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1화 (51/176)

51.

루실라 황녀는 쉐이든이나 마리앤의 세 배 정도 말이 많았다.

그 덕에 겨우 인원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도 시간이 많이 늦어져, 비도술 연습장을 나올 때에는 지난 금요일보다 주변이 깜깜했다.

씻지도 않고 곧장 기숙사 식당으로 향하여 저녁을 해결하였다.

묵묵히 비도만 던지며 연습을 반복할 수 있었던 저번이 더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어린 아해가 저도 같이 어울리고 싶다 하는 것을 밀어내기엔 마음이 불편하여, 이다음에도 꼭 함께하고 싶다는 루실라를 거절하지 않고 그러자 한 뒤 인사하여 보냈다.

벤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여 작게 하품을 하였더니, 꼭 아까 그러했던 것처럼 어깨를 도닥이는 손이 따라붙었다.

의아하여 시선을 올려 벤자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묵묵한 얼굴이었다.

“왜요?”

“아니, 그냥. 오늘 힘들어 보이길래.”

“별 대단할 것도 아닙니다. 그냥, 욕심나도 질러가는 길이 없어 고민입니다.”

“원래 무예라는 게 다 그렇더군요. 장검이든, 단검이든. 유난히 말 안 듣는 것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죠.”

“클라우디안 영식은 어떤 것이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저는, 글쎄요⋯. 말을 타는 게 제일 어렵던데요.”

“말?”

“예. 짐승들이 저를 잘 안 따르는 편입니다. 몸이 무거운 탓인지.”

그 말에 벤자민 클라우디안을 다시 찬찬히 보았다.

전체적으로 큼직큼직하고 사내답게 생긴 소년이다. 소년이라기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생김이 제 또래보다는 나이 들어 보였지만, 크게 험악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기세가 갈무리되지 않은 탓인가 여기어 함께 골몰하였다.

토끼와 고양이, 개와 말을 막론하고 이 땅에 와 만난 모든 짐승들은 말을 잘 들었다.

짐승이란 짐승은 모두 제 얼굴만 보이면 배를 까뒤집거나 쫄래쫄래 쫓아 와 얼굴을 비벼대고는 하였다.

사나운 짐승을 대하는 법은 몰라도, 가축 다루기로는 이전의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나쁘지 않은 솜씨를 가지고 있다 자부하기에 자신 있게 말을 꺼냈다.

“혹시 아카데미에 승마 수업도 있습니까?”

“예.”

“그럼 다음 학기에는 클라우디안 영식과 함께 그 수업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는 짐승을 잘 다루는 편이니 도와드리겠습니다.”

“에른하르트 영식께서?”

“예, 저도 도움받은 것이 많으니까요.”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그러마 답하는 대신 씩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나중에 기숙사 복도 갈림길에서 헤어질 즈음에서야 고맙습니다, 짧은 인사를 했다.

방 안에 들어서서 얼마나 많이 들여다보았는지 그 끝이 너덜거리는 시어런 아카데미 수첩을 꺼내어 들춰보았다.

배우고 싶은 것이 끝이 없었다. 당장 다음 학기에도 놓칠 수 없는 수업이 많았다.

과목들을 손꼽아 헤아리며 따로 메모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을 소모하였다.

* * *

주말에는 쉐이든이 저와 친한 동무들과 시전에 나간다기에 섞여 어울리기로 하였다.

나와 야영 수업을 같이 듣는, 낯선 아해들 사이에 쉐이든을 끼워 다닌 것이 어쩐지 공평하지 않은 것 같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쉐이든이 내 곁에 따라붙어 이것저것 손을 보탤 때마다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일러도, 한사코 저는 괜찮다며 이 몸을 꼬박꼬박 챙기려 드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나도 쉐이든처럼 그의 친구들과 어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여겼다.

그러나 정작 오늘 함께 외출하기로 하였다는 동무를 만나자마자, 나 홀로 괜한 생각을 한 것이 민망하여 속이 뜨끔하였다.

학생들의 약속 장소로 주로 쓰이는 아카데미 정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진회색 머리칼 아래로 다정한 갈색 눈을 빛내는 소년은, 야영 수업의 조장을 맡아 늘 나를 도와주는 데미안 크리스토퍼란 이름의 소년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으로 야영 수업에 들어간 날에도 데미안과 쉐이든은 퍽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둘이 잘 아는 사이였다 일러주었던 것을 잊고 있었다.

쉐이든이 그저 나를 신경 써서 친하지 않은 동무들과 어울려 준 것이라 생각한 것이 자만이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내게 이렇게 정을 쏟으며 애지중지 살뜰하게 구는 친우가 없어 착각한 것이 민망했다.

내가 괜한 일을 하였다 속으로 후회하는 동안 둘이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데미?”

“나도 방금 왔어. 단비랑 아르노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더라.”

“그레고리는?”

“뭐 좀 놓고 왔다고 다시 들어갔다가⋯ 아, 저기 오네.”

“안녕하세요!”

멀찍이서 작달막한 소년이 가방 줄을 양손으로 꾹 쥔 채 달려오고 있었다.

소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봐도 제 옆에 선 데미안과 쉐이든을 향한 인사는 아닌 것 같기에, 마주 고개를 까닥하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디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만 그의 얼굴을 살피고 있자니 소년이 불쑥 인사를 건넸다.

“마법부 1학년 그레고리입니다, 에른하르트 영식! 수업 시간에 뵈었었죠!”

“아.”

“마리앤이 소개해 줘서 최근에 알게 된 친구야. 성격이 좋더라고.”

“으핫, 아, 부끄럽습니다.”

유난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하는 그레고리가 손을 내밀어, 그 손을 붙잡고 악수했다.

얼굴은 긴가민가하였으나, 그 이름자는 기억에 없었다. 쉐이든이 마리앤과 친해져서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았다는 것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저의 동무들과 다르게 쉐이든의 무리는 서로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며 반말을 하는 모양이라, 그 사이에서 내가 툭 튀어나온 못처럼 느껴져 괜히 머쓱하였다.

용봉지회가 끝나고 오룡삼봉이 자리한 테이블에 소개받아 앉았을 적에 딱 이런 기분이었다.

이미 서로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무리 사이에 덩그러니 끼어 제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설명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내게는 퍽 어려운 일이었다.

묵묵히 입을 닫고 있으니 언제나처럼 쉐이든의 친절한 설명이 따라붙었다.

“이따가 만날 친구 중에 하나는 너도 아는 경영부 단비고, 하나는 단비 여자 친구. 가서 만나면 소개해 줄게.”

“단비에게⋯ 그,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뭐, 이제 슬슬 우리도 혼인 생각을 할 때긴 하잖아. 넌 아직 열세 살이지만, 우리는 모두 지난 1월에 사교계에 데뷔했으니까.”

“당장 급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영식. 평균적으로 스무 살은 되어야 혼인식을 올리니까요. 다만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이 생겨 약혼할 수 있는 나이가 열다섯이라는 것뿐이에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경영부 데미안, 단비는 고운 가루에 굴린 흰 찹쌀떡 같은 녀석이었다. 그 작고 어린 강아지 같은 녀석에게 혼인을 염두에 둔 여인이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확실히 나이만 헤아려보면 중원에서도 충분히 혼인이 가능한 나이일진대, 그 어린 외양 때문에 괜스레 미덥지 않은 탓이었다.

아해들과 함께 아카데미 교문을 나서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마차가 있었다.

올라탈 것을 권하기에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린 것들이 서로 어여삐 기대고 아끼는 모습을 곱게 보지 못할망정, 아직 때가 아니다 훈계할 주제가 못 되었다.

어쩌다 그 아해의 별명을 지어준 것이 전부인 인연으로 인륜지대사에 참견하는 것은 옳지 못했다.

아해들이 오늘 보기로 한 연극의 주인공이 이러하니 저러하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에 조예가 없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될 것을 알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오늘 만나기로 한 아해들을 마주하였을 때에는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익숙한 얼굴의 소년과 낯선 얼굴의 소녀, 둘이서 분수대 앞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손등 위에 쪽쪽 입술을 붙여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경하여 눈 둘 곳을 잃었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그, 저⋯. 저 아해들이냐?”

“아, 바로 찾았네. 단비! 아르노!”

“어? 일찍 왔네. 오늘 길에 마차가 별로 없긴 하더라.”

“약속 시간보다 십 분씩은 일찍 나오는 사람들만 모였으니 그렇지, 뭐.”

“그 얘기 페트릭이 들으면 울걸. 일단 들어가자. 뭐라도 먹을 거 사서 갈까?”

그러나 크게 놀란 것은 나뿐이었다. 아해들이 아무렇지 않게 서로서로 반가이 인사하였다.

잠시 덩그러니 서 있으니 이번에는 법학부 데미안이 나를 끌어다 두 아이에게 소개해 주었다.

수줍게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단아한 인상의 소녀는 단비보다 반 뼘쯤 더 컸는데, 새초롬하고 색 옅은 눈동자가 즐거운 듯 반짝반짝 빛났다.

“안녕하세요, 에른하르트 영식.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아르노 클레망이라고 합니다. 행정부 1학년이고, ‘단비’랑 예쁘게 사랑하고 있어요.”

“아, 예. 반갑⋯ 습니다.”

“우리 단비 애칭을 누가 지어줬나 정말 궁금했거든요. 오늘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내가 저 소년의 별명을 멋대로 지어 붙였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이 아카데미에 없는 것인가. 절로 탄식이 샜다.

여전히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한 반짝거리는 경영부 데미안, 단비는 방긋방긋 잘도 웃으며 아르노 클레망을 올려다보았다. 제 애인이 퍽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손을 꼭 맞잡고 놓지 않는 모습이 여전히 내 보기에는 마뜩잖았으나, 이리 당당하게 구니 내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싶어 말을 덧대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갈음하였다.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인 나를 그대로 두고 아해들은 저들끼리 주전부리는 무엇을 사자, 음료는 무엇을 사자 열띠게 토론하였다.

사람이 많아 번잡하니 잘 따라오라는 쉐이든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자꾸만 손을 꼭 맞잡은 단비와 아르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애써 참아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손을 잡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어떻게 당연시될 수 있단 말인가?

여즉 내가 에른하르트 소백작저에서만 지내 이런 것을 몰랐구나 하고 탄식했다.

일전에 마리앤이 미인계니 뭐니 떠들어 댄 것이 그 아해 딴에는 진담으로 말한 것인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닿아 정신이 혼곤하였다.

중원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관대작의 여식은 물론이고, 무인의 길을 걷는 여인들도 집안이 조금만 까탈스러우면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면사를 드리워야 바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혹여 그 미색이 뛰어나다 소문이 나면 해를 입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겠으나, 사내든 여인이든 정절 없이 구는 것을 천하다 여기는 풍속 탓이었다.

사파의 막돼먹은 놈들이나 아침부터 밤까지를 기루에서 뒹굴어 썩은 몸을 자랑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수신하고 몸을 단련하여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정파의 사내들은 연정에 쏟을 기력도 무예에 쏟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한 가문의 수장이 처첩을 두는 일이야 왕왕 있었으나, 물려줄 것이 많아 자식을 많이 보려 그러는 것이다 하고 겉으로 체면치레라도 하여야 욕을 먹지 않았다.

모용 아무개의 여동생 모용연화도 독을 빨아내기 위해 맨 발목을 한 번 보인 일로 제갈 아무개에게 훌떡 시집을 가지 않았던가.

나는 그것이 옳다 여겼다.

황망하여 이끄는 대로 걷고, 손에 쥐여 주는 것을 들고, 앉히는 대로 앉았다.

쉐이든이 내 것까지 미리 표를 구매해 두었다고 하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연극이 시작한다며 두툼한 천이 무대 위로 도르륵 끌려 올라가는 순간 눈을 홉떴다.

무대 위의 두 남녀가 서로를 터질 듯 꽉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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