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초급 검술 시간에는 안전한 대련을 위하여 지녀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연설을 들었고, 연금술과 야영 시간에는 아이들과 둘러앉아 야생에서 구한 재료로 여러 가지 야영 도구들을 만드는 법을 연습하였다.
같은 학년의 학생이 백이십 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나를 유난히 적대하였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역시 마리앤 필로덴도르가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닌 것인지 수업에 들어오는 모든 동기들이 내가 에드윈과 화해한 일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흥미를 품고 이것저것 묻는 대신에, 참 잘 됐다, 잘했다 적당히 반기어주고 화두를 돌리는 행동과 태도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덩굴 그물을 손으로 엮으면서 이런저런 수다로 바쁜 아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길쌈하는 아낙이라도 된 것마냥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손재주가 없는 것을 이때 다시 깨닫게 되었다. 다른 아해들의 것보다 내 그물의 모양새가 배로 엉성하여 절로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미카엘. 왜 그렇게 매듭을 꽉꽉 짓고 그래요. 약간 느슨하게 묶어야 이쪽을 잡아당길 때 이렇게, 모양이 잡힌다니까요.”
“⋯낙낙하게 묶는다고 한 것인데, 이게 검을 쥐는 것과 달라서.”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요? 마법도 이거랑 다르거든요?”
“법학부에서도 덩굴 엮는 법은 안 배웁니다.”
“봐요, 데미안은 이렇게 잘하는데!”
장난스러운 타박에 웃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에 나도 살짝 웃고 말았다.
내 손에 쥔 것을 경영부의 이반 홀모스가 가져가서는 꽉 묶인 매듭을 낙낙하게 여유를 두어 풀어 주었다.
무언가를 자르고 부수는 것에는 익숙하였으되 이렇게 만들고 꾸미는 일은 영 낯설기만 하였다.
매양 장포 휘감고 싸울 자리 찾아다니면서 민초들을 괴롭힌다 소문이 난 악적들을 붙잡아 죽이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농군은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어민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다는 건 알았으나 어떤 씨를 언제 뿌리는지, 그물을 어떻게 짓는지 따위는 신경 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농군이나 어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또 달랐을까.
손끝에 까끌까끌하게 달라붙는 덩굴을 세 갈래로 나누어 다시 차근히 꼬아 엮었다.
한참 나를 타박하던 마리앤은 제 몫의 덩굴 그물을 다 만들어 두고, 덫을 만들기 위한 새끼줄을 꼬기 시작하였다.
하여간 입도 빠르고 손도 빠르고 눈도 빠른 아해였다.
“시간 정말 빠르네요. 다음 주부터 다시 시험 기간이 시작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래도 중간고사를 겪고 나니까, 대강 과목별로 출제 경향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안심입니다. 예상 문제를 봐도 시험을 치르기 전에는 괜히 불안했거든요.”
“와, 데미안이 법학부 수석 노리고 있다는 말이 정말인가 봐요. 벌써 자신감이 넘치네요.”
“하하. 법학부는 전부 다 수석을 노리고 있어요. 아무래도 다들 목표로 하는 곳이 같다 보니까, 성적도 비슷비슷한 편이고⋯. 그러니까 잘 좀 도와주세요. 교양 수업 점수들도 무척 중요하거든요.”
“그럼요. 들어 보니까 세드릭 교수님 시험은 매번 엇비슷한 주제의 과제로 대체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는 미리 준비되어 있으니까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이 영광을 우리의 꼼꼼한 영웅 제니와, 힘센 토끼 미카엘에게 바칩니다.”
“예?”
잠자코 있다가 난데없이 엉뚱한 소리를 들어 고개를 들자, 와르르 웃음이 쏟아졌다. 대화에 끼지 않은 나를 신경 써 주려는 수작인 것을 알아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그물과 덫을 만드는 방법과 소요 시간 따위를 적고 있던 제니가 해사하게 웃으며 아해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다음 학기에도 야영 수업 들으시나요? 저는 지금 이 멤버가 너무 좋아서, 2학기 수업도 꼭 같이 듣고 싶어요.”
“맞아요. 2학기 수업은 금요일 오후 시간에 있어서, 주말을 할애해서 실제로 야영도 다녀온다고 들었거든요. 우리 이렇게 합을 잘 맞춰 두었는데 바로 헤어지긴 좀 아쉽잖아요.”
“영광입니다. 제가 너무 업혀 가는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마는.”
“무슨 소리예요. 이반이 얼마나 열심히 해 줬는데. 저도 좋아요!”
“저도 좋습니다.”
“좋아요, 미카엘도 합류한다니까 길거리에서 객사할 위험은 없어졌네요.”
서로 사이가 좋은 아해들이 웃는 낯으로 다음을 기약하기에 냉큼 끼어들었다.
어떤 아해와 함께한다 하더라도 어색해할 성정은 아니었으나, 이미 꾸준히 합을 맞춰 온 친한 아해들을 두고 낯선 이들과 굳이 함께할 만큼 정이 없지도 않았다.
묵묵하게 아해들의 사이를 조율하고 이야기를 부드럽게 이끄는 데미안 크리스토퍼, 궂은일과 자질구레한 일을 묵묵히 하고 저 뽐내는 일이 없는 이반 홀모스, 수업 내용의 세세한 점을 모조리 기억해서 어여쁜 글씨로 필기하고 공유하는 제니, 어떤 일이 있어도 활기차고 유쾌하게 반응하고 호들갑을 떨어 웃음을 자아내는 마리앤 필로덴도르까지.
성품이 순하고 행실이 바른 아해들이었다.
이름자 외우는 것을 힘들어하던 내가 멀찍이서 그 머리터럭 색만 보아도 곧장 반가운 마음이 일 만큼 기척을 익힌 아해들이다.
가까이 두고 살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였다.
한참을 다음 학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훌쩍, 또 화두가 바뀌었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다들 뭘 하시나요? 계획해 둔 게 있나요?”
“글쎄요. 올해부터는 여름 무도회에 참가해야 할 텐데, 아직은 그저 어색해서요. 같은 과 동기들이 다 보는 사이에서 연애 상대를 찾아야 한다니, 으으⋯!”
“무도회?”
“어, 그러고 보니 아직 미카엘은 사교계 데뷔를 안 했지요⋯. 좀 아쉽다. 방학 동안 얼굴 보기 힘들겠어요.”
“다들 방학 중에도 서로 얼굴을 보는 편입니까?”
“으음, 아무래도 그렇죠⋯? 솔직히 학기 중에는 공부하고 과제하느라 바빠서 연애할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보통 운명적인 만남을 갖고 싶은 영식과 영애들은 방학 기간에 무도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편이에요.”
“운명적인 만남이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어깨 툭 부딪쳐서 어맛, 치맛자락을 밟은 것 같은데 아차, 뭐 그런 것들⋯?”
‘어맛’과 ‘아차’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으나, 마리앤이 이반의 어깨에 툭 부딪히고는 수줍은 척 교태를 부리는 꼴은 재미있었기에 하하 웃었다.
제니가 데미안에게 괜찮은 동무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며 새침하게 말하고, 이반이 묵묵하게 제 동무들의 이름자를 늘어놓았다.
어찌어찌 수업 시간 중에 덩굴 그물을 완성하는 데에 성공하여 무척 기뻤다.
* * *
고급 검술 시간에 루베르와 루실라에게 물어 여름 무도회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어런 제국에서는 여름과 겨울에 각기 보름 동안 무도회를 연다 하였다.
귀족 연감에 실린 모든 귀족 가문의 자제는 나이 열다섯을 넘기면 사교 무도회 초대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루베르와 루실라, 맷 니코 이렇게 셋은 이제 열여섯 살이라 여름 무도회와 겨울 무도회를 모두 한 차례씩 참가하였는데, 특히 루베르와 루실라는 황실의 피를 타고 난 죄로 보름 내내 매일 얼굴을 비추어야 했어서 무척 고역이라 하였다.
그들 모두가 아직 혼인 상대를 정하지 않았으며 가까이하는 상대가 없다는 말도 듣게 되었다.
문득 내 부친과 모친이 떠올라 정략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이, 루베르와 루실라 둘 다 연하 취향이라 하기에 잠시 기가 막혔다.
“⋯어린아이가 좋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절대 아니야.”
“지금까지 무도회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새로 참여할 사람들 중에서 구하겠다는 말이지. 누굴 소아성애자로 모는 거야⋯?”
“아아.”
하긴 크게 나이 차이가 나는 상대를 찾는 게 아니라면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순순히 사과하자 루베르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웃었다.
맷 니코가 그 옆에서 자신은 연상이 더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 말을 덧대며 깐죽거렸다.
찬찬히 얘기를 들어 보니 지학 이상 이립 이하의 사람들을 모아두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춤을 추는 것이 대부분의 일정이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당장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벤자민과 함께 마나와 오러 수업을 들으러 자리를 옮겼다.
이곳 시어런의 사람들은 짝을 찾는 것에 상당한 열의를 보였다. 나는 그것이 퍽 신기하였다.
살기 좋은 땅이라 후손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한 것인지, 서로의 마음이 낙낙하여 나눌 것이 많은 것인지.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일었다.
“벤자민 클라우디안 영식도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을 믿고 있습니까?”
“저 말입니까?”
“예. 어쩐지 클라우디안 영식은⋯ 사랑보다는 무예에 관심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지금은 그렇죠.”
“지금은?”
“평생 혼자 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라는 대꾸였다. 벤자민은 언제나처럼 묵묵하고 고요한 시선으로 이켠을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키가 훌쩍 큰 녀석은 주변의 사람과 보폭을 맞추어 걷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 느리게 걷고는 하였다. 하여 그 느린 걸음걸이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글라스 머스탱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수업이 시작된 뒤에는 당연히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일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외부의 마나를 곧바로 검에 실어 오는 연습을 하였는데, 잘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마법을 다룰 적에는 그저 잔잔하던 하단전의 내공이 검에 실리는 오러를 밀어내려 멋대로 펄떡 뛰었다.
주화입마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차근차근 내공을 달래느라 진땀을 쏟아야 했다.
무작정 오러를 이끌어 내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더글라스 머스탱과 의견을 모으고 운기조식을 하여 기혈을 다스렸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뒤에 벤자민이 불쑥 말을 꺼냈을 때는 수업 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이미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 채였다. 갑자기 꺼내든 화두가 무엇인지 몰라 조금 헤맸다.
“전 아마 오래 살겠지요.”
“음⋯? 그야, 몸이 강건하고 오러를 수련하고 있으니 큰일이 닥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긴 생을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꾸준히 하고 있어서, 그래서 배우자도 긴 시간을 두고 구할 생각입니다. 함께 검을 논할 수 있는 상대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검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삶에 대해 모범이 될 수 있을 만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 좋습니다.”
“⋯예?”
“그리고, 저는⋯ 아무래도 강한 사람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서. 저도 나중에 만나게 될 그 사람을 위해 강해지고 싶습니다.”
“⋯음, 그렇군요.”
뜬금없는 이상형 얘기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수업 전에 나누던 이야기를 떠올려내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하였다.
이렇게 묵묵하고 얌전하여 무예에만 신경을 쏟는 것만 같던 소년도 평생을 함께 나눌 정인을 애달프게 그리고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