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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3화 (53/176)

53.

일요일에는 본디 계획한 대로 쉐이든과 함께 도서관에 갔다. 아해가 어제의 일로 무어라 더 말하려는 것을, 오늘 공부해야 할 것이 많으니 다른 날 이야기하자며 뒤로 미뤘다.

생각하면 할수록 얼굴이 홧홧해졌다.

하룻밤 만에 그럼 이제부터 시어런의 법도를 따르자 결심할 수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잊기로 하였다. 당장에 할 일을 미뤄둘 만큼 큰일이 아니기도 하였다.

늘 그러했듯이 제국의 계보 쪽지 시험을 위한 공부를 했다. 묵묵히 연필을 놀리는 동안 이쪽을 신경 쓰던 쉐이든도 제 공부를 시작하여 암기할 분량을 끝냈다.

중간에 루베르 황자와 잠시 마주쳐서 인사를 했으나, 심란하여 아해와 오래 이야기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말을 더 붙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적당히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다 다음에 보자 하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월요일이 되었다.

이틀간 생각이 닿을 적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몸을 재게 움직인 덕분에 더 이상 괴이한 생각에 파묻혀 있지 않을 수 있었다.

초급 검술 시간에는 평소보다 고강도로 훈련을 하는 듯하니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마엘로 샌슨의 조언을 들었다.

그 말이 옳다 여겨 순순히 팔다리에 힘을 빼고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러고 나니 식사를 마치고 마법 수업을 들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서쪽을 향해 걸어갈 즈음에는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하였다.

그래, 내가 어찌 생각하든 간에 남의 일이다. 너무 깊이 관여하려 들지 않고 눈감는 것이 옳았다.

강호는 드넓어 늘 일이 많았다. 그중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따지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손대지 못한 것도 많았다.

이번에도 그저 나와는 관련 없다 여기며 흘러가게 두고자 하였다.

“안녕하세요, 미카엘! 지난 금요일에 연극 보러 갔다 왔다면서요?”

“아니, 근데.”

“네?”

“⋯아닙니다. 마리앤도 봤어요? 그, 백작 부인.”

“데이지 백작 부인 이야기? 당연히 봤죠. 이번에 새로 데뷔한 베넷 양이 데뷔하기 전에는 수도 21번가 카페에서 일했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어떻게 그런 미모를 지금까지 숨기고 살 수 있었지?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에 그 카페에 가 봤어야 하는 건데! 너무 아까워요!”

⋯그래,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금일 새로 배운 마법 수식은 1서클의 빙결 마법식이다.

일전에 마리앤이 다 녹은 초콜릿을 다시 굳히겠다 하여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다.

들이는 마나의 양이 적고 냉각과 과냉각 사이의 연결 지점이 여섯 개밖에 되지 않아 그 모양새와 짜임이 단순한 편이었다. 마법식이 마치 꽃처럼 생겨 보기에도 좋았다.

이쯤 되니 나는 이 수업이 끝날 때까지 앤젤라 스팅에게서는 공격 마법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예감했으나, 이미 일전에 에드윈을 통해 실컷 경험한 바 있어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오늘도 다른 아해들이 앤젤라 교수에게 마법식을 선보이는 동안 홀로 중단전으로 마나를 끌어오는 연습을 하였다. 아니, 이것이 연습이 맞던가? 내게는 무용하게만 느껴지는 일이었다.

내가 평생을 수련해 온 창궁대연신공은 몸 바깥의 기운을 정제하여 하단전에 쌓아 두고, 필요할 적에 그 기운을 풀어내어 신체의 일부나 공격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단전의 내공을 중단전으로 끌어오는 것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 전신의 힘을 보다 엄중히 다룰 수 있도록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마나 운용은 내공심법과는 판이하게 달라, 몸 바깥에 있는 마나를 중단전 어림, 즉 심장에 끌어 한 바퀴를 움직이도록 한 뒤 다시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였다.

몸 안에 쌓을 것도 아닌 기운을 구태여 힘들여 끌어오고 돌려보내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는지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말하자면 잘 흐르고 있는 강물 위에 한 컵씩 물을 더하고, 그저 막연하게 흘러가는 모양새를 구경하는 것과 같았다.

다만 이 또한 오래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이제 크게 품을 들이지 않아도 마나를 끌어오고, 휘돌리고, 내보내는 지난한 작업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빙결 마법식은 그 짜임이 정화 술식보다 단순한 듯한데, 한 번쯤 도전해 보아도 되지 않나⋯ 하고 괜스레 내공을 얇게 저며 볼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앤젤라 스팅 교수가 내 앞에 섰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상냥한 목소리가 닿았다.

“오늘은 에른하르트 영식도 마법식을 꾸려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영식이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으로도 충분히, 빙결 마법식은 발동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나의 축복을 받았으니 유용한 기초 술식 하나 정도는 외우고 있는 편이 좋겠지요⋯?”

“⋯! 예! 감사합니다.”

앤젤라 스팅 교수가 건네어 준 유인물을 보면서, 그녀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마나를 끌어왔다.

꾸준히 연습해 온 덕일까. 하단전에서부터 시작하지 않는 기의 흐름이 어색하지 않아 내심 크게 놀랐다.

내가 익숙해진 것을 나보다 먼저 알아챈 앤젤라 스팅 교수의 안법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저 먼 곳에서부터 끌어오라 하기에 굳이 가까이에 있는 내공을 두고 먼 곳에서부터 엷은 짜임의 마나를 갈퀴로 끌어모으듯 훑어왔다.

술식을 그릴 때 머뭇거려도 좋으니 왼손은 그대로 두고 오른손으로만 수식을 그리라 하여 차근차근 결집, 방열, 침잠, 냉각, 축소 술식을 따라 그렸다.

손짓이 서툴러 술식이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 부분마다 앤젤라 교수가 자신의 마나로 한 겹 덧대어 감싸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알파 술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윽고 내 손바닥 바로 윗켠에서부터 푸른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 온도가 아주 낮지는 않았으되, 손과 가까운 팔뚝, 가슴팍까지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자아⋯. 좋아요⋯. 이제 천천히, 다시 마나를 돌려줄 거예요. 에른하르트 영식의 손 위에 모여 있는 작은 꼬마 요정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좀 더 벌려서⋯.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숨을 내쉬면서⋯. 자아, 다시 마나를 끌어다가 서클을 회전하고, 멀리 내보내요⋯.”

시키는 대로 하였다. 내 손바닥 위에 모여들었던 냉기가 그대로 허물어져 녹아내리는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완전히 술식을 풀어내는 데 성공하고 나서 기쁜 얼굴을 들어 앤젤라 교수를 올려다보았다.

깊은 자정 밤하늘 달빛 어림이 그러할까. 온화한 남청색 눈동자가 상냥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주 잘했어요⋯. 에른하르트 영식이 마나와 친한 듯 보여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짜임새가 조금 거칠긴 하지만 곧잘 해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뻐요⋯. 앞으로 검술부 수련을 할 때도, 이 술식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수업 시간에 몇 번 더 꾸준히 연습해 보고, 이후로는 혼자서도 빠르게 술식을 전개하는 연습을 할 거예요⋯. 할 수 있겠지요⋯?”

“예,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게 내 일인걸요.”

말은 그리 하였지만, 나는 앤젤라 스팅 교수의 얼굴에 스민 뿌듯함을 읽을 수 있었다.

여즉 손끝이 차가운 것이 신기하여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다 떼고, 내 손바닥을 어루만져 보곤 하였다.

앤젤라 교수가 다른 학생들의 마법 술식을 봐주는 동안 나는 또다시 몸 바깥의 마나를 중단전으로 끌어오라는 과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차분히 관조하며 빙결 마법식을 꼼꼼히 외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 * *

고급 검술 시간, 대련을 위하여 연무대에 섰다.

오늘의 상대는 루베르 황자였다.

스무 명의 일류무인이 모두 서로와 한 번씩 대련하려면 그 경우의 수가 세 자리가 훌쩍 넘는다.

순차적으로 대련을 하다 보니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가도록 그의 솜씨를 눈으로 훑기만 하고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기에, 시작도 전에 신이 났다.

나를 마주하고 선 소년의 곧은 어깨와 단단히 검병을 쥔 손 따위에 시선을 두었다.

이 땅, 시어런에는 하나의 검식을 하나의 가문이 소유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때문에 무인들은 제각기 자신이 자랑으로 삼는 검식의 형이 각자의 성정을 닮아 있었다.

개중에서도 루베르는 제국 검법의 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삼킨 듯 반듯한 검식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검로가 정직하여도 힘이 상당하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검병을 쥐고, 나는 한 손으로 검병을 쥐었다.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마엘로 샌슨 교수는 대련의 시작을 소리 내어 알리거나 하지 않았다. 일류무인이라 함은 소드 익스퍼트 상급을 아울러 말하는 것이라, 오러의 수발이 자유로운 이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자신의 검역 안에 선 상대가 손끝 하나 까닥이는 것도 모조리 읽어 낼 수 있는 경지였다.

중원과 시어런의 검의 도가 각기 다르나, 두 곳 모두 고수가 하수에게 선제공격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먼저 선수를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의 실력에 우위를 가를 수 없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러하였다.

루베르와 나는 여덟 보를 사이에 두고 서서 호흡을 골랐다.

채앵ㅡ!

검신이 서로 맞닿았다. 예리한 시선을 가까이서 마주했다. 나는 우리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시에 뛰어올랐다. 부딪친 검이 사납게 우는 소리를 냈다.

힘으로 겨루면 내가 질 게 빤하기에 왼편으로 공격을 흘려 내며 반 바퀴 돌아 물러났다. 겨우 한 번 부딪혔을 뿐인데 손아귀가 얼얼하였다.

내가 세상을 읽는 방식은 오롯이 검을 통할 때만 온전하였다.

앞에 선 갈까마귀의 표정이 진중했다. 허투루 마음 쓰지 않는 놈인 것을 알고 있었다.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크게 휘두른 검이 내 가슴팍을 노리고 치켜들어오기에, 양다리를 굳게 세워 바닥에 단단히 박았다.

허리를 뒤로 한껏 젖혀 검 끝에서 한 뼘 정도 거리를 벌렸다. 왼발에 힘을 실어 일어서며, 오른발로 녀석의 무릎께를 걷어차려 하였다. 내 팔이 짧아 그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았으나, 몸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족하였다.

검을 뒤에 두고 몸을 앞으로 쏘았다.

중원에 있을 적에는 검보다 몸이 먼저 나서는 일이 많지 않았다. 경공을 사용하여 먼 길을 달릴 적에나 제 몸을 화포처럼 앞으로 쏘았다.

남궁세가의 주력 무공이 검법인 탓이었다. 권각(*주먹과 다리를 사용한 박투법)의 묘리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여도 내공을 실은 무기만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곳 시어런의 전투는 온몸을 사용하는 것을 기조로 했다.

그림책 속 영웅이란 것들이 죄다 방패를 들고 나서는 이유가 그 탓이었다. 거대한 짐승의 힘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검 한 자루로는 부족했다.

목과 가슴을 베이면 죽는 인간과 달리, 몇 번을 찌르고 베어도 아가리를 쩍쩍 벌려대는 괴물을 처치하려 시작된 검이었다.

상대를 죽이고 내 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바닥에 뒹굴고 흙먼지를 뿌려서라도 이 순간을 견뎌내고 다음 획을 긋는 것이 시어런의 무인이었다.

그래서 나 또한 그렇게 하였다.

금나수의 묘리를 담아 왼손을 갈고리처럼 사용하여 루베르의 멱살을 잡아채려 하였다. 그러나 녀석이 제때 알맞게 피한 탓에 내 손이 흰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끝이 허했다. 한번 기세를 잡았으니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며 검을 찔렀다.

뻗은 검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쳤다. 루베르는 양손검을 주력으로 하였는데, 내 한 손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었다. 녀석의 두 다리는 시종일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지만 단숨에 승부가 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꾸준히 기회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세상을 건너오고 세월을 건너오면서, 일찍이 깨어 있던 안법을 장기로 삼은 나였다.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찔러오는 검의 방향을 읽었다. 물러나는 것보다 나아가는 것이 옳았다.

몰아세울수록 검을 휘두르는 간격이 짧아졌다. 루베르가 갑작스럽게 검에 힘을 뺐다. 그대로 내려치면서도 그가 내놓은 수가 의아하여 멈칫하는 순간, 내 명치께를 향해 검병이 쏘아져 왔다.

거리가 짧아 검을 휘두르는 것이 여의찮으니, 검신이 아니라 검병 끝의 둥그런 장식으로 나를 공격하려 한 것이었다. 그것을 가까스로 기척으로 읽어내어 피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찍이 용봉지회에서는 겪지 못한 방식의 전투였음에, 뒷골이 빠듯하게 당겨왔다.

입꼬리에 웃음이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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