느라 애를 먹긴 하였으나⋯.

거친 일, 힘든 일은 모조리 젊은 시절에 두고 나이를 먹은 덕택에 시간이 흐른 뒤 머리칼 희끗해진 동무들과 이야기할 적에는 우스운 일들만 연거푸 입에 올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이제는 괜찮을 터였다.

내 실력이 미흡하더라도 혈족들의 몸과 마음이 상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 마음이 놓였다. 미하엘과 아스델, 두 어린 아해를 데리고 어디로든 나가 구경을 하겠다 단단히 마음먹었다.

가는 길이 중간까지 같은 쉐이든 로제와 함께 마차를 타고 본가 저택으로 향했다.

* * *

칠 주야를 길에서 흘려보낸 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 땅에 났을 적에 내 키가 훌쩍 작아진 것을 실감하지 못하여 이 너른 장원을 까마득하게 여겼던 날이 떠올랐다.

대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반겼다.

“형!”

“오빠아!”

마차에서 내려 온전히 두 발로 서게 되자마자 작달막한 것들이 활처럼 날아와 안겨 들었다.

미하엘이 먼저 내 품을 차지하자, 제 오라비 하는 것은 모조리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아스델이 나를 부르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해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양팔에 하나씩 낚아채듯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볼 적마다 더 씩씩해지는구나, 우리 아들.”

“그럼요. 양친께서 건강히 낳아 주신 덕분입니다.”

양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이며 가문의 기사들이 웃는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또래들보다 의젓한 말씨를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웃음을 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이 나이를 먹고 철없이 구는 것보다는 그저 주변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아 넘기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 마음을 쓰지 않았다.

아이들을 어르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크게만 느껴지던 장원은 시어런 아카데미에 비하면 하잘것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소림에 다녀 와 남궁의 장원을 보았을 때 꼭 이런 감상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아무리 대단한 건물도 큰 것에 비하면 작은 법이다. 내가 익히고 배워 넓어진 세상만큼 좁아진 저택을 보고 있자니, 이 울타리를 고집한 것이 새삼 민망했다.

양친의 말에 공손히 답하고, 아해들의 재재대는 소리를 받아 주며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유독 분홍빛과 흰빛을 많이 쓴 화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나는 모친이 에른하르트가 아니라 발렌티아였던 시절에, 외숙부가 단지 그녀를 닮았다는 이유로 온 거리의 꽃들을 쓸어 모은 일을 알았다.

일전에 모친은 부친의 눈을 닮은 붉은 꽃을 좋아한다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화원의 꽃들은 부친과 외숙부의 취향일 것이다. 생각하니 우습다.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정원의 한켠에 놓인 흰 테이블 아래에는 내가 사용하였던 것과 닮은 계단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미하엘의 몫이고 하나는 아스델의 몫이다. 나를 따라 하는 것을 세상 제일의 과제로 삼는 아이들이 일찍이 주변인의 도움을 거절한 흔적이었다.

이 땅에서 첫 숨을 틔우고 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내 팔에 하나씩 올라앉아 저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아해들을 안아 든 채로 화원을 지나쳤다.

여름에는 햇빛이 따가워 바깥보다는 실내 정원에 머무르는 것이 좋았다.

달고 차가운 음식들을 내어 오게 하고 정원 한켠에 있는 큼지막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동생들은 내려놓지 않고.”

“아직 가뿐합니다. 버릇이 나빠질까 싶어 그러시는 거면 내려 주겠습니다.”

“으으음, 아니. 오랜만이니까 그냥 두어도 괜찮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제대로 의자에 앉기로 약속하자. 미하엘, 아스델. 아빠랑 약속해 줄 수 있지?”

“네에!”

“네!”

엄한 목소리를 꾸며 내려던 부친이 결국 아해들의 싹싹한 대답을 이겨내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나는 의자에 앉아 양 허벅다리에 아이 하나씩을 얹혀 둔 채로 이 몸의 양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일전에 이미 나누었던 이야기들이었으나,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성적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도 처음 듣는 것이라 할 얘기가 많았다.

가족들은 내가 빙결 마법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에는 깜짝 놀라고, 아직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에는 와르르 웃었다.

너무 급하게 가지 않아도 괜찮다 달래어 주는 목소리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어깨가 가뿐하였다.

“그리고⋯ 이번 여름에는 가족들끼리 여행이라도 다녀왔으면 합니다.”

“와아!”

벼르고 벼르던 말을 꺼내놓자, 양친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해들이 신이 나 까르르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매달렸다.

아해들이 의자에서 떨어져 나뒹굴지 않도록 단단히 허리를 잡아 주었다.

중원에서는 무인이 아닌 이들이 먼 길을 떠나 유람하는 풍습이 없었다.

큰 흉사를 당하여 몸을 피하는 것도 아니고, 악적을 쫓아 멸할 것도 아닐진대 익숙한 고향 땅을 떠나 먼 길을 갈 일이 어찌 있겠는가.

그렇기에 일가족이 함께 멀리 떠나자는 말이 어색하고 불안하였다. 멀리 놀러 가자 하는 말은 모두 단호히 거절했다.

때문에 여름에도 겨울에도 에른하르트 소백작 가의 혈족들은 백작가 영지 내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하루 반나절 머물렀다 돌아오는 것을 휴식으로 여겼다.

그러면서도 종종 아쉬운 목소리로 바다를 보자, 호수를 보자, 강을 보자 하며 졸라 대던 양친의 마음이 애틋하였던 것을 뒤늦게나마 알았으니 더 미룰 일이 아니었다.

내가 차근차근 내어놓는 말을 들으며 부친과 모친의 얼굴이 꽃처럼 피었다.

참으로 어여쁜 모습이었다.

“우리 아들을 조기 입학시킨 보람을 이런 데서 느끼는구나.”

“가족 여행이라니! 어쩜 좋아, 어디로 가지? 역시 여름이니까 바다가 좋을까요?”

“세르벨 가문의 별장 중에 괜찮은 것을 빌릴 수 있을지 물어보는 것이 좋겠어. 오늘 당장 전보를 보내면 일주일 내로는 출발할 수 있겠지?”

“피서지에서 입을 옷을 준비해야겠어요. 내일 재단사를 부를게요. 얇은 천으로 짓는 옷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부친과 모친이 수선을 피우는 것이 멋쩍어 내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이나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내 그동안 그토록 심한 짓을 하였나 싶어 반성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아해들이 각기 저들이 그림책에서 보았던 바다니 호수니 강이니 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대하여 떠드는 것을 귀가 얼얼할 때까지 들어 주었다.

* * *

사방이 조용한 와중에 작고 가쁜 숨소리가 색색 들려오는 것이 생경하였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형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며 옆구리에 달라붙는 미하엘을 떼어 둘 수 없었다. 양친의 허락을 받아 오늘 하루만 곁에 끼고 자겠다 하여 얻게 된 밤이었다.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은 것의 보들보들하고 결 얇은 검은 머리터럭을 매만지며 평온에 젖었다.

중원에서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여겨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 준 일이 없었다.

이 아이가 숨을 쉴 적마다 새근새근 전해져 오는 숨소리나 심장 박동 소리는 몇 번의 생을 거듭 살아도 잊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 있는 내 방은 무척 넓었다.

시어런의 형편 좋은 귀족가들은 혈족들의 방을 크게 만들었다.

방은 아카데미 기숙사와 엇비슷한 형식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그보다 성대했다. 응접실에는 세 개의 문이 자리했는데 각각 침실, 욕실, 개인 서재로 이어졌다.

침구 또한 기숙사의 것보다 훨씬 양질의 것이라, 오랜만에 내 침실에 들어와 누우니 푹신한 구름 위에 올라앉은 양 몸이 편안하였다.

밋밋하고 하얗기만 하던 아카데미 기숙사의 천장과 달리 내 방의 천장에는 여러 가지 문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언가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고, 그저 아름다운 꾸밈을 위한 장식이었다.

한 귀퉁이에서부터 찬찬히 문양을 헤아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중 가장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내 옆구리에 찰싹 붙은 이 어린 아해를 어찌 키워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제 배로 아이를 낳은 모친이 알게 된다면 웃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한 평생 이렇게 내 아들인 양 생각되는 아해는 처음이었다.

내 앞으로도 혼인을 하지 않을 걸 생각하면 소백작의 칭호를 이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이 마땅했다.

또한 화경을 목표로 정진해 단승 작위를 갖게 된다면 구태여 필요 없는 작위나 칭호를 내 이마에 달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나는 영지를 꾸려나가는 일도 사교 활동을 하는 것도 내게는 퍽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여겼다.

아이에게 일을 맡길 생각이라면, 그 일로 말미암아 생겨날 과실도 함께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하는 마음이 뚜렷하였다.

내가 부친과 모친의 친아들이라는 생각을 좀 더 강하게 하였다면 양보가 없었을까 하는 주책맞은 생각도 불쑥 들었다.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막연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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