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막리르 군락에 도착했다.
거대한 선인장들이 만들어 낸 그늘 아래는 조금 시원하였다.
굵고 긴 가시가 빼곡하여 등을 기대어 쉴 수는 없었으나, 그늘에 널브러져 주저앉은 아해들에게는 이것도 다디단 휴식인 모양이었다.
일전에 이십여 분 걸려 도착한 길을 한 시간 가까이 소모하여 온 것이 기가 막혔는지 다들 피슬피슬 웃음을 흘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톱을 이겨내며 걸어 온 탓인지, 덥고 건조하게 설정된 기후 탓인지. 바람이 일 적마다 피부에 까끌까끌하게 닿아 쓸리는 모래가 텁텁하여 나도 옷자락을 몇 번 털어내었다.
“저 가시를 잡아 밟고 올라가, 막리르의 손을 채취해 오면 된다고 기억하는데. 맞아요?”
“예에⋯. 맞긴, 해요. 우리, 좀 쉬었다가 할까요⋯?”
“다들 쉬는 동안 내가 좀 따 오려고 그럽니다. 다섯 개?”
“그것보단 조금 더 많이⋯?”
“⋯제가 돕겠습니다.”
묵묵히 앉아 물을 축내던 이반 홀모스가 휘청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서무부에 쌍둥이 형제가 있다던 밤색 머리 소년은 쑥스러움이 많고 과묵하지만, 잔일에 손손을 잘 보태는 편이었다.
불을 피울 적에도 자진하여 제가 옮길 수 있는 나무토막을 옮기거나, 주변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도맡은 전적이 있었다.
녀석이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좋지만, 기진한 녀석을 끌어다가 나무를 오르라고 시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여기만 왔다가 돌아갈 것도 아니고⋯. 아마 각 조에 검술부를 하나씩 끼워 넣은 것도 이런 일을 도맡으라는 교수의 뜻일 것이 분명하니, 내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뭐 주의할 점이 있었나요?”
“그냥,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지 말아라⋯ 하는 거랑. 색이 완전히 파랗게 변하지 않아 뿌리가 붉은 것은 효능이 약하고 즙이 많이 나와 보관이 불편하니까 파랗게 잘 익은 열매만 따 오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고마워요, 에른하르트 영식⋯. 밑에서 응원할게요⋯.”
외우는 것에 재능이 있다던 학술부의 제니가 또박또박 대답을 해 주고, 시들시들해진 마법부의 마리앤이 힘없이 주먹을 치켜들며 응원을 덧대어 주었다.
상자를 들고 올라가기는 번거로울 것 같아 적당한 크기의 천 주머니를 배낭에서 꺼내어 들고 선인장 가시를 밟아 올랐다.
내공 공부가 좀 더 깊어 모은 기운이 많았더라면 한걸음에 오르내릴 수 있었을 터인데. 가시를 디딤돌 삼아 몇 번을 뛰어오르고 나서야 열매가 맺혀 있는 움푹한 구간에 닿았다.
막리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선인장은 제일 작은 것의 크기가 일 장(*3m)에 다다랐고, 큰 것은 작은 것의 두 배 이상 자란다고 하였다.
막리르의 손이라고 불리는 파란 열매들을 옮겨 심으면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금방 깊은 뿌리를 심어 쑥쑥 자라난다는 말도 있었다. 습한 기후에는 그 표면이 무르고 상하기 때문에 사막에서나 볼 수 있다 배웠다.
색이 붉지 않고 푸른 것을 골라 주머니 안에 넣었다.
선인장 하나에서 쓸만한 것을 대강 두세 개쯤 고를 수 있었다. 한 선인장에서 다른 선인장으로 풀쩍 뛰어 다음 열매를 땄다. 아래에서부터 죽 올라오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상자 안에 다른 약재들도 넣어야 할 것을 생각하여 일곱여 개 정도만 주머니에 쓸어 넣고 단번에 아래로 뛰어내렸다.
휙, 푹신한 모래톱 위에 올라섰을 적에 눈이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는 아해들의 눈앞에 주머니를 흔들어 보여주며 집 나간 정신을 되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와⋯. 저번 대련 때도 생각했지만, 사람이 아니라 토끼 같네요, 에른하르트 영식.”
“⋯보통 이런 때는 경지가 높다는 칭찬이 돌아오지 않습니까?”
“아니, 근데 정말 날아다니니까.”
마리앤이 수선을 부리려는 것을 손사래 쳐서 막고 제출해야 할 상자 안에 차곡차곡 따 온 열매들을 담았다.
정리하는 것을 옆에서 거들던 이반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어물거리길래 까닭을 물었더니, 검술을 수련하여 나처럼 되려면 몇 년이나 해야 하느냐 하였다.
이전 생의 다섯 살에 처음 하늘의 길을 따라 걸음 떼는 법을 익혀 몇십 년을 수련한 덕분에 이 땅에서도 겨우 반 갑자 내공으로 이런 재주를 보일 수 있게 된 나였다.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겨우겨우 대답을 짜냈다.
“⋯한, 이십 년⋯? 아니, 십오 년⋯?”
“⋯실례지만 에른하르트 영식이 올해 열세 살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음.”
충분하지 않은 설명이었는지, 다들 당연하게 농담으로 받아 와르르 웃었다.
고민하다가 오 년 안에 이렇게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줄까 하고 물었더니 위험할 것 같아 하지 않겠다 하기에 어쩐지 속이 뜨끔하였다.
그다음 행선지는 막리르 군락에서 좀 더 북쪽으로 먼 길에 덩그러니 놓인 오아시스였다.
사막의 열기로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물에서 피어나는 로기의 꽃잎은 돌돌 말아 꿀꺽 삼키면 몸에 나는 열을 잡을 수 있다 하였다.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고 해도 아직 어린 아해들이라 걸음걸음을 버거워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그 꽃을 찾자마자 이 아해들에게 먼저 먹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저도 사내라고 묵묵히 걷던 데미안이 휘청하는 것을 붙잡아 넘어지려는 것을 막은 뒤, 결국 짐은 모두 내가 들겠다 선언하였다.
나를 걱정하며 거절하는 아이들을 여전히 멀쩡한 몸을 근거로 들어 어르고 달래니 다들 알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퍽 순했다.
적당한 곳에서 짐들을 풀어,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가자 합의하였다.
가방을 열었을 때 나는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각기 한 짐인 가방에 간식거리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긴 기껏해야 다섯 시간 남짓한 일정을 반복하는 일이었다. 자고 갈 일도 없어 짐만 되는 침낭은 강의실에 두고 온 학생도 왕왕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이걸 언제 먹으려고 가져왔습니까?”
“오늘 과제 다 마치면 같이 먹자 하려고 그랬어요⋯.”
“저도요.”
“저도⋯.”
“이 초콜릿은 이미 다 녹은 것 같은데.”
“아, 안 돼! 마리앤, 이것 좀 다시 얼려줘요.”
“내가 그러려고 마법 배운 줄 알아요? 맞아요. 얼른 줘 봐요.”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입을 벌릴 적마다 모래바람이 서걱서걱 같이 씹히는 곳에서 뜬금없이 아해들과 둘러앉아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주전부리를 입마다 물었다.
간식 중에는 유난히 단 것이 많았는데, 내가 단것을 좋아하는 것이 보기 좋아 이렇게나 잔뜩 들고 왔다는 말에 밀어낼 수가 없어 주는 대로 또 납죽납죽 잘 받아먹었다.
간식거리 중에는 이전에 제니가 좌판 상점에서 구매한 포도주 맛 육포도 있었는데, 데미안은 무척 질색하였으나 씹을수록 별미였다.
내 나이가 차면 주당이 될 것이라 예언하는 데미안의 말에 찬찬히 수긍했다.
이전 생에도 객잔에 들를 때마다 죽엽청(*무림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향이 짙고 도수가 높은 술) 한 병씩은 너끈히 비우던 나였다.
시어런의 술맛이 궁금해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얼른 나이가 차서 편히 포도주를 먹고 마실 일이 기대가 되었다.
가방의 내용물을 몰아넣을 수 있는 만큼 정돈하여 넣고, 빈 가방 몇은 잘 접어 짐을 정리한 가방에 넣었다.
가방 다섯이 가방 셋으로 줄어든 뒤에는 아까와 꼭 같이, 등에 가장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한쪽 어깨에 둘을 몰아서 들었다.
남는 손에 상자를 들자 딱 알맞게 편했다.
다 같이 음식을 먹고, 물도 마시고 하니 아해들도 기운이 돌아온 듯 씩씩하였다. 이후 걷는 길에는 간간이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웃음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또 한참을 걸었다.
아해들의 걸음으로 또 꼬박 한 시간을 걸었을 땐 다들 땀에 젖어 죽상이 된 것이 꼭 잘 빨아 널어 둔 수세미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다.
오아시스에 도착하자마자 다들 땀이 흥건한 얼굴과 손을 미적지근한 물로 씻은 뒤 손수건으로 닦아 몸단장을 하였다.
자맥질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들이었지만 갈아입을 옷도 없고, 몸을 닦을 수건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인공 오아시스의 깊이나 그 안에 거주할 생물에 대한 정보가 없어 함부로 행동하진 못하였다.
아직 수상비(*물 위를 걷는 신법)를 펼칠 수 있을 만큼의 공력이 없어 로기의 꽃잎을 건져내는 작업도 지난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그냥 훌렁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아직 이 몸이 어리다 하여도 처녀들 앞에서 옷을 훌훌 벗을 수가 없어 저어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한, 데미안의 설득이 기가 막히게 옳기도 하였다.
“지금 우리는 과제를 하러 온 거니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야죠. 지금 챙겨야 하는 건 해열, 진통, 복통에 대비하기 위한 약재들이잖아요. 이런 사막에서 난데없이 준비되지 않은 약재를 찾아야 할 일은 하나뿐이에요.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아프게 됐을 때를 대비하겠다는 말이죠.”
“와, 일리 있는 말이네요. 그래서요?”
“총인원이 다섯인데 그중 최소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인원이 부상자라고 가정해 보는 거죠. 그러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을 때 바로 물속에 뛰어들 수 있을까요? 최대한 안전한 방법을 궁리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럼 로기의 꽃을 건져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야 할 텐데⋯.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마땅한 게 있어요?”
그렇게 긴 막대를 들고 다닐 리가 없다. 아까 한 차례 가방을 뒤엎어 정리한 덕분에 어떤 물건을 들고 왔는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제 가슴팍에 매어 둔 홀스터에서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오렌지와 사과를 손질하는 것에 앞서 나무토막을 깎게 생긴 단검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손도끼를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 이것이 옳았다.
“전에 그 마법에 걸린 쓰고 또 쓸 수 있는 장작 있잖습니까. 그걸 잘 갈라서 어떻게 묶어보는 건 어때요.”
“손수건이나, 아까 육포를 담았던 보자기 같은 걸 찢어서 끈을 만들고요?”
“근데 이렇게 손바닥만 한 단검으로 장작을 어떻게 쪼개려고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 주는 것이 나았다. 가방 한켠에 넣어두었던 장작을 꺼내어 그 절반이 되는 지점을 향해 단검을 세로로 쿡 내려찍었다.
중원에서 장작을 패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은 하인의 일이었으나, 자고로 무인이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검으로 갈라야 직성이 풀리는 작자들이었다.
검을 수련한다 하여 검으로 나뭇등걸을 패거나 떨어지는 나뭇잎을 가르거나 분분한 낙화를 가르는 것 정도는 젊은 시절 자랑삼아 몇 차례나 해 본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결을 따라 절반으로 쪼개진 장작을 어림하여 살피고, 이번에는 또 반대로 검을 푹, 푹 찍었다.
몇 차례를 반복하니 사내 허벅지마냥 굵직하던 장작은 손가락 두 개 정도 굵기의 여러 토막으로 조각이 났다.
입을 떡 벌리고 있던 아해들 중 마리앤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한마디 했다.
“⋯아니, 이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