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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4화 (54/176)

54.

루베르와 나, 둘 다 호흡이 거칠지 않았다.

한 학기의 후반이었다. 온몸의 기력을 모조리 쏟아붓고 싶어 안달이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한 번 검을 내지를 적마다 주변의 것들이 지워지는 감각에 희열이 느껴졌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내가 단번에 물러난 거리가 일 장이었다. 비장의 수가 실패하자 녀석은 신중하게 굴었다. 좀처럼 서두르지 않는 차분한 성미가 이런 때에도 드러났다.

땀에 젖지 아니한 새까만 머리터럭이 짙은 눈썹 위를 스치듯 흔들리는 모양새에 등골이 간질간질하였다.

녀석이 걷는 걸음이 무한보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남겨 둔 진각을 따라 여러 번 걸음을 옮겼을 커다란 아해를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기뻤다.

그러나 실책이었다.

무한보의 식이 전개되는 방식을 빤히 알고 있기에 그를 상대하는 것이 이전보다 손쉬워졌다. 나는 내 코앞까지 녀석이 다가오는 것을 주춤대는 척 받아주다가, 몸을 높여 그 정수리 위를 뛰어넘었다.

빈 등에 대고 검을 그었다. 녀석이 몸을 돌릴 적에 사나운 바람이 일었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낸 녀석의 검이 질러대는 소리가 귀에 익었다.

저도 모르게 녀석의 검을 내 검에 붙여 끌었다. 흡(吸)의 묘리를 사용하여 맞붙은 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중원의 것과 달리 무거운 검법을 사용하는 그를 상대하기에 맞지 않는 행위인 것을 알면서도 그리했다.

맞붙은 검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아챈 소년이 당황하였다. 까만 눈이 흔들리는 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다.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소년도 따라왔다. 재능 있는 옥석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경지를 시험하여 끌어내려는 내 성미가 고약한 것을 나도 알았다. 장난을 거두었다.

잡아끌다가, 강하게 내쳤다.

나는 오른손을 사용하는 검수였다. 내가 검을 쥔 손을 크게 떨친 탓에, 양손으로 검을 쥐고 있던 녀석의 두 손이 높이 들렸다. 품이 벌어져 틈이 보였다. 그 사이를 노려 왼손을 뻗었다.

오러가 실린 손이었다. 제대로 꽂으면 아해의 내장이 진탕될 것이 빤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도 겁먹은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중심을 잡은 그의 검이 내 목을 향해 날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뜨끈하고 두툼한 가슴팍이 손바닥에 눌리었다. 선뜩한 칼날이 내 목에 닿았다.

그리고 세상이 멎었다. 마엘로 샌슨의 오러가 나와 소년을 한데 묶은 채였다. 익숙한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던 흥분을 가라앉혔다. 정수리 백회혈이 뜨끈뜨끈하였다. 시근대는 숨을 크게 삼키고 길게 뱉었다.

“숨은 좀 쉬면서 싸우지 그랬어. 일단, 잘 봤다. 둘 다 이전보다 많이 늘었어.”

마엘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승부는 나의 패배였다. 대련이 아니라 싸움이었다면, 그의 내장을 진탕시키는 동시에 내 목이 달아났을 터였다. 몸이 상하는 것이야 회복할 수 있지만, 목이 달아난 뒤에는 돌이킬 수 없었다.

검을 사용하는 대신 장법을 택한 것을 후회하려던 찰나에, 마치 알아챈 것처럼 샌슨이 그 부분을 칭찬하였다.

“일단 미카엘. 검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손을 사용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 팔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을 품속에 파고드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도 괜찮았고. 마지막에는 손에 오러를 실어서 해결하려고 한 모습이 창의적이었다. 다만 너무 거친 방법이야. 아주 위험할 때가 아니면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

손에 닿은 소년의 심장이 두근두근 크게 울렸다.

둘 다 여력을 남겨 두며 대련했기에 호흡이 고른데도 그러하였다.

이 녀석도 나처럼 즐거웠던 것일까.

갑자기 욕심이 났다. 루베르 녀석을 황위에 올리는 것보다, 내 곁에 끼고 무인으로 길러내고 싶었다.

이리도 대련하는 것을 좋아하는 놈을 행정관으로 올려두자니 새삼 아까웠다.

마엘로 샌슨은 계속하여 말을 이었다.

“루베르도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이던데. 점점 더 검을 짧게 잡아 미카엘을 품으로 끌어들인 뒤에 폼멜(*칼자루의 끝부분)로 공격하는 덫을 놓은 부분이 특히 괜찮았어. 미카엘이 조금만 더 느리게 반응했다면 그때에 승부가 났을 수도 있겠다.”

마엘로는 귀에 단 소리를 늘어놓은 뒤, 당연한 수순으로 단점을 읊기 시작했다.

“다만 미카엘에게서 배운 걸음걸이를 사용한 것은 악수였어. 세 번째 걸음에서 이렇게, 우측으로 꺾어 돌았다면 허를 찌를 수 있었을 거야. 보법의 원형에는 충분히 익숙해진 것 같으니, 변형해서 사용할 수 있게 연습해 보도록 해.”

나는 루베르를 올려다봤다. 녀석은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확연하게 벌게진 귓불과 목덜미, 그리고 뛰어노는 심장 소리로 그가 얼마나 민망해하는지가 빤히 읽혔다.

무한보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귀엽고 우습다. 내게 직접 사사한 것이 아니라 하여 부끄러울 일이 아니었다.

검사라면 누구든 오갈 수 있는 연무장에 발자국을 새기면서부터, 루베르 또한 무한보를 연습하여도 좋을 자격을 얻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괜히 멋쩍어하는 것이 그 나이의 소년답고 귀여웠다.

“그래도 검을 짧게 쥐었을 때와 길게 쥐었을 때 모두 속도가 일정하게 빠른 것이 열심히 연습한 태가 나서 좋았어. 둘 다 잘했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오늘 남는 시간에는⋯.”

훅, 온몸을 얽어 둔 기운이 사라졌다. 그제야 녀석의 몸에 닿았던 손을 물리고, 검을 다시 허리춤으로 돌려놓았다. 녀석이 먼저 악수를 청하기에 순순히 그 손을 맞잡았다.

“⋯괜찮았어?”

“예.”

소년은, 정말 그다운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잠시간 시간을 두고 아이의 기쁨을 살피다가, 충분히 즐거웠고 좋은 대련이었다 자상하게 대답해주었다. 녀석이 밝게 웃자 단정한 얼굴에 환하게 빛이 돌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힘들여 대련을 벌인 탓에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교양 세계사 수업은 지난번처럼 루베르가 일전에 전해주었던 노트를 펼쳐 놓고 들었다. 꼭 외워야 할 부분마다 파란색으로 표기가 되어 있어 머릿속을 정돈하기에 유용하였다.

비도술도 그렇고, 노트도 그렇고. 받은 것이 많아 자연스레 그 어린 것에게 황위에 올리는 것 말고도 다른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무엇을 주어야 좋아할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베르는 제 손안에 가진 것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를 아비로 두고 있고, 검술과 검법 또한 이미 훌륭하게 익힌데다가 저보다 더 유능한 고수를 스승으로 두고 있었다.

소년의 바른 글씨를 내려다보며 골몰하고 있자니, 툭, 옆에서 누가 어깨를 흔들었다.

“65페이지.”

브리아나 카사블랑카 교수가 이켠을 보고 있었다. 제게 읽으라 시킨 것을 모르고 다른 생각에 젖어 있었다. 깨닫고 바로 교과서를 펼쳐 해당 부분을 읽었다.

“필릭스 왕가는 왕국을 다스리기 위한 장치로 종교를 우대하는 정책을 오래 펼친 탓에 신권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필릭스의 중앙신전에는 왕을 신성시하기 위한 방책으로만 존재하는 신물이 있는데, 이 신물은 왕의 혈족과 혈족이 아닌 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그 생김새와 사용 방법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사히 한 단락을 읽어내자 수업이 재개되었다.

이론 수업에는 영 재미를 붙이지 못하는 내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쉐이든은 이상하단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이후 제국의 계보 시간까지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 한켠이 싱숭생숭하였다.

* * *

금주의 수렵과 야영 시간에는 저번 시간에 구해 온 이런저런 재료를 사용해 환약을 만들자 하였다.

세드릭 교수는 각 조의 약재 상자를 확인하고 점수를 매겼다.

정해진 종류의 약재를 잘 골라 왔는지, 질이 좋은 것을 판별해 준비해 왔는지, 그 보관 상태는 어떠한지 따위를 일일이 확인하였다.

세드릭 교수는 상태가 좋은 것은 왜 좋은지, 상태가 나쁜 것은 왜 나쁜지를 일일이 따져 알려주며 모든 학생이 약재를 눈에 담을 수 있도록 했다.

개중에 상태가 아주 나쁜 약재는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바꾸어 주기도 하였다.

또 약재를 구할 때 앞뒤로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 따위를 조장에게 발표하게 하였다.

그 덕분에 학생들 모두가 자신이 가지 않은 온실의 구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또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그렇게 필요한 이론 공부가 끝난 뒤에는 책상을 붙여 넓은 작업대를 꾸렸다.

문득 연고나 고약이 아니라 입에 넣어도 되는 약재만 사용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여 손을 들어 물었더니, 세드릭 교수가 언제나처럼 호탕하고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지금 이 자리에서 상처를 만들어서 바를 수는 없잖니? 뭐든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돼. 직접 만들어 보고, 어떤 맛인지 먹어 보고, 어떤 효능을 발휘하는지를 겪어 봐야지. 원래 쓴맛이 나야 하는 약에서 단맛이 난다면 에른하르트 영식은 어떻게 할 것 같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할 것입니다.”

“그래. 그런데 약을 만든 순서나 방식은 틀리지 않았어. 그러면?”

“재료를 확인합니다.”

“만약 이 약이 어떤 맛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선 무얼 할 수 있을까?”

아. 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가 깨달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세드릭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은 뒤 각 온실에서 구한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환약의 종류가 적혀 있는 유인물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자기 조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원이 조금씩 맛을 볼 수 있도록 약을 많이 만들 거야. 온실에서 가지고 온 재료는 오늘 전부 소진할 수 있도록 하자.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이번에도 각 조에 검지만 한 시약병에 담긴 마석 가루가 하나씩 주어졌다.

마리앤 필로덴도르가 냉큼 마석 가루에 제 마나부터 밀어 넣는 것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자 하는 모습이 우습고 재미있어 작게 웃었다.

단단한 선인장 열매, 막리르의 손의 단단한 껍질을 벗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일전에도 사용한 적이 있던 단검을 꺼내어 그 껍질을 얇게 저몄다. 무른 속살이 나올 때까지 조심조심 푸른 껍질을 벗겨낸 뒤에 절구에 넣었다.

제니가 적정량의 마석 가루를 계량하여 절구에 넣으면, 콩콩 찧는 것은 이반 홀모스가 맡았다.

그러는 동안 데미안 크리스토퍼와 제니는 그 혼합물이 변하는 모양새를 그림과 글로 기록하였다.

로기의 꽃잎과 모라스 박하를 사용하는 약의 경우에는 내가 손을 댈 것이 거의 없어 구경만 하였다. 무른 성질의 재료를 잘못 건드렸다가 상하면 괜히 손해를 볼까 염려된 탓이었다.

셋 모두 야외에서 갑작스럽게 상처를 입거나 아픈 일이 생겼을 적에 사용하는 약재들인 만큼, 일전에 만들었던 활력의 비약보다 만드는 과정이 무척 간소하였다.

그렇게 나온 반죽들을 손재주 있는 아해들이 둥글게 굴려 환약처럼 빚었다.

다른 조가 맛볼 만큼은 덜어 두고 작은 접시 세 개에 우리 조 몫의 환약을 얹으니 뿌듯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내공의 공부가 깊어질수록 무인의 몸은 강건해진다.

나는 중원에서도, 시어런에서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예를 단련하고 운기조식을 했다. 그 덕분인지 살면서 고뿔 한 번 걸려 본 적이 없고, 연이 닿지 않아 영약을 접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류의 약재는 볼수록 낯설고 신기하였다.

잘 빚은 색색의 환약들을 다섯으로 잘 쪼개어 한 조각을 받았다. 조금씩 떼어 내어 혀 위에 얹었다. 그 맛이 쓰고 달고 신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찬찬히 빨아 삼켰다.

수업이 끝날 무렵에는 여러 환약을 한 번에 맛본 탓에 입 안에서 쌉쌀한 맛이 가시지를 않았다. 같은 조의 아해가 내 혀가 노랗게 물들었다 알려 주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공부였기에 조금도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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