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60화 (60/176)

60.

정인에 대한 이야기는 정인에 대한 것이고, 당장에 내게 더 중한 것은 혈족들에게 전해 받은 편지에 대한 것이었다.

서둘러 해치우듯 읽고 싶지 않은 마음에 초급 검술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겉봉에 적힌 이름자만 몇 차례 훑어보고 나온 차였다.

금일 오후 내내 편지를 보겠다 하는 말에 함께 식사하던 동무들이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미카엘은 상당히⋯ 가족적인 편인 것 같아요.”

“보통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으음. 물론 저도 부모님께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긴 한데⋯. 서로 그렇게 애틋하게 구는 편은 아니거든요⋯. 제가 형제자매가 없어서 모르는 걸지도요.”

“저도 언니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인데, 으으으으음. 미카엘만큼은 아니에요.”

“⋯.”

이반이 괴로운 표정으로 묵묵하게 고개를 가로젓기에 다들 와르르 웃음을 쏟아 내었다.

일전에 쌍둥이 동생에게 주겠다 하며 밝은 대낮에 빛을 내는 램프를 샀던 이반은 램프에 대한 보답으로 작년 달력을 받아왔다고 했다.

누가 더 쓸모없는 물건을 구매하였는가에 대한 열띤 논쟁은 그 달력에 작년 가족 행사들을 빼곡하게 적어 놓은 앨런 홀모스의 정성을 알게 되어 끝이 났다.

이반의 장렬하고도 우스운 패배였다.

각자 자신이 받은 편지의 발신인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마리앤 필로덴도르는 일전에 에드윈과의 대련이 시작되기 전 그녀의 언니와 손을 잡고 서서 나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마리앤과 꼭 닮은 얼굴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와 두 살 터울이라느니, 두 동생도 마법의 재능이 있는 것 같아 학비 고민을 하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가문인 필로덴도르 남작가는 마법 아티팩트의 유통에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워 기억해 두기로 하였다.

데미안 크리스토퍼는 쉐이든 로제와 건너 건너 이웃인 크리스토퍼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데미안과 쉐이든이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된 연유를 이때 슬쩍 물어 들을 수 있었다.

둘은 서로 나이가 같고 엇비슷한 크기의 영지를 물려받을 예정이라 어릴 적부터 가족끼리 서로 자주 보며 지내 온 모양이었다. 덕분에 사이가 끈끈해졌다고 하였다.

데미안은 여동생 하나가 있는데, 요사이 동생이 변덕스러운 기색을 보여 걱정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반 홀모스는 자작가의 넷째이며, 서무부에 있는 쌍둥이 형제 앨런 홀모스가 다섯째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위로 있는 형과 누나들은 이미 훌쩍 커서 첫째 누나는 혼인을 하였고, 둘째 누나는 멀리 다른 왕국을 여행 중이며, 셋째 형은 나랏일을 하고 있다 하였다.

부모님은 연세가 많아 첫째 누나가 가문을 운영하고 있으며, 형이 학비를 보태어 준 덕분에 아카데미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셋째의 편지에는 꼬박꼬박 답신을 하여야 한다는 말이 유쾌하고 즐거웠다.

제니는 부모님이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 농장 일을 한다고 하였다.

유난히 똘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웃들의 눈에 띄어, 시험이라도 한번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조언해 준 덕분에 혼자 수도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 년을 공부한 끝에 시어런 아카데미 입학시험에 합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부모와는 연에 한 번 얼굴을 보고 있는데, 입학과 동시에 아카데미 측으로부터 충분한 학자금과 지원금을 받고 있어 부모에게 손 벌릴 일은 없어 다행이라 하였다.

시어런 아카데미에 평민들이 여럿 입학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제니의 이야기가 마냥 신기하였다.

내가 흥미를 보이는 것을 알고 제니는 잠시 고민하다가 제 사정을 조금 더 상세히 일러 주었다.

옆에 있는 다른 동무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경청하기에 나 또한 얌전히 들었다.

“시어런 제국의 평민들은 다섯 왕국의 평민들보다 문맹률이 낮은 편이라고 해요. 하지만 워낙에 땅이 넓어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마차 삯이 비싸기 때문에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사는 일이 흔하죠. 저도 외동딸이 아니었다면 수도로 유학 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말문을 연 제니는 평민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다수의 귀족들이 사업을 한다며 종이 위에서 숫자 놀음을 하고 사람을 부리는 동안, 대다수의 평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꼬박 일하고 잠을 청한다 하였다.

주에 닷새 일하는 것은 사정이 좋은 이들 뿐이고, 농민이나 어민 등은 따로 휴일을 두지 않고 매일 일하다가 여유가 날 적에 쉰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제니는 나이 많은 이웃이 나이 어린 귀족에게 공대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 모습을 보고 저 또한 공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어린 나이에 일찍이 책을 읽고 공부를 시작했다 하였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단승 작위를 받지만,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경우에는 더 높은 단승 작위와 정착 지원금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녀의 부모님이 노후에 꾸준히 일하는 대신에 수도로 와 그녀의 봉양을 받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꿈이라는 말을 듣고 적잖이 감탄하였다.

효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에 눈이 부셨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일 년을 온전히 공부에 쏟을 수 있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시느라 부모님의 한 해가 얼마나 궁핍했을지는,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잘 알고 있어요.”

“⋯음.”

“그래도 지금은 성적 장학금의 일부를 나눠 부모님께 보내드릴 수 있어서 뿌듯하기도 해요. 제 나이에 벌써 이만한 돈을 버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이삼 년을 공부하는 이들도 있다는 말에 생각이 많아졌다.

야영 수업 동무들이 각자의 방에서 가족의 편지에 대한 답신을 작성하겠다 하기에 나 또한 방으로 들어왔다.

서재에 앉아 혈족들의 편지를 차근히 읽어 내리려 했으나 머리가 어지러워 큰 창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오 층짜리 기숙사에서 내 방은 사 층에 있었다.

이것은 나의 친조부가 백작의 작위를 갖고, 나의 부친이 소백작의 칭호를 달고 있기에 거저 받은 것이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 한 번도 생활고를 겪은 일이 없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학비가 비싸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중원의 민초들은 굶주린 날이 배부른 날보다 많았다.

크게 벼슬하는 이들과 큰 상인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민초는 나라님 눈을 피하여 화전을 일구고 사냥을 하여 근근이 하루를 살아갔다.

그러다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흑도나 산적, 수적이 되기도 하였다. 제가 당장에 죽겠으니 남을 죽여서라도 살아야겠다 하는 행세였다.

중원에서도 나는 대남궁세가의 이름자를 달고 있어 곤궁한 일이 없긴 하였다. 그때 내 주머니에 든 것은 금자(*금화)가 아니라 은자(*은화)였으나 굶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객잔에 들어서면 값싸게 입에 댈 수 있는 만두와 소면을 주문하는 일이 잦았으나 구걸하는 거지들에게 큼직한 만두 하나 쥐여 주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소림에서 수학하였다는 땡중을 벗으로 둔 적이 있었다.

그는 세상 만물의 모든 것이 부처의 뜻이라 하였다. 굶어 죽어가는 아해의 가슴 속에도 부처가 있고, 저 높은 가마를 타고 지나는 관리에게도 부처가 있다 하였다.

전생의 덕이 모자라 후생에 덕을 쌓고, 전생의 덕이 높아 후생에 그 덕을 덜어내게 되어 있다는 궤변은 굶주린 이들의 처절한 삶을 관조할 뿐, 구원하지 않았다.

이곳 시어런에서도 귀천은 분명하다.

이곳의 신이 귀한 인물과 아닌 인물을 분명히 나누어 따진 탓이었다.

제 은애하는 이를 되살려 보겠다고 하다가, 마음에 차지 않으니 다 버리고 달아난 것을 신으로 모시고 있지 않던가.

중원에 비하면 이곳 시어런은 얼마나 안온하고 평화로운가 생각하다가도,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을 보고 있자니 정녕 이것이 부처의 뜻인가 하였다.

제가 중원의 삶을 놓았을 적에 이 땅에 태어난 까닭이 무엇인지가 새삼 궁금하였다.

이렇게 귀한 땅에 귀한 몸을 입고 태어난 것이 전생에 무슨 덕을 쌓은 탓이라면 차라리 기쁘게 받았을 것을, 마음에 닿는 선행이 기억나지 않아 마냥 어렵기만 하였다.

덕을 쌓았기에 이렇게 태어난 것인지, 덕을 쌓으라고 이렇게 태어난 것인지 따위를 고뇌하다가 창을 연 채로 다시 책상에 돌아와 앉았다.

당장에 제게 가장 귀한 이들을 헐하게 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답신을 적기 위하여 잉크에 푹 적신 깃펜의 사각거리는 감촉이 붓과 달리 단단했다. 그 감촉이 새삼 낯설어 인사말 한 줄 적는 데에도 적잖이 망설였다.

* * *

주말은 언제나 그랬듯이 공부를 하는 데에 썼다.

5월이었다. 1학년 1학기의 마지막 달이기도 하였고,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는 달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한 차례 중간고사를 겪은 덕분에 이전처럼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내심 이론 시험을 보지 않는 마엘로 샌슨의 방식이 참으로 감사하여, 다음 학기에도 그의 수업은 전부 듣기로 결심하였다.

시험이 있다 해도 샌슨 교수가 화경의 교수이기에 졸졸 그의 뒤를 쫓을 심산이긴 하였으나, 정말 다행이었다.

마법 수업에서는 앤젤라 스팅 교수가 기말고사로 내가 빙결의 수식을 얼마나 매끄럽게 진행하는지 시험하겠다고 하여 머리를 깊이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때 난 이미 앤젤라 스팅 교수의 도움 덕택에 서투르게나마 혼자서도 빙결 수식을 빚어낼 수 있었기에 걱정이 덜했다.

교양 세계사 시험은 중간고사와 완전히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하였다. 루베르가 시험 문제로 나올 법한 것을 몇 가지 짚어 주어 그것들 위주로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것을 옆에서 본 쉐이든이 나중에 말하기를, 루베르 황자가 황위에 오르지 않더라도 그를 지지할 마음이 든다 하기에 크게 공감하였다.

제국의 계보 수업이야 일전과 같이 휴강도 없고 매주 쪽지 시험을 볼 터이니 유인물을 주의 깊게 보는 것으로 족할 터였다.

그래도 매일 비실비실하던 아그리젠트 교수가 근래에 건강을 많이 회복했는지 꼿꼿이 걸어 다행이라 여겼다.

연금술과 야영 수업 또한 중간고사와 같이 과제를 제출하면 된다 하였다. 미리 제니가 꼼꼼하게 필기한 것을 복사하여 나누어 주었기에 따로 시간을 빼지 않고서도 과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첫 주에 가장 먼저 이 과제를 완성하자며 아해들이 입을 모은 덕분에 그들의 기운에 업혀 갈 수 있었다. 내심 좋은 조원을 만난 일에 대하여 한 번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마나와 오러 수업의 시험 방식 또한 중간고사와 동일하였다.

이제 나는 정해진 줄글을 그대로 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주어진 문제에 답을 적을 때 쉐이든과 데미안의 힘을 빌리는 것은 여전하였다.

늘 도움만 받는 처지라 이 은혜를 어찌 돌려주어야 할지가 걱정이라 하였더니, 가까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하는 대꾸가 돌아와 마음이 기뻤다.

그렇게 정신없는 한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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