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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48화 (48/176)

48.

미리 계획했던 대로 이제 사용하지 않을 면포를 단검으로 잘라 끈으로 삼았다.

나란히 둘러앉아 나뭇조각들을 이어 덧대고 묶고 하는 일을 반복하여 하나로 이었다.

긴 막대를 만들어서는 연잎처럼 물 위에 동동 뜬 꽃을 물가로 끌어오느라 한참을 휘적거렸다.

이 작업은 여럿이 교대로 하였는데, 그저 툭 쳐서 끌어오려 하여도 마냥 곧은 막대로는 갈고리처럼 거는 것이 어려웠다. 자꾸만 꽃대가 제 줄기 꽂힌 자리로 돌아가려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탓이었다.

그래도 한참을 애를 쓰니 요령이 붙어 어른 주먹마냥 큼직한 로기의 꽃 두 송이를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상자에 잘 담아두고 보니 벌써 온실에 들어온 지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전에 미리 필기해 두었던 약도를 꺼내 들어 살피던 제니가 방긋 웃었다.

“그래도 동선은 괜찮게 잡은 것 같아요. 여기에서 입구로 돌아가기 전에 서쪽으로 가면 모라스 박하 화단이 꾸려져 있을 거예요. 거기 들렀다가 나가면 되겠어요.”

“이곳의 식생들이 다 이렇게 멀찍멀찍 떨어져 있는 게 설마 이 과제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걸요. 여기 보니까 구역마다 걸려 있는 마법이 조금씩 다르거든요. 온도나 습도, 모래의 질감 같은 것들이 약재를 성장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니까 거리를 떨어트려 둔 게 아닐까 싶은데.”

“와, 여기 걸린 마법진을 알아볼 수 있어요?”

“기본적인 것만 조금이요. 아, 이것도 적을래요?”

마리앤이 알아본 마법진들에 대해 해설하고, 제니가 받아적는 것을 구경했다.

확실히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 따위가 구역 구역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중원에서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은 사천 서쪽에나 있었다. 가 볼 일이 없어 사막을 보지 못한 내게는 영 꿈인 듯하였다. 존재는 알고 있되 겪어 보지 못한 낯선 것이었다.

다시 주섬주섬 짐을 꾸리자, 평소 조용하여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이 없던 이반 홀모스가 재차, 너무 수고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맙다 하길래 그 등이나 투덕이며 두드려 주었다. 후덥지근한 열기에 다들 지쳐 쓰러지기 전에 얼른 나가야겠다 다짐했다.

모라스 박하 화단까지 걷는 길 역시 발이 푹푹 빠져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가 가장 앞에 서기로 하였다.

나무를 오르고 짐을 나르고 힘을 쓰고 하느라, 어린 몸에 무리가 있어 저도 슬슬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진각을 밟아 바닥의 모래를 평탄케 하거나 압박하듯 눌러 단단하게 만드니 아해들이 휘청이는 일이 줄어들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이들은 보리 이삭 줍는 아낙들처럼 박하 잎 중에 크기가 적당한 것을 고르며 또다시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모라스 박하는 그 잎이 도톰하고 흰 솜털이 고루 나 있는 것이 좋고, 복통이 있을 때 여러 차례 씹어 입 안에서 즙을 내는 것으로 임시방편을 하는 약초라 하였다.

나 또한 잎사귀를 고르고 골라 적당한 것을 찾으며 아이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교수님이랑 함께 왔을 땐 이렇게 힘든 줄 몰랐는데, 진짜 죽을 것 같아요.”

“그땐 진짜 좀 긴 산책 한다, 하는 기분이었잖아요. 막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바닥도 단단하고, 이렇게 덥지도 않고.”

“세드릭 교수님이 4서클이라고 하셨죠?”

“네, 그분은 생물 주전공에 마법을 부전공으로 이수하여 서클 자체는 높지 않다고 들었어요. 대신에 생활 마법을 숨 쉬듯이 쓰신다고.”

“시어런 아카데미의 교수씩이나 되면 서클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건 마나와 오러 수업을 맡은 더글라스 머스탱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중원의 강자들은 자신의 힘을 곧 명예로 삼았다. 땅을 구르지 않고 바른 자세로 고고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을 제일로 쳤다. 수준이 낮은 이들에게는 손을 쓰는 일도 없었다. 검을 겨루는 일이 아닌 사사로운 일에 힘을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러나 시어런의 강자들은 달랐다. 가르치는 아이들의 기감을 확장하는 일에, 혹은 아이들과 걷는 길을 좀 더 편하게 꾸리는 일에 아무렇지 않게 힘을 사용하였다. 저 또한 모래를 다지는 일에 내공을 소모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어깨가 으쓱하였다.

시어런에서는 앞서가는 이가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아군을 이끌었다.

중원에서야 그래야만 한다 하기에 적을 쳐내며 살았으나, 차근차근 배워가고 익히는 이 땅의 것들이 마음에 스몄다.

과제에 필요한 만큼의 약재를 전부 구해 상자에 담아 돌아가는 길 또한 후덥지근하였으나 마음만은 가뿐하였다.

나달나달해진 아해들을 이끌고 온실 입구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아직 과제를 끝마치지 않은 학생들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사막 지형 온실에 배정된 것이 체력적으로는 힘들었어도 가장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숲 지형으로 간 아해들은 우거진 수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고, 정글 지형으로 간 아해들은 벌레 따위와 씨름하였다고 했다. 바닷가 지형으로 간 아해들은 해저 동굴로 들어가기 위해 수영을 하느라 녹초가 되었다. 평원 지형으로 간 아해들만 편안하게 수풀을 거닐다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다들 서로서로 아는 얼굴들을 찾아 위로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과제를 포기하거나 완수하지 못한 팀은 단 한 팀도 없었다.

시어런 아카데미는 이 너른 시어런 제국의 최고위 교육기관이었고, 학생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등록금을 내고 입학하거나, 혹은 그만한 금액에 상응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기본적으로 다들 독한 구석이 있었다.

교수들 또한 아이들의 한계를 알아 그 끝까지만 몰아세우는 데에 아주 능숙하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닷가 지형으로 다녀와서 해저 동굴을 탐험하느라 여덟 번은 자맥질을 했다며 발을 질질 끄는 쉐이든의 응석을 받아 주다 못해, 그를 업고 기숙사 건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내 짠 냄새가 났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온실 안에 그 많은 물을 끌어오고 동굴까지 만들어 냈는지 궁금하고 신기하여 다음에 바다 지형 온실에도 꼭 들어가 보아야겠다 결심을 했다.

* * *

일전의 대화 이후로 루실라가 나를 지극히 친근하게 아끼기 시작하였다.

얼결에 고급 검술 시간에 함께 하는 인원이 대폭 늘었다.

본래 동급생이던 벤자민 클라우디안과 둘만 다니던 것에 루베르 안티 시어런 황자와 루실라 안티 시어런 황녀가 따라붙었다. 본래 루실라와 함께 다니던 맷 니코라는 이름의 꼬질꼬질한 소년도 합류하였다.

다섯이 무리 지어 다니니 주변의 시선이 쏠려 중원의 오룡삼봉이 이런 기분이었겠거니 하였다.

중원 무림맹에서는 삼 년에 한 번씩 용봉지회를 열었다. 검 가진 놈들이 서로 궁금한 것은 거진 하나뿐이었다. 너와 나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너의 검식과 나의 검식을 비교하여 보았을 때 무엇이 더 강한지 하는 것이었다.

정파의 이름을 달고 있어 악다구니하며 상대를 깔아뭉개지는 못하되, 각 문파는 자신이 아끼어 길러낸 제자들의 순위를 매겨 이다음 세대에서는 어느 문파가 제일일 것이다 점치는 일을 수시로 하였다.

각 문파에서 서너 명 정도, 지학(*15세)은 넘고 이립(*30세)은 되지 않은 이대 제자와 삼대 제자들 중에 꼽혀나온 인물들이 비무대 위에 섰다.

좋은 토양을 고르고 골라 좋은 씨앗을 심어 아끼며 길러냈으니 빛나지 않는 인재가 없었다.

나 때에는 그중에서 소림에서 나온 녀석이 무당과 어깨를 견주어 선두를 달렸다. 화산과 종남이 그 뒤를 쫓고, 그다음에는 오대세가의 인물들도 한두 번은 자리를 지켰다가 밀려나고는 하였다.

강한 자를 숭상하는 것이 무림의 기조인 만큼 그 세대의 가장 강한 인물로 꼽힌 다섯 청년과 세 여인은 늘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고는 했다.

치기 어린 나이의 나 또한 그들 사이에 끼고 싶어 전전긍긍했던 적이 분명히 있었고, 그들의 형편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들 중 몇과 친분을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떠나간 이를 애도할 즈음 해서는 그런 욕심도 잘 피운 향처럼 좋은 기운만 남기고 허물어 없어졌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정도 연배의 아이들에게 우러러보는 시선을 받으니 멋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마법부에서 시선을 모을 적에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면 내 몸에 새겨져 있는 검수로서의 자긍심이 퍽 대단하구나 싶었다.

이득이 없지도 않았다.

엇비슷한 수준을 가진 일류의 무인들은 몸이 깨인 만큼 안법도 깨어 있어, 타인의 경지를 보고 같은 부분에서 감탄을 하고 같은 부분에서 아쉬워하였다.

벤자민과 둘이 있을 때는 부러 말을 붙일 생각을 하지 않아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던 것들도 저들끼리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으니 내 구미에 잘 맞았다.

특히나 오늘의 화두는 이전에 나와 에드윈 키아드리스가 펼쳤던 대련에 대한 것이었다.

멋쩍기는 하였어도 남의 시선으로 평하는 대련의 모양새나 이음매 따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 들으며 시연을 보고 하는 것이 또 색다른 방법이라 흥미가 일었다.

“가장 처음에 키아드리스 영식이 아이스 스피어를 단숨에 전개했잖아. 그걸 어떻게 인식하고 피할 수 있었던 거야? 시선을 위에 두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기감을 천장까지 닿도록 펼치고 있어 가능했습니다. 워낙 일시에 많은 마나를 사용하여서, 가까이 있다면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어요.”

“거기에서 발을 이렇게, 박차서 이렇게 피했었지?”

“내공, 아니 오러를 이렇게 써서⋯ 발밑에 얕게 터트리면서 속도를 높여서.”

“이렇게?”

“아뇨, 이런⋯, 식으로.”

“아, 좀 알겠다. 이렇게 몸을 쓰니까 블링크도 따라잡고 그러는 거구나.”

“블링크?”

“아, 몰랐어? 시야에 닿는 위치로 몸을 빠르게 이동하는 마법 있잖아. 이치를 따져 보면 공간 이동이랑은 좀 다른 계열이긴 한데⋯, 직선거리의 장애물이 없는 장소로만 몸을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한 편이지.”

“아.”

새로이 배우는 것도 많았다.

나에게 있어서 익숙한 것은 손에 이미 쥐어져 있는 검을 휘두르고 내게 주어진 몸을 사용하는 것이었고, 마법의 이름자나 그 구동 방식 같은 것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쉴 새 없이 가르치고 사사하는 이곳에서 한 해 일찍 입학한 선배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익히 알고 전달할 수 있는 자리인지를 뼈저리게 배웠다.

내가 흥미를 보이는 것을 알고 루베르도 이런저런 지식을 쏟아내었는데, 확실히 그는 말재간이 루실라보다 덜한 편이라 입을 열어도 말할 기회를 자주 빼앗기고는 하였다.

그때 나는 별을 보며 속내를 가라앉히던 늦은 밤의 고요를 떠올리고는 하였다.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눈앞의 소년은 그 얌전하고 음전하던 소년과는 다른 이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늘 벤자민과 둘뿐이었던 목요일의 점심 식사도 다섯이 함께하게 되었다.

맷 니코의 어머니가 그림스베인 공작가 태생이라는 것을 식사 중에 알았다.

지금 그의 아버지는 일개 자작이지만, 어머니의 태생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루베르, 루실라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에 대해 입학 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며 하는 이야기가, 이 몸의 부친과 모친의 사랑 이야기가 전 세대 사교계에 무척 유명하였던 만큼 자신의 부모도 시끄럽고 요란한 연애를 했기에 내가 궁금했단다.

입학 전까지는 내 부모에 대한 것도, 그리고 맷 니코의 부모에 대한 일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는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며 먹던 것이나 마저 먹었다.

철의 그림스베인의 가풍이 워낙 씩씩하고 단순한 것과 몸 쓰는 것을 좋아한다기에, 대강 시어런의 하북팽가와 같은 곳이구나, 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맷 니코의 어미가 그의 아비를 납치하듯 가로채 사랑을 하겠다며 야반도주를 해서 열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야생에서 살았다는 말에 경악하여 꼬질한 소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식사 시간에, 제 가리는 음식이 없다는 말에 덧붙일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북팽가보다 더한 것들이다 싶어 탄식이 절로 나왔으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애써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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