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그리고 목요일. 고급 검술 시간이 돌아왔다.
친하고 익숙한 다섯 명이서 무리를 지어 서로의 대련을 구경하고, 검식을 수련하고, 마엘로 샌슨에게 몇 가지 조언을 구했다.
나는 오래 궁리한 끝에 남궁의 검식에 새로운 검식을 섞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에 각 검식의 유사점을 찾아 연계를 시도해 보기로 결심했다.
수업이 끝나고 이어진 점심 식사 시간에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술 한 모금 마시지 않고서도 취한 사람처럼 흥청망청 소리 높여 이야기하는 루실라 안티 시어런 황녀 탓이었다. 그녀의 말투는 몇 번을 들어도 쉬이 적응할 수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황녀의 친구인 맷 니코가 그녀를 잘 다루는 편이니 금요일 비도술 연습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까닭을 물으니 맷 니코는 금요일마다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여 더 캐묻지 않았다.
정신없던 식사 시간이 지나고, 오러 수업이 시작되었다.
일전에 더글라스 머스탱과 메이지 볼더의 제안을 심사숙고하여 결정하기로 이야기가 된 탓에, 다른 마법사들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더글라스 교수는 내게 시어런 식으로 오러를 사용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냉기 마법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오러를⋯ 말입니까?”
“에른하르트 영식이 이미 정제되어 있는 오러만을 사용할 수 있었을 때에야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대기의 마나를 가져다 쓰는 것에 성공했다면 시어런의 것을 배워 활용해 봄 직하지 않겠어요? 오러와 새로운 마나를 섞어 활용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나요?”
“으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에른하르트 영식이 본인이 사용하는 기운을 온전히 능숙하게 다룰 수 없었다면 분명 기운이 서로 부딪혀서 의무실에 가야 했을 거예요. 앤젤라 스팅 교수가 보기에 별문제가 없었다고 하니까 시도해 볼 만 할 것 같아요.”
“음.”
“영식이 사용하는 방식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방법이잖아요?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목표라면 이미 수백 년간 검증되어 온 방법을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예요.”
“흐으음⋯.”
중원에서 남궁의 이름은 크고 드높았다. 안휘 사람이 아니더라도 오대세가를 손꼽을 적에 남궁의 이름이 빠지는 일이 없었다. 오백 년 족보에 남겨진 초절정 고수의 성명만 수십이었다.
수대를 이어 온 심법이고 수천이 익힌 심법이었다. 충분히 검증된 안전한 방도라 여겼다. 그러나 입을 열어 창궁대연신공의 전통과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더글라스 교수의 의견이 얼마나 합당한지 먼저 고심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 손해 본 것이 여즉 없긴 하였다.
중원의 내공심법은 자연의 기운을 정제하여 인간의 몸에 담는 것을 기조로 했다.
순정한 기운을 호흡을 통하여 받아들여 배꼽 아래 하단전에 쌓는데,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기감으로 느껴야 하는 제3의 신체 기관이었다.
시어런 식으로는 비물질계의 마나를 정형화한 것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몸 안에 정제된 기운을 갑자 단위로 헤아렸다. 순수한 토납법(*기 수련의 기초 단계)으로 육십 년을 쌓아야 이룰 수 있는 경지가 1갑자였다.
나는 전생에 2갑자 내공을 쌓고 깨달음을 얻어 중단전을 열어 초절정의 경지를 깨쳤다.
화경의 무인들은 상단전을 열고 3갑자, 4갑자에 이르는 거대한 내공을 휘둘러 천지가 무너지는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해 들었다.
반면에 시어런에서는 정제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힘을 가져다 사용하였다.
시어런의 무인들은 자연의 기운을 몸에 그대로 끌어와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신체를 단련했다.
내가기공(*내공을 몸에 축적하는 공부)보다 외가기공(*육체적인 수련을 중심으로 한 무공의 한 가지)을 단련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 하면 갑자의 내공을 쌓지 않고서도 그 이상의 오러를 전부 자신의 것인 양 끌어와 사용할 수 있었다.
중원에서도 외공을 중시하는 가문이 몇 있기는 하였으나, 무식한 수련법이라 하여 외공을 만만히 보는 이들이 늘 있었다. 외가공부를 하여 내가공부보다 드높은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싶어 저어하였다.
이 나이를 먹고 이제 와서 외공을 연마할 수 있을 리가, 하고 생각하다가 내가 착각하고 있던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내 나이가 아직 열셋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할 수만 있다면 외공과 내공을 함께 수련하는 것은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미 오러를 보는 눈은 트여 있으니, 몸 안에 있는 기운이 아니라 대기의 기운을 그대로 끌어와 검에 싣는 법을 연습해 보는 것이 좋겠어요. 다른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요. 일단 제가 시범을 보여 주고 계속해서 살펴볼 테니 걱정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봐요.”
“예, 교수님.”
그리하여 평소 내가 수련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오러를 끌어오는 연습을 하였다.
마나를 중단전을 통하여 휘돌아 끌어들였다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검에 실으려 했다. 방법은 이해하였으나 실제로 하려니 남의 손을 가져다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어려웠다.
마나와 오러, 내공이 어떤 식으로 혼재되어 반응할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머스탱 교수가 이 방법은 혼자서는 절대 수련하지 말고 자신의 눈앞에서만 시도할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기에 그러겠다 대꾸하였다.
* * *
금요일 오전, 마엘로 샌슨 교수에게 더글라스 교수의 말을 전했다.
그가 언제 한번 셋이 만나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다 하기에 수긍하였다.
아무래도 학생인 나보다는 번거로운 일이 많을 교수들끼리 먼저 서로의 일정을 맞춰 보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날짜가 정해지면 따르기로 약속하였다.
쉐이든 로제와 벤자민 클라우디안도 그 옆에서 함께 이야기를 들었다.
벤자민과 달리 쉐이든은 내가 사용하는 내공심법에 대해 자세히 듣지 못하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무척 흥미를 보였다.
평소에 말수가 없던 벤자민이 자랑스러운 어투로 더글라스 머스탱이 내게 드래곤이냐 물었던 때의 이야기를 하자 쉐이든이 소리 높여 웃었다.
놀리지 말라 엄하게 꾸짖으니, 미안하다 사과하면서도 한참을 숨을 고르며 웃음을 참는 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아니, 그렇지만 말야.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알겠네. 원래 드래곤이라는 종족들은 상당히 미인으로 묘사되고는 하니까 말이야.”
“둥그렇고 퉁퉁하기만 하던 것을.”
“그렇지 않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그건 어린애들 보는 동화책에서나 그렇고. 시어런 제국에 드래곤 애호가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소리를 해. 여기 클라우디안 영식도 이렇게 아쉬워하잖아. 아카데미 도서관에 그 책이 있나 모르겠네, 한번 보여 주고 싶은데⋯.”
“역사 속 21마리의 드래곤 완역판?”
“⋯그걸 갖고 있어요? 우리 태어나기도 전에 한정판으로 나온 것이라고 들었는데!”
“아버지께서 물려주셨습니다. 빌려 드릴까요, 에른하르트 영식?”
“됐습니다.”
슬쩍 호기심이 일었으나, 그것을 보고 또 놀림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용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중원에서 태어나 일생을 살다 죽은 기억이 있는 사내였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죽었다가, 또다시 사람의 태를 빌어 이 세상에 났다. 사람이 아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땅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영물 따위에 대해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앞으로 내가 잡아 죽여야 할 몬스터 종류를 외우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재차 거절하자 벤자민은 내게 강권하지 않았다.
벤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찾아간 비도술 연습장에서 황자, 황녀 쌍둥이를 만났다.
우리가 막 도착하였을 즈음에 무언가 말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내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입을 다물었기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 궁금하지도 않아 괜히 캐묻는 대신 비도 꾸러미나 풀었다.
자세를 고쳐 잡으며 비도를 몇 번 던졌다.
첫 번째는 어설프게 빗나갔으나, 두 번째부터는 과녁에 꽂히기는 하였다.
역시 주에 한 번 하는 연습으로는 부족했다. 본디 중원에서 수련을 할 적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을 한 검식만 수련하는 일도 잦았다.
기껏해야 주에 한 번, 두 시진을 훈련하는 것이 고작이면서 실력이 불쑥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도둑놈 심보가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제법 감을 잡았는지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고서도 과녁에 검을 꽂는 정도는 나쁘지 않게 하였다. 옆에 붙어 선 루베르 황자가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입으로도 칭찬하고 박수도 치며 위로하는 모습에 짧게 웃었다.
지금 루베르의 나이가 열여섯이었던가. 열다섯에 처음 사람의 목을 벤 뒤로 시전의 흑도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기던 때의 내가 생각이 났다.
어린 낯을 가릴 속셈으로 표정을 지워 험악하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이었다. 저 딴에는 심각하였으나 나잇살 먹은 이들에겐 우스워 보였을 것이 빤했다. 지금의 루베르가 딱 그러했다.
어른스러운 척하여도 어른스럽지 않고, 위엄있는 척하여도 위엄이 없다. 또래보다 높다란 키를 가지고 있음에도 무언가 어설픈 구석이 남아 있는 것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실력은 저도 알고 있으니.”
“…아니, 난 진심으로 칭찬한 거야. 활도 아니고 단검을 이 정도 거리에서 던져 맞추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주에 한 번 연습하는데도 이 정도면 무척 빠르게 익히는 게 맞아.”
“흠.”
듣고 보니 또 그럴듯하였다. 내 속에 어떤 구렁이가 자리 잡고 앉아 있는지를 모르니 이 순진한 소년이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소년과 달리 나는 내 부족함을 익히 알았다. 초조해하지 않겠다 몇 번을 다짐해 놓고서도 자신을 계속해서 닦아세우게 되는 건 날 때부터 가진 성정 탓이었다.
그렇습니까, 적당히 수긍하는 체하며 다시 비도를 집어 들었다.
여즉 10m 거리의 과녁 앞에 서 있는 나와 달리, 20m 과녁 앞에서 서 있는 루실라와 벤자민이 눈에 띄었다.
루실라는 벤자민에게 이런저런 기예를 가르치며 숙덕거리다가 대뜸 높은 목소리를 내어 나를 불렀다.
“에른하르트 영식! 에른하르트 영식! 에에른하르트으 여엉시익!”
“한 번만 부르셔도 잘 들립니다.”
“오늘 어쩐지 심란해 보이는데, 여기까지만 하는 게 어때? 오늘 ‘그날’이기도 하고.”
“⋯예?”
“셋째 주 금요일이잖아. 혹시 몰랐어?”
모를 리가 없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은 야시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일전에 야영 수업을 함께 듣는 동무들과 외출하여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며 즐거이 보낸 적이 있었다.
다만 오늘은 금요일 오후를 온전히 수련하며 보내기로 다짐했기에 밖에 나갈 생각을 않았을 뿐이다. 묵묵히 서서 루실라를 보다가, 루베르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시선을 피하려 구는 까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헤아렸다.
비도 연습장 안에도 시계가 있었으나 시계를 읽는 것보다 해의 기울기를 보는 것이 더욱 익숙하였다.
“루베르 선배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아니.”
이번에는 벤자민 클라우디안을 돌아보았다. 이쪽을 흘긋 건너다본 벤자민이 훌쩍 안전선을 넘더니 과녁에 꽂힌 비도를 하나씩 회수하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굳게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