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요사이 바쁜 모양이지, 하며 농을 걸어오는 마엘로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에 예상했던 대로 루실라와 루베르를 함께 맞이하였다.
소녀는 그 지위나 행색에 걸맞지 않게 삐딱하게 서서 건들거렸다.
그녀의 시원스러운 걸음이나 당당한 품새를 알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영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여겨졌다. 다시금 웃음이 픽 샜다.
이미 수업이 시작할 적에 서로서로 간단히 묵례하며 인사를 마쳐 새삼스럽게 안녕하냐 물을 것이 없어 묵묵히 웃음을 삼키고 있자, 루실라가 활기차던 목소리를 애써 낮게 꾸며내었다.
콧등을 찡긋하여 주름진 얼굴이 정말로 귀여워 부러 장난을 치는 것이 빤히 읽혔다.
“왜 사람을 그렇게 보고 웃어?”
“재미있어서요.”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선배가 어여쁜 얼굴로 그런 표정을 하는 것이.”
“어?”
이쪽을 바라보는 까만 눈 두 쌍이 동그랗게 뜨이는 모습에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남매의 생김새가 다르다 여겼는데, 놀란 표정은 둘이 같은 사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닮았다.
멋쩍은지 제 좁혀든 미간이나 젖살이 덜 빠진 뺨을 문질러 만지는 루실라를 살펴보는 루베르의 표정은, 그 나이 또래의 남매가 흔히 그러하듯 그녀가 어여쁘다는 소리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멋진 대련 잘 봤어요.”
“흠, 뭐, 응. 보는 눈은 있네. 나도 에른하르트 영식 얘기는 많이 들었어.”
“수업 시간에요?”
“아, 뭐⋯. 그걸 포함해서. 여러 군데에서 듣고 있지. 요즘 단검술 연습한다며?”
“예.”
“얘보단 내가 더 잘 가르칠 텐데. 선생을 바꿔보는 건 어때?”
“루실!”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전전긍긍하는 모양새가 정말로 갓 사귄 동무를 빼앗길까 안절부절못하는 꼴이었다.
낯선 생김의 얼굴이어도 어린 아해들의 표정이 그 속내를 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투명한 것이 귀엽고 유쾌했다.
내가 정말로 냉큼 선생을 바꿀 것처럼 보였는지, 루베르가 진중한 어투로 몇 마디 반박했다.
지금 너는 비도술 수업을 듣고 있지도 않고, 작년에도 제가 성적이 더 나았고, 넌 늘 하고 싶은 대로만 하니까 제대로 가르칠 리 없다 하는 내용이 그 요지였다.
루실라 또한 가만히 듣고 있을 성정이 아니라서, 안 해 보면 모르는 거라느니 사람을 가르쳐 본 적 없는 건 너도 똑같다느니 하며 대거리를 하였다.
얼결에 멍하니 서서 남매 싸움을 구경하게 된 입장으로서는 그저 둘 다 성정이 순하고 착한 아이들이라 싸울 적에도 고운 말만 사용하는구나 싶어 마냥 얌전히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우악스럽게 내 손목을 잡아챈 루실라가 고개를 바싹 들이밀며 물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은 어때, 응? 내가 가르쳐 주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무슨⋯! 괜히 협박하듯 굴지 마, 루실!”
“지금 선배님께서는 비도술 수업을 듣고 계시지 않다 하셨지요.”
“아, 그렇긴 한데, 교수님 얼굴은 나도 아니까⋯!”
“그러시다면야. 금요일에 두 선배님을 함께 모시겠습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데도 꼬시는 것 같지?”
“예?”
“아니, 아니야. 애들이 왜 이렇게 에른하르트 영식에게 홀리는지 알 것 같아서.”
검술부의 뭇 선배들이 그러하듯 머리 위를 훑고 쓰다듬는 손을 그러려니 하며 받고 있자니, 시무룩하여 이쪽을 바라보고 선 루베르의 낯이 주인 잃은 견공과 같았다.
마구잡이로 헝클어진 머리를 슥슥 손빗으로 쓸어 넘기다가 그 시무룩한 낯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너도 나를 쓰다듬어라 하고 달래 주어야 할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또 생각하기로는, 남이 어린 몸을 쓰다듬고 어여뻐 하는 것을 가만히 두는 것과 날 어여뻐 하며 기분 풀어라 말을 거는 것 사이에는 크고 넓은 강이 있었다.
때문에 먼저 머리를 들이밀지 않고 어깨만 으쓱였다. 내 몸과 마음의 연식이 서로 맞지 않기에 너무 겸연쩍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알고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어, 이렇게 갈 거야?”
“점심 식사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 어디에서 먹는데?”
“오늘은⋯ 1학년 남자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하겠지요?”
“⋯왜 의문문이야?”
“그야 시간이 늦어서 다른 곳에서 식사해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전 오후 수업이 있어 이만 가보겠습니다.”
무어라 더 어물어물 말을 덧붙이려던 루실라가 순순히 손목을 놓아준 덕분에 늦지 않게 식당에 도착하여 쉐이든을 만났다.
쉐이든이 나 늦은 것을 두고 오늘 수업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었다.
어린 아해 둘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다가 온 것이 전부인 터라, 별일 없었고 늑장을 부린 탓이니 다음에는 이리 늦는 일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대꾸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수업 강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시간이 많이 모자라진 않아 다행스러웠다.
중간고사 이전의 교양 세계사 시간에는 시어런 제국과 다섯 왕국의 연표와 역사, 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배웠다면 중간고사 이후에 배우는 내용은 또 달랐다.
다섯 왕국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각 나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주가 되었다.
기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특산물이 나는지 따위를 지도와 함께 공부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옆에 나란히 붙은 왕국들끼리 싸움이 잦은 일 또한 당연한 일이니, 그들 사이에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각기 내세우는 장점이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이 더 많아 골치가 아팠다.
특히나 소금을 포함한 여러 무역을 하기에 좋은 무역로의 소유권 문제로 자주 싸우는 율란과 비반이 그러했다. 옷 입는 풍습도 비슷하고 먹거리도 비슷한데, 관혼상제(*성인식, 혼인식, 장례법, 제사법) 풍습마저도 거의 같았다.
그렇게 엇비슷한 모습을 하고 붙어서서 핑계란 핑계는 다 끌어다가 싸움박질을 하는 것이 꼭 화산과 종남 하는 모양새와 같았다.
중원 구파일방 중에서도 화산과 종남의 관계는 유명했다.
세대에 걸쳐 화종지회니 종화지회니 하며 어깨를 겨루며 누가 더 위인지 정하겠다 씨름을 했다. 그 실력이 비등하여 한 해에 화산이 이기면 다음 해에는 종남이 이기고는 했다.
다른 방파들이 멀찍멀찍 거리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같은 섬서(*중원의 중앙에 있는 지역. 종남파는 섬서의 남쪽에, 화산파는 섬서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땅에서 서안(*섬서 지역의 가장 번화한 도시)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도 문제였고, 둘 다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문제였다.
화산의 검법이 쾌(快)와 환(幻)의 변화무쌍한 도를 따르고 종남의 검법이 중(重)과 절(絶)의 천고불역의 도를 따르니 서로의 뜻이 맞지 않음을 당연시 여겼다.
이 두 나라가 꼭 그러했다.
이름이 두 글자인 것부터가 닮은 두 왕국, 율란과 비반은 같은 풍습과 문화를 가지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붙어서는 그 사상과 뜻이 달라 매일 싸우고 타협하고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였다.
내 살펴보기로 바다와 맞닿아 소금을 생산한다는 율란은 그 성정이 좀 더 호방하고 쾌활한 것이 화산을 닮았고, 너른 평야에서 곡물이 많이 난다는 비반은 진중하고 고요한 기상이 종남을 닮았다.
물론 각 문파는 일개 방파일 뿐이라 땅을 소유한 왕국과는 또 달랐지만, 이렇게 외우니 그나마 좀 더 공부할 맛이 났다.
사이 나쁜 두 도사(*화산과 종남은 둘 다 도가 문파에 해당한다)가 아릉거리는 사이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잔만 채우던 날의 기억이 이렇게 도움이 됐다.
쉐이든이 내 교과서를 보고 각 왕국 이름 옆에 그려 둔 꽃과 산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 * *
초급 검술 시간에는 등나무 아래에서 간식거리를 까먹었다. 마엘로 샌슨이 저는 달지 않은 과자가 좋다 타박하면서도 함께 자리하여 무척 즐거웠다. 스승과 제자의 사이에 허물이 없는 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금주의 수렵과 야영 시간에는 바로 지난주에 배웠던 것을 토대로 하여 온실에 있는 약재 중 필요한 것을 곱게 캐내어 상자에 담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각 조의 수장이 제비뽑기를 하여 어느 구역의 것을 캐 오면 될지를 정하였는데, 내가 속한 조에서는 사막 지형에서 해열과 진통, 복통 효과가 있는 약재를 구해 오라는 쪽지를 받았다.
아무리 넓다 해도 아카데미 내에 꾸려진 온실 부지의 크기는 빤했다.
사막 지형의 온실은 다른 곳보다 식물 군락과 식물 군락의 사이가 멀었고, 눈에 띄는 지형지물이 많지 않아 도리어 심어둔 것을 찾기에 쉬워 마음이 놓였다.
제니가 기말고사도 중간고사 대체 과제와 흡사하게 나온다면 미리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며, 누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까지 꼼꼼히 적으며 쫓아다녔다.
일전에 나란히 줄을 서서 세드릭 교수의 뒤를 졸졸 쫓으며 온실들을 구경하였던 적이 있었기에, 걸음을 옮기는 아이들 모두 걱정 없이 표정이 밝았다.
사막 지형의 온실로 통하는 입구 어림에서부터 훅 더운 기운이 밀려와 또다시 시어런의 진법, 아니 마법에 감탄하였다.
벌써 덥다 종알거리며 같은 조 아해들이 몸에 걸치고 있던 교복 재킷 따위를 벗어 짐 속에 넣었다.
“일단은 오른쪽으로 먼저 가 볼까요? 저번에 교수님과 함께 미리 답사하면서 봤던 구역에서 막리르의 손을 먼저 채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가져가면 될까요? 분량에 관해서는 이야기해 주신 게 없었는데.”
“글쎄요⋯. 다섯 명이면 얼마나 필요하지. 일단 군락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있는지를 살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막리르의 손은 마취와 진통 효과가 있는 선인장 열매였다.
그 선인장의 크기가 큼직하여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으깨거나 즙을 짜내어 사용하는 열매는 그 표면이 단단하여 들고 다녀도 짓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데미안이 먼저 막리르의 손부터 찾자 나설 때 한 아이도 빼놓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다.
모래가 부드러워 걸음을 옮길 적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일전에 세드릭 교수와 함께 왔을 적에는 그가 마법을 사용하여 모래를 단단하게 굳혀 주었기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우리 무리의 일원인 마리앤 필로덴도르 또한 마법사였으나, 1서클을 마스터하고 겨우겨우 2서클 마법을 연구하는 경지로는 따라 할 수 없는 기예라고 하였다.
그래서 약재를 옮길 상자는 자연히 내 손에 들렸는데, 그것 또한 옳은 선택이었다.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워 어느 정도의 추위와 더위는 이겨낼 수 있는 강건한 몸을 가지고 있는 나와는 달리 야영 조 동무들은 걸음을 옮길 적마다 체력이 죽죽 빠져나가는 모양이었다.
처음 출발할 적에 재기발랄하던 표정들이 땀과 함께 씻겨 내렸다.
“⋯이상합니다, 분명 전에는, 하! 한 이십 분 걷고 나서어, 바로 막리르 군락이 보였는데⋯!”
“이전보다 두 배는 느리게 가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요.”
“왜 에른하르트 영식은, 흐, 멀쩡한 거예요?”
“그야⋯. 천천히 걷고 있기도 하고⋯. 원래 더위를 잘 안 탑니다.”
“저번엔 추위도, 흐윽, 안 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맞고.”
데미안이 재차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니냐 물었으나, 내 보기에는 길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는 사람들이 멀쩡하지 않은 것 같아 이 길이 맞다고 몇 번을 달랬다.
가방 안쪽에 넣어두었던 물을 꼴깍대며 아해들이 옷소매를 둥둥 걷어붙이는 것을 보고 웃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과연 검술부 학생들이 다른 학부 학생들을 훅 불면 날아갈 종잇장처럼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반 시진도 안 돼서 기진한 모습이 웃음도 나오지 못할 만큼 가여웠다.
“두 영애의 짐은 내가 들겠습니다.”
“흐아, 괜, 찮아요⋯! 흐알 수 있다⋯!”
“아니, 그러다가 모래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는 마리앤의 짐과 저 죽겠다 소리도 내지 못하는 제니의 짐을 받아다 어깨에 둘러멨다.
남은 두 소년 또한 부러운 눈으로 이쪽을 보았으나, 내가 등에는 내 짐을 지고, 왼손에 배낭 두 개, 오른손에 상자까지 들고 있는 터라 저들의 짐을 부탁할 생각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신법을 사용하여 군락까지 달려간 뒤, 아해들을 하나씩 업어 나를까 잠시 고민하였으나 그리 앞질러 가는 것이 수업의 취지에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