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극을 보는 중에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법도라며 쉐이든이 귓가에 소곤거리기 전까지, 허어, 허. 얼빠진 탄식을 숨기지 못하고 흘렸다.
충고를 들은 뒤에도 입술을 꾹 물고, 나이 어린 아해들이 이런 망측한 것이나 보러 나오는 것이 마뜩잖아 혀를 차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연극의 내용이란 것이 어찌나 괴악하고 낯 뜨겁던지!
처음에 등장한 남자는 이미 혼인을 한 유부남으로, 끌어안고 있던 여자는 그의 정부라 하였다.
그 남자가 희롱하듯 여인의 허리를 감아 안고 웃는 얼굴로 자유로운 사랑을 노래하다가 아내에게 들켜 대단히 혼이 나는 이야기였다.
나오는 여인과 사내들은 사납게 소리치며 대화하다가도 갑작스럽게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도 하고 또 저들끼리 무리를 지어 춤을 추거나 화려한 몸짓을 하거나 하였는데, 그 목소리와 노랫가락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내용이 음탕한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극이 끝나자, 와아 하는 탄성과 함께 화려한 박수가 쏟아졌다.
함께 온 아해들을 둘러보니 단비와 아르노, 그레고리는 심지어 눈물까지 훌쩍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내 아는 녀석들만 이렇게 굴었다면 참지 못하고 쓴소리를 한마디 하였을 텐데, 거대한 극장을 가득 메운 오륙백 명의 사람들이 모조리 웃으며 박수갈채를 쏟아내 할 말을 잃었다.
지금껏 시어런에 새로이 태어나 좋은 것과, 입맛에 맞는 것만 보아왔기에 이렇게 놀랄 일이 없었다.
묵묵히 앉아 넋을 놓고 있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쉐이든이 나를 흘깃 보더니 박수를 치다 말고 내 귓가에 작게 속닥거렸다.
“왜, 미카. 재미없었어?”
“⋯이해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으응? 뭐가?”
“⋯진짜 몰라서 묻는 것이야?”
“어? 어어⋯. 뭐야, 배우 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다⋯. 되었다.”
시들하게 대꾸하고 나니 단비가 제 여자친구의 손등에 입 좀 맞춘 것은 어린아이 장난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더 심란하였다.
그에 비하면 이 몸, 미카엘 에른하르트의 양친은 얼마나 정숙하고 현숙하게 행동하였는가.
이미 혼인을 한 뒤에도 그 내외함이 법도에 맞아, 나란히 서 있기만 하여도 다정한 사이인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흐뭇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외눈박이 마을에서는 두눈박이가 한 눈을 감고 다녀야 하는 법이다, 저 스스로를 달래려 하여도 자꾸만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가 있나, 하고 꾸짖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제 옆에서 뭐가 문제인지 몰라 저들끼리 속닥이며 걱정하는 아해들에게 결국 한마디 겨우 대꾸해 주었다.
불만이야 많았으나 입 밖으로 정리해 내뱉을 만한 말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주인공 사내의 행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냥, 그냥 조금⋯ 불편한 것뿐입니다.”
“아아. 걱정했잖아요. 극에 집중해서 보면 저도 가끔 맘에 들지 않는 등장인물이 있어서 기분이 상하더라구요! 복수에 성공했다고 해도 여주인공의 마음이 다치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그럴 수 있지, 그럼. 기분전환 겸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통돼지 구이가 부드럽고 괜찮은 집을 알고 있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도 좋아할 거예요.”
“⋯예.”
혼란한 것은 혼란한 것이고, 기껏 주말을 맞아 놀러 나온 이들에게 계속해서 부루퉁한 꼴을 보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아르노의 팔뚝을 꼭 끌어안고 헤실헤실 웃는 단비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었다.
데미안이 고른 식당의 음식들은 무척 맛있었다.
식사하는 동안에 즐겁게 떠드는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간간이 웃는 얼굴을 보였다. 잡화점에서 미하엘과 가족들에게 답장할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구매하기도 하였다.
아이들과 인사하고 기숙사에 들어왔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아내지 못하고 쉐이든의 방문을 노크했다.
“쉐이든, 내가 물을 것이 있는데.”
“뭐야, 미카. 역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수도 사람들은 정인이 아니어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당연한 게야?”
“어?”
“아니, 연인이라도 그렇지. 사람들이 버젓이 다 보는 길거리에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은 과하지 않은가?”
쉐이든이 연녹색 눈을 연신 끔벅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쉐이든은 한참을 나를 보다가, 입꼬리를 비죽거리다가, 괴상한 표정으로 나를 응접실 소파로 이끌었다.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인간관계에 대해 설명해 줄 동무가 있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것으로 고민하고 있는 내 처지가 우스웠다.
물론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서 보낸 지난 시간 동안 보고 배운 것이 있어, 작금의 내가 중원에서보다 다른 이와 살을 부대끼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혼인한 지 오래인 부부 사이나, 나이 많은 어른이 어린 아해를 어르고 달래기 위하여 하는 접촉에 한해서였다.
또래의 미혼 남녀가 몸을 비비는 것은 여전히 망측스럽게 여겨졌다.
남녀가 서로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뺨과 손에 서로 입술을 꾹꾹 찍어대는 일을, 심지어 남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버젓이 행하는 모습이 얼마나 낯 뜨겁던지!
내가 괜히 수치스럽고 민망하여 오늘 오후 내내 혼란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숨이 트였다.
내 두 눈으로 접문하는 모습을 본 것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여즉 속이 더웠다. 나는 부러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쉐이든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뜨끈한 차까지 한 잔 내어주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목이 말랐기에 순순히 찻잔을 받았다.
“단비랑 아르노가⋯ 키스를 했나? 아니, 아닌 것 같은데.”
“손에.”
“아. 아하. 아하아⋯. 그리고?”
“연극에서 껴안고 입 맞춘 그들이 혼인한 사이는 아니잖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런저런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낯이 뜨거워서⋯.”
“큽, 흠. 흐음⋯. 그렇구나. 하지만 진짜로 입을 맞춘 것이 아니고 시늉만 하였는데도?”
“⋯.”
“그래⋯. 그렇구나. 으음, 이런 건 가풍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법이니까. 잠깐만, 생각 좀 하고 대답해도 될까?”
“그래.”
쉐이든이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묵묵히 고민하였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마엘로 샌슨도 그러했고, 쉐이든 로제도 그러했다. 얌전히 생각을 마치길 기다리면 곧 옳은 답을 내주었기에 나는 그들을 무척 믿고 있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으음, 일단. 네가 그런 것을 안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어. 미리 설명해 주지 않고 연극에 데리고 간 건 미안해.”
“아니, 몰랐던 것이야 어쩔 수 없지.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에른하르트 가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몰라서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는데⋯. 연극배우들의 스킨십은 사실, 노출이 없다면⋯. 이상, 한 게 아니거든.”
“그것이?”
“응. 일단 아까 본 연극은 전체 연령가 연극이었어. 말하자면, 그래. 권선징악의 의미를 담은 거잖아. 일부일처는 좋은 것이고, 바람을 피우는 건 나쁜 것이다, 하는 이야기의 ‘데이지 백작 부인 이야기’는 벌써 백여 년 전부터 유행한 극인걸.”
“⋯.”
“특히 백작 부인의 아리아는 4옥타브로 올라가는 마의 구간이 있어서 실력 좋은 배우의 등용문 소리를 듣고는 해. 배우들이 아주 선망하는 역할이란 뜻이야.”
“⋯.”
“포옹 정도는, 기쁜 일이 있으면 누구나 하는 거잖아? 키스를 하는 척을 하긴 했지만 고개를 돌려서 키스하는 척을 한 거지, 정말로 키스한 것도 아니었고. 그치?”
“⋯ 지금 날 설득하는 거야?”
“아니, 아니. 그냥 설명한 거야. 사실 일곱 살 아이들도 친하면 손은 잡고 다니고, 나중에 우리 결혼할 거야! 하고 뽀뽀 정도는 하잖아! 그런 건 어른들도 귀엽다고 두고 본다고.”
“남녀 사이에 일곱 살이 지나도 손을 잡고 다녀? 입을 맞춘다고?”
“아니, 왜 안 되는데?”
“너도 정인이 생기면 그렇게 길거리에서도 입을 맞출 거란 소리야?”
“그,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사랑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아니지!”
“그럼 뭔데!”
“⋯.”
더 꺼낼 말이 없어 입을 딱 다물었다.
전생과 현생에 걸쳐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해 보았으되 정인만은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사랑이 무엇이다,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마음 한켠이 불편하고 싫었으나, 시어런의 법도가 그렇다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나 싶기도 하였다.
얼결에 큰 소리를 내지른 쉐이든이 꼭, 처음 동생을 만들어 달라는 소리를 들은 때의 부친처럼 곤혹스러워하며 마른세수를 하는 꼴을 흘끔 쳐다보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양손으로 태양혈을 짚어 문질렀다. 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저와 쉐이든 둘 다 생각에 잠긴 탓에 응접실 내가 한참 동안 조용했다.
쉐이든이 조금 벌게진 뺨을 문지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근데⋯. 또 생각해 보면은.”
“음.”
“길거리에서 스킨십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거든.”
“⋯! 그래, 부끄러워하는 것이 옳지.”
“근데 그건 그저 사랑하는 사이인 것을 뽐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남들에게 굳이 자랑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차이일 뿐이지. 애정 행각이 불건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야. 이건, 네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야, 미카.”
“무례?”
“응. 저들끼리 손을 잡든, 뽀뽀를 하든, 키스를 하든지 간에⋯ 그건 그들이 정할 일인 거잖아. 사랑은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거니까⋯.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네 사랑에만 적용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내게만 적용하면 된다.
그 말에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쉐이든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막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쉐이든 또한 눈치 빠르게 그것을 알아채, 조용히 소파에 기대어 나를 기다려 주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누군가가 저들끼리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서 내가 꺼려하고 싫은 내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뜸 들여 고심하였는지 고민하다 허, 하고 더운 숨을 뱉었다.
내 아직도 정파 무림맹으로 행세하며 사파 악적들의 바름과 그름을 판결하던 때의 버릇을 못 고친 게지.
그러니 정숙한 것은 옳은 일이고, 난잡한 것은 그른 일이라 정해 두고 상벌을 따지려 한 것이었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중원에서 보낸 삶은 고행과 수신, 면벽의 삶이었다.
제 욕구를 제어하는 것은 숭상받아야 할 일이고, 천박하게 구는 것은 멸시받아야 할 일이라 여겼다.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모두가 입을 모아 그리 말했기 때문에, 술자리에서 뒹구는 이들을 피하고, 남녀의 손과 손이 닿고 어깨와 어깨가 닿는 것도 꺼렸다.
그러나 중원의 법도와 시어런의 법도가 다른 것은 저 별자리가 서로 다른 것처럼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니 덮어놓고 싫어할 일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워 머리칼을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에 보슬보슬하게 흩어지는 머리칼의 감촉은 중원의 것과 분명히 달랐다.
그때에는 늘 제 머리를 푸른 끈으로 단정히 묶어 늘어트렸기에, 이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머리를 헤집거나 정돈하려 굴 필요가 없었다.
일단 잘 시간이 가까워졌고, 쉐이든을 따져 물어 혼을 낼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간신히 생각이 닿았다.
차분히 말을 골랐다. 제 목소리에 여전히 단단히 힘이 서려 있다는 것은 알아 온화하게 말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래, 오늘 내가 본 것으로 유난을 떨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알겠다. 시어런의 연인들은 보통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뽐내고 싶어 한다는 말이지.”
“응, 맞아. ⋯그, 저기.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서 어쩌겠느냐. 아니, 아니. 괜찮아. 알려줘서 고맙다. 나도 이만 가서 자야겠어.”
“어, 으응. 그래. ⋯잘 자.”
“응. 쉐이든 너도.”
얼떨떨한 표정을 한 녀석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 얼빵한 녀석이 특별히 문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찬찬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어차피 이 세상을 전부 온전히 제힘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을 것이고, 또⋯. 이제는 그게 옳은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다 식은 차만 훌쩍 마신 뒤, 적당히 손 흔들어 인사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