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50화 (50/176)

50.

내가 예법 중에 자신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차를 마시는 법뿐이었다.

이는 오랜 시간 예법을 몸에 익혀 온 이 몸의 어미, 세이른 에른하르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서너 살쯤부터 매일같이 어미와 둘이, 혹은 아비까지 셋이 모여 티타임을 여는 동안 아비의 것보다 어미의 동작이 더 고아하여 멋스럽기에 무작정 따라 하기 시작한 일의 결과물이었다.

중원에도 어른을 만날 때에는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하여야 하고, 절을 할 때는 어때야 하고, 제사를 치를 때에는 어때야 한다 하는 등의 내용을 서책으로 엮여 대대로 물려주었다.

나 또한 나이가 쌓이며 버르장머리 없는 어린 아해들을 보고 혀를 차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정도는 지킬 생각이었다.

부채로 말하는 법이나 몸을 쓰는 예법은 배우고 싶지 않다 단호하게 말하니 부모 또한 그리하라고 두었으나, 평소 말씨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법 일체는 부모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 나 또한 어디서 부끄러운 몸가짐을 하고 다니지 않는다 자부하고 있던 차였다.

허나 정찬이 아닌 식사에서 훌륭히 예법을 차리고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누는 쉐이든 로제와 루실라 안티 시어런을 보고 있으면 일전에 쉐이든이 보여 준 색색의 노트 필기를 보았을 때와 꼭 같은 모양새로 또다시 쪼글쪼글한 어린 성성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식사하는 중에도 연신 그쪽을 흘긋흘긋 보았다.

얻어듣는 말보다 그 손짓 몸짓에 더 시선이 갔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로제 영식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모양입니다.”

“예?”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본 것 같아서요.”

갑작스럽게 루베르가 입을 열어 내가 화두로 오르자, 쉐이든이 빙긋 웃으며 이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 웃는 얼굴의 모양새나 식기를 집어 올리거나 내려놓는 손길이 평소와 달리 야살스러운 모양이라 순간 대꾸할 말을 잃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겨우 한 학년 위의 동년배 학생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 가득하였다.

“로제 가와 에른하르트 가는 교류가 잦은 편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선배님. 에른하르트 영식의 첫 생일 파티에서 만나 지금껏 친하게 지내고 있지요.”

“⋯아⋯. 첫 생일 파티라 하면은.”

“이제 알고 지낸 지 햇수로 8년이 갓 넘었습니다. 아카데미에도 함께 입학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입에 꿀을 바른 듯 사근사근한 말씨였다.

맞는 말 같기도 틀린 말 같기도 했다. 물론 쉐이든 로제는 내가 다섯 살 때 연 첫 생일 연회에도 참가하였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추었다.

생일 때마다 모든 아해들을 한 방에 몰아넣어 친분을 쌓게 하였으니 대화를 한 적도 많기는 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공평하게 모두를 기억하지 못했고, 공평하게 모두와 친하지 않았다.

또한 쉐이든과 함께 입학하기 위하여 내가 조기입학 신청서를 넣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내 조기입학 신청서가 승인된 것은 내가 에른하르트 가문을 이을 장남이면서, 일찍이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오른 덕이었다.

아카데미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다음 경지로 오르기 위해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 졸라대는 장남의 기운을 부친이 이겨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니 쉐이든과 미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헛발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먼저 들은 것이 있는 터라 그 아해 하는 것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쉐이든 로제가 날 도와주려 한 만큼은 나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동무여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수업 대부분을 함께 듣고 있기도 합니다. 제가 다른 동기들보다 나이가 어려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죠.”

“그거 정말 부럽네. 어릴 때 친구가 정말 오래간다는 말도 있잖아.”

“아카데미 내에서 새로 사귄 인연들도 모두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쉐이든과 내가 가까워 보이는 것이 쉐이든에게 도움이 되는 건 맞는 모양이었다. 루실라의 눈에도 은근한 호의가 어리는 것에 평소 하던 것보다 좀 더 맞장구를 쳐 주었다.

언제까지 이 칭찬 놀이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해서, 쉐이든이 내 식판 위에 맛 좋은 고기반찬을 얹어 주기에 곧장 받아먹었다.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식사나 하라는 의미인 것을 눈치채고 내 먹을 것을 먹으며 다시 쉐이든과 루실라의 하하 호호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일전에 벤자민과 루베르를 곁들여 셋이 식사했을 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라 영 적응하기 어렵고 어색하였다.

묵묵히 나 먹을 것 먹으며 가끔 고개나 끄덕여 주고 있으려니, 루베르 황자도 내 식판 위에 쉐이든이 주었던 것과 같은 고기반찬을 얹어 놓았다.

의아하여 바라보자 당혹스러워하는 모양새가 별생각 없이 따라 한 것 같기에 짧게 웃었다.

“잘 먹겠습니다.”

“⋯응.”

어쨌든 한 번 준 것을 되돌려 주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원래 먹을 것 하나는 곧잘 받아먹고 살았던 터라 그냥 먹었다.

오며 가며 사람들이 먹을 것을 챙겨주어도 몸을 쓰다 보면 곧잘 배가 꺼져 허기가 지는 나이였다. 양껏 먹어 깨끗하게 식판이 비었을 적에야 몸을 일으켰다.

쉐이든도 식사를 잘하였다 인사하며 자리를 떴다.

쉐이든이 가고 비도술을 연습하기로 한 넷만 남자, 루실라가 쉐이든이 귀여웠다며 칭찬을 하기에 내가 봐도 그 녀석은 귀엽다 대꾸하였다가 큰 웃음을 샀다.

깔깔깔 웃는 루실라의 목소리가 얼핏 야영 수업을 가르치는 세드릭 교수를 닮은 것이 아주 조금 불편하였다. 묵묵히 웃지 않는 루베르와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작년에 비도술 수업을 들었다는 루실라 또한 재주가 좋았다.

루베르가 묵묵하게 바로 서서 비도를 던지는 방법과 바른 자세에 대해 꾸준히 조언하였던 것과 달리, 루실라는 달려가면서 비도를 던지거나, 앉은 자세로 던지거나, 펄쩍 뛰며 던지거나 하며 장난질을 치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내 보기에는 그 또한 놀라운 재주라 몇 번이나 박수를 쳐 주었는데, 마치 광대놀음을 구경하는 기분이 되어 맘 한켠으로는 저어하기도 하였다.

아무리 그 성정이 호탕하다고 해도 귀한 피를 타고났는데 이리 구경거리로 삼아도 되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눈을 가리고 비도를 던져 보겠다며 루실라가 루베르의 목에 매인 타이를 풀어 제 눈에 감을 즈음 해서는, 저들이 하겠다는데 내가 무엇을 어쩌겠나 싶어 그냥 흥미진진 즐거이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슥 번지는 기운에 헛웃음이 일었다.

“눈을 가리시고 오러를 펼치시면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아니지,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비도를 던질 수 있다는 게 중요해. 아주 깜깜한 밤에도, 자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을 때에도 오러를 펼쳐 주변을 살필 수 있다면 암살당할 위험이 없다는 거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마는.”

“응? 안 놀라네. 보통 이렇게 말하면 놀라던데.”

“왜요?”

“어? 아니, 암살 얘기만 하면 발작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예?”

웃는 낯으로 말하기에 나도 스스럼없이 대답하였다가 해설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본 뒤에야 그녀가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 위하여 짓궂은 농담을 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도 꼭 같은 이유로 눈을 감은 채 검을 사용하는 법을 몸에 익혔다.

중원의 은원이란 것이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 것이라, 내가 죽인 많은 악적의 친구와 동료가 나를 죽이러 찾아오던 시절이었다.

일부러 훈련한 것은 아니어도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 땅은 황녀가 암살 위협을 입에 담으면 놀라는 곳이라는 사실을 숙지하려 노력하면서 다시 말을 골랐다.

검을 손에 쥔 자라면 어떤 때에도 위협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정론을 이야기하였더니 다시 까르르 웃기에 안도하였다.

중간중간 몇 차례 이런저런 조언을 덧대는 루실라의 방법을 따라 하려 하였지만, 매번 조금씩 자세가 바뀌는 것이 도리어 더 혼란스러웠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루베르 황자를 붙잡아 다시 자세 교정을 부탁하였다.

아이가 지난번과 같이 내 자세를 잡아 주어 편히 과녁에 시선을 두었다.

몇 번 시험해보니, 그래도 한평생 검을 쥐고 살아 온 터라 과녁에 비도가 꽂히기는 하였으나 정확도나 실리는 힘이 아쉬웠다.

비도를 날릴 적에 내공을 어찌 수발해야 하는지를 몰라 매번 다른 방식으로 시험해보아야 하는 탓에 결과물이 들쭉날쭉했다.

첫 번째에는 단전에서 바로 실은 힘을 양지혈(*손목의 혈도)까지 쏘아 보냈으나 마뜩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중단전에서부터 곡지혈과 소해혈(*팔꿈치의 혈도)에 유난한 흐름을 실어 보려 했으나 그 또한 애매하였다.

그 형과 식, 내공의 수발 방식이 모두 세세하게 정해져 있던 남궁의 검으로 무예의 시작점을 잡았으니 더더욱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 어려워 답답한 마음이 일었다.

미리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 밟는 것은 얼마나 편하고 좋았던가.

시어런에 와 배우는 공부의 대부분이 정해진 것을 그저 받아 익히면 되었는데, 비도술만큼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차라리 무공을 좀 더 익혀 허공섭물(*기를 사용하여 멀리 떨어진 사물을 움직이는 기예)이나 이기어검(*손에서 떨어진 검이 자유자재로 움직여 적을 공격하는 경지)이 가능할 만큼 내공을 쌓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 에른하르트 영식. 조금 더 있으면 루벤이 터질 것 같아.”

“예?”

“아냐, 아니⋯.”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하다 그만.”

루실라가 지적하고 나서야 내가 루베르의 팔뚝을 붙잡고 그가 비도를 들고 이리저리 움직일 적마다 근육의 모양새를 손으로 따라 훑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내끼리 뭐 이런 것으로 문제 삼는가 싶어 올려다보았을 때, 루베르의 뽀얀 피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동작을 좀 보아달라 부탁할 때도 쭈뼛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도리어 루실라가 좀 더 싹싹하니 날 떡 주무르듯 하여 자세를 잡아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냥 이 아해가 워낙 부끄럼탐이 많은 편인 것 같기도 하였다.

이렇게 낯을 가리면서 어떻게 한 나라의 황제가 되려나, 하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예의상 꾹 참았다.

“괜, 찮아. 그⋯ 팔을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던 거지?”

“예. 분명 저와 비슷한 방식으로 팔을 뻗고 오러를 끌어올리는 것 같은데 저는 제가 던지는 비도의 길을 예측할 수 없으니 어디에서 어긋났는지 몰라 고민입니다. 그, 오러를 덧씌운다 하셨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떤 식으로 붙잡아 사용하시는지가 궁금합니다.”

“응, 그⋯ 보여 줄 테니까 한 걸음만 뒤로⋯.”

“예.”

얌전히 뒤로 물러나 루베르가 하는 것을 보았다.

최대한 보여 주고 설명하려 노력하는 아해의 모습은 가상하였으나, 내 안법이 깨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기운을 읽어내기에는 부족하였다.

열심히 보아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절로 미간이 좁혀드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내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어쩐지 처음보다도 쭈뼛거리는 기색의 루베르가 몇 차례나 반복해서 비도를 던져 주어 조금 더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수련이 끝날 즈음 해서는 루실라가 큰 소리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그 까닭을 짐작할 수가 없어 의아하였다.

벤자민이 어깨를 도닥여 주기에 별일이 아닌 것을 알고, 신경 쓰지 않기로 하였다.

비도에 내공을 싣는 법이나 조금 더 골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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