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1화 (61/176)

61.

자리에 앉아 얌전히 마엘로 샌슨을 기다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담임 교수가 아이들을 교실에 불러 모아두고 이런저런 안내를 하는 것이 순서라고 들은 때문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맞추어 이미 각 과목의 교수들과 마무리 인사를 한 바 있었으나, 내심 마지막으로 마엘로의 얼굴을 보고 종강하고 싶었기에 무척 기뻤다.

저들끼리 동그랗게 모인 아해들이 마엘로 샌슨이 오기를 기다리며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 방학에 어디를 갈 것이라느니, 누가 여는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니 거기에서 만나자느니 하고 훗날을 기약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방학이란 것을 처음 겪어 보는 내게는 그 모든 것이 마냥 신기했다.

중원에서도 유난히 더운 날에는 멱을 감으러 나섰고 추운 날에는 방 안에 화로를 피우고 휴식을 취했다. 허나 명절이 아닌 이상은 이렇게 다 같이 쉬는 일이 없었다.

중추절 같은 큰 행사를 치를 적에야 손님 대접을 받으며 먹고 놀기는 하였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곳 시어런에서도 어린 아해들에게 제 짝을 찾으라고 한데 모아 두는 것이지, 나이 많은 이들에게도 연휴를 이리 오래 주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리 좋은 세월이라 하더라도 마냥 놀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드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굳이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나다닐 수 있는 고수인 마엘로 샌슨은 교실에 들어설 때만큼은 헛기침하는 고승들처럼 인기척을 질질 흘리고 다녔다.

아이들이 저를 쉽게 눈치챌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 티가 났다.

그 소리에 시끄럽던 아해들이 입을 딱 닫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다들 시험은 잘 봤나?”

그 짓궂은 인사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괴로운 척을 하였다.

겨우 두 번의 시험 기간을 거쳐 본 나였으나, 시험이란 것이 늘 그랬다. 잘 봤어도 더 잘 볼 수 있었을 것만 같아 아쉽고, 못 봤으면 못 본대로 후회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해들의 불만스러운 기색을 읽으며 허허 웃고 있자니 마엘로 샌슨 교수가 교탁을 탁탁, 부드럽게 두드려 소란을 진정시켰다.

“알겠다, 알겠어. 안 물어볼게. 성적표는 6월 중으로 입학식 때 적어 낸 주소로 발송될 예정이야. 혹시 집 주소가 바뀌었다면 오늘 안에 학과 사무실에 가서 변경 신청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 또 방학이라고 들떠서 위험한 곳에 가지 않도록 하고⋯.”

몇 가지 안내를 하는 것을 얌전히 앉아 들었다. 지금껏 그의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였으나 마엘로 샌슨을 계속 보고 있자니 괜히 가슴 한켠이 술렁거렸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화경의 경지에 오른 뒤 아해들을 돌보며 노년의 삶을 보내는 것이 참 멋스러웠다.

한평생 심심하게 심산유곡을 떠돌아다니는 것보다야, 나이 들어도 저 찾아 줄 어린아이들 수십을 거느리고 그들의 안부를 챙기는 삶이 더 구미에 맞았다.

직전제자를 하나 두고 그 아해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좋겠으나, 이렇게 많은 아해들을 돌보고 신경 쓰다 보면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 매일이 즐거울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엘로 샌슨과 눈이 마주쳐서 빙긋 웃어 주었다.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라, 어두운 밤에는 믿을 만한 어른과 동행해라, 연회의 초대장의 인장이 옳은 문양을 하고 있는지 꼭 귀족 연감을 확인하고 연회에 참석해라 등등 지켜야 할 일이 많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학생들을 위해 식당 안내와 공용 시설의 이용 시간까지 읊어준 마엘로 샌슨이 힘 있는 목소리로 끝맺음 인사를 했다.

“이렇게 말해도 안 들을 녀석들은 안 들을 거 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방학 중에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하고 싶은데 마땅한 상대가 없다면 시어런 아카데미 앞으로 전보를 날리도록 해. 우리 반 녀석들은 내가 챙길 테니까.”

나는 그 말에 깊이 감동하였다. 본디 그렇게 안내하도록 교칙에 정해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데서 오는 깊은 안도에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검술부 1학년 동기들과 이런저런 인사를 하였다.

얼굴과 이름을 외운 아해들도 있었고, 얼굴만 알고 있는 아해들도 있었으나 다들 다음 학기에 다시 웃는 얼굴로 볼 것을 다짐하며 악수와 포옹을 나눴다.

중간까지 가는 길이 같아 함께 마차를 타기로 한 쉐이든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기숙사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또 루베르 그 아이였다.

아이의 흰 뺨 위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선약을 한 것도 아니고, 방학식이 언제 끝나는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기다린 기색이 역력한 그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안녕하세요, 선배. 여긴 어떻게⋯?”

“아, 그냥. 이제 곧 방학이니까⋯, 집에 가기 전에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쉐이든은 잠시 나와 루베르 황자를 번갈아 보다가, 싸야 할 짐이 많아 먼저 갈 테니 저녁 식사 즈음에 다시 만나자 하였다.

인사 한마디 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여겨 기다리라며 쉐이든을 붙잡았으나, 그저 제가 그러고 싶다 하는 말에 보내 주었다.

루베르와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시험 기간에는 공부하느라 바빠 잠시 소홀하였다고는 하나 루베르 황자와는 금요일마다 비도술 연습을 하며 꾸준히 시간을 같이 보낸 전적이 있었다.

매주 목요일에는 고급 검술 수업이 끝난 뒤에 벤자민과 루실라, 맷 니코를 끼워 함께 식사도 자주 하였다.

그런데도 소년과 얼굴을 마주 보고 멀뚱히 서 있으니 딱히 꺼낼 말이 없었다.

음식을 먹는 중도 아니고 비도를 연습하는 중도 아니었기에 그랬다.

그저 방학 잘 지내라, 방학 끝나고 건강히 다시 보자 하고 다른 아해들처럼 손 인사를 하거나 악수 한 번 나누면 될 일을, 뭐 이렇게 샅샅이 사람을 뜯어보고 서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기색의 소년을 살피다가, 일전에 내게 황궁의 비사를 일러 준 것이 걱정되어 그러나 싶어 입을 열었다.

“좀 걷겠습니까?”

“그래,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냉큼 대답이 돌아왔다.

시어런 아카데미 내에는 걸을 곳이 정말 많았다.

일전에 한 번 신세를 진 일이 있던 연못가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걷고 있자니 제 머리꼭지가 루베르의 어깨 언저리에 닿았다. 나보다 훨씬 어린 아해를 올려다봐야 한다니. 늘 있는 일이지만 허리 굽은 노인이라도 된 양 기분이 묘했다.

그도 저도 하루하루 눈 감았다 뜰 적마다 몸이 자라는 나이였다.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어디로 가겠다 하는 마음 없이 걷는 것이라 보폭을 넓게 하여 찬찬히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서 앉을 자리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묵묵히 더 말을 덧대지 않고 루베르의 흰 뺨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이 가까워 더운 바람이 불었다.

빤히 바라보자 시선이 맞닿았다. 검술 수업 때에도 종종 마주했던 눈이다. 이렇게 가까이 보고서야 그 눈동자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까맣고 반들거리는 것이 꼭 바둑알을 닮은 눈이다. 그러니 볼 적마다 울먹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리라.

생각하니 우스워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할 말이 있어 부르신 것은 아닙니까?”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

“음, 그럴 수도 있지요.”

믿을 만한 동무를 사귀었다 생각하면서도 의심해야 하는 마음을 입 밖에 내어야 하는 속이 어찌 편할까. 어린 것이 안심할 수 있도록 얼러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적당히 대답하여 넘기고 생각에 잠긴 척 다리 난간 위에 두 손을 얹어 기댔다. 루베르도 나를 따라 꼭 같은 모양새로 난간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 있자니 일전에 소년을 처음 인지하였던 때의 기억이 났다.

마음을 다스리려 애를 쓰던 새벽의 일이었다. 그 꺼먼 눈을 울먹이며 옆자리에 따라붙어 졸졸 쫓아오던 까만 고양이 같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가 들은 이야기를 쉬이 밖에 내돌리는 성격은 아닙니다.”

“⋯어?”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지는 알겠으나,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말을 곱게 돌려 하는 방법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제 속내를 들킨 것이 민망한지 안 그래도 큼직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낯을 붉히는 소년을 올려다봤다. 당황할 것은 알았으나 이리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를 달래려 팔뚝 어림을 툭툭, 두어 번 두드렸다. 무뢰한에게 손목을 붙잡힌 여인이라도 되는 양 기겁하는 것이 우스웠으나 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아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시면 모르는 것으로 좋습니다. 그냥 제가 그런 성격이라 알고 계시면 됩니다.”

“그, ⋯모르는 건 아니야. 아닌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고 곱던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처음에는 양 뺨만 붉던 것이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난, 그냥⋯. 방학이 되면 에른하르트 영식을 못 볼 테니까,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영식은 시어런 황실 무도회에도 안 올 거고⋯ 그 뒤의 티타임에도 초대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사내끼리 할 말은 아니었다. 수줍어하는 아해의 낯에 잔뜩 민망한 기색이 스민 것을 바라보며, 귀한 피를 타고났다 하여도 여즉 어린 아해인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동기간의 사이가 좋고 나쁨에 일희일비하던 시절이 훌쩍 지난 내게는 이런 일에 감격할 마음이 남아 있지가 않았다.

그러나 겨우 내게 네가 귀한 이다 하는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하지 못하여 끙끙 앓다가 여기까지 따라왔을 소년을 생각하면 쉽게 웃어넘길 수 없었다.

사내끼리 이 무슨 낯간지러운 짓인가 하면서도 아해의 말에 달게 답해 주고자 마음먹었다. 연못도 보고, 하늘도 보고 하다가 최대한 온건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저도 뵙고 싶을 겁니다, 선배님. 방학이 끝나 돌아오면 식사라도 한 번 하지요.”

“⋯그래.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방학 중에도 종종 선배님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으응.”

이 여리고 딱한 것을 어쩌면 좋을꼬.

어쩐지 안타까워져 풀이 죽은 녀석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소년은 화들짝 놀랐지만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저 나름대로 다정히 인사한다고 한 것이 중원에서 쉬이 하던 겉치레와 크게 다르지 않아 소년이 상심한 듯하여, 시어런의 방식대로 다정히 손등을 도닥이며 말을 더했다.

“선배님께서 절 친밀히 여겨 주시는 것도 기쁩니다. 두 달간은 못 보겠지만, 앞으로 아카데미에서도, 졸업 후에도 꾸준히 함께 할 동무이니만큼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을 뿐입니다.”

“⋯.”

루베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고, 나는 이 아해의 순한 성정이 귀여워 웃음으로 답했다.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눌 동무를 잃기 싫어, 겁이 난 아해를 달래기 위하여 그날 오후에는 적잖은 시간을 함께 산책하며 보냈다.

쉐이든이 눈치가 빨라 이 아해가 이렇게 여리게 굴 것을 미리 알았던 게 분명했다.

확실히 그 어린 것이 나보다 혜안이 있는 것 같아 절로 감탄이 일었다. 과연 가까이 두고 본받을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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