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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45화 (45/176)

45.

지난 시간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탓일까.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수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을 적에는 걸음이 저도 모르게 잠시 멎었다.

시어런 아카데미의 동편에는 검술부가, 서편에는 마법부가 각기 십수 개의 연무장과 건물 등을 가지고 있었고, 북편으로는 법학부니 경영부니 하는 소위 머릿속에 먹물 좀 넣은 녀석들이 사용하는 건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숙사와 공용 공간 따위는 중앙부에 있어 오가기가 좋았다.

웃음소리는 그 공용 공간 중 운동장 편에서 솟았다.

문득 호기심이 일어 평소와 같이 가로질러 가는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빙 둘러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기숙사를 오가다 지나는 길목에 있는 대운동장이나 공용 공간에서 종종 떠드는 소리나 웃는 소리를 듣고는 하였으되, 그 웃음소리의 주인을 구태여 떠올리고 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의 놀이는 축국(*축구와 흡사한 고대의 공놀이)인 모양이었다. 머리를 단단히 올려묶은 소년 소녀들이 우르르 질 좋은 가죽 공을 쫓아 달렸다.

팔다리가 길쭉하고 탄탄한 것이 검술부의 인물들인 것이 분명하였다. 익숙한 낯과 익숙지 않은 낯이 섞여 놀고 있었다.

심판을 보는 이가 신이 나 길길이 날뛰며 승점을 외쳐대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하였다.

중원에 있을 적에도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만든 공을 쫓아 달리는 아해들이 종종 길거리에 보였다.

더러는 좌판을 망가트린다 먼지가 날린다 하며 욕을 하는 치들도 있었으나, 열 살 남짓한 아해들이 동그란 공을 쫓아 달리는 모양새는 저들끼리 뒹굴어 노는 어린 강생이(*강아지)들을 보는 것처럼 귀여운 맛이 있어 나는 좋았다.

단단하게 단련한 팔과 다리로 검을 휘두르는 대신 공을 능숙하게 차올리는 아해들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아카데미에 와서 좋은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젊고 어린 것들이 마냥 웃으며 소리 지르고 뛰어노는 것을 양껏 볼 수 있는 것이 좋아 푸근한 마음이 일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또 저쪽에서 이쪽으로 와르르 쏟아지고 넘어져도 낙법을 배울 만큼 배운 치들이라 다치는 일이 없이 발딱발딱 잘도 일어나 뛰어다녔다.

여즉 아해들의 면면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워 머리 색을 보고 그 정체를 고심하곤 하는 나였다. 허나 가까운 몇몇 얼굴을 기억하게 되자, 그와 다른 이들도 눈에 익힐 수 있었다.

루실라 안티 시어런, 시어런 제국의 3황녀는 쌍둥이 형제와 비견할 만큼의 무력을 가졌으나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에는 생명이 있을 뿐 사명이 없다 하는 말을 공공연하게 자주 하였다.

그녀는 황위에 관심이 없다 몇 차례 거듭 외치며 신기한 것과 즐거운 것을 찾아다니는 일을 즐겼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과 화려한 것, 값비싼 것을 좋아하여 그 주변에 늘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갈색 머리를 높이 올려묶은 소녀는 머리 끈이 번쩍번쩍 빛이 나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여느 소년의 목에 팔을 걸어 장난을 치며 크게 떠들고 웃는 모습에 시선이 절로 모였다. 티 없이 맑은 모습이었다.

흰 바지는 먼지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으나, 무릎 아래까지 오는 부츠엔 윤기가 돌았다.

“야, 야! 한 번 더 가!”

“지금 몇 시간째인 줄 알아? 승부는 한참 전에 났잖아!”

“두 판만 더 하고 밥 먹으러 가자.”

누군가 조르듯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양 루실라가 공을 잡아다가 높게 차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다들 와 하고 달려 나갔다.

그 평화로운 모습에 시선을 퍽 오래 빼앗겼다가, 결국 흙먼지로 꼬질꼬질한 다른 소년이 공을 다리로 걸어 골대 삼아 그어 둔 빗금에 차넣는 것을 보고서야 걸음을 다시 옮겼다.

늘 조용조용하고 비실비실한 그의 형제가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한 배에서 태어나서 이리도 성정이 다를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루베르 그 녀석은 검은 긴 것이든 짧은 것이든 모두 잘 다루지만, 어쩐지 축국 같은 건 영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였다.

사람과 부대끼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와 성정이었다.

문득 루베르와 쉐이든이 함께 할 식사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급한 일이 아니라 서두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렵고 불편한 것에 익숙해지기는 그렇게 오래 걸렸는데, 편하고 좋은 것은 몸과 마음에 빨리 익었다.

비명보다야 웃음소리가 달았고, 입에 거친 것보다야 부드럽고 싱그러운 음식이 달았다.

간혹 보이는 이 몸의 상처 없이 흰 손에도 섬뜩하지 않게 되었다.

동무들과 웃으며 식사를 하고 다시 연무장으로 나왔다.

언제나처럼 주변에 사람이 많았으나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 서린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였다. 자세를 가다듬고 익숙한 검식을 펼쳤다.

이제 마엘로가 처음 지적했던 창천무애검의 4, 8, 17식에는 더 이상 살기가 스며있지 않았다. 사람의 목을 끊거나, 배를 가르거나, 대퇴부를 가르는 일을 상정하지 않고 휘두르는 검에 뜻 없는 무게가 실리지 않아 기꺼웠다.

늘 눈앞에 서려 있던 죽여야 할 많은 이들이 이제는 그 형체가 흐릿하여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여도 보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사람을 볼 적에 사혈(*찌르면 죽는 혈도)과 요혈(*중요한 혈도)이 아니라 그 표정과 생김을 보려 애를 썼다.

온 힘을 다하여 검을 내친 뒤에도 벙긋 웃으며 악수하는 것에 익숙해진 것은 엊그제의 일이었다.

중원에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덥석덥석 아무에게나 손목을 맡기지 않았다. 중원에서 잡아 본 사람의 손보다, 아카데미에서 두 달간 잡아 본 사람의 손이 더 많았다.

지금에 와서 누군가의 숨통을 끊는다면, 첫 살인에 버금하는 충격을 느낄까. 혹은 아무렇지 않을까. 궁금증이 일었으나 해갈할 길이 없었다.

바른 식을 사용하여 삼십 초를 전개하였다.

일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이, 역순으로 또 한 번 전개한 검이 정(正)을 담았다. 바르고 바른 검이다. 지난한 삶에 빼앗겼던 검이다. 생사를 가르는 순간 온전함을 잃은 검이다.

호흡을 삼킬 적에 모이는 것이 오러인지 마나인지 내공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제 꼬리 숨기는 비얌마냥 스읏 하고 소슬하고 퍼런 소리가 잇새로 새었다.

누군가 환호하며 박수를 쳐 주기에 손을 들어 화답하였다.

이런 여유 또한 시어런 아카데미에 와서 배운 것이었다.

이곳의 학생들은 내가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주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처음에는 낯설었어도 쏟아지는 응원에 익숙해진 지금은 종종 훈련이 끝날 적마다 이런 식으로 인사하고는 하였다.

가끔 다른 학생들의 멋진 검식을 보았을 때 받은 만큼의 박수를 되돌리기도 하였다.

장난인 것도 같고 경탄인 것도 같은 그러한 행위들 또한 아카데미라는 공동체의 유대감을 빛내기 위한 것이리라 여긴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곳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지 익히 알았다.

내 수련을 끝마치고 몇몇 이들의 검식을 함께 보아주었다.

* * *

다음 날, 고급 검술 시간에는 3황녀 루실라가 대련장 위에 올랐다.

이전의 수업에서도 몇 번인가 그의 검식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제 성정을 닮아 자유로운 검식을 사용하였다.

초급 검술 시간에 알게 된 동무가 사용하던 세이렌 검식의 다음 형태라는 것은 마엘로 샌슨이 말로 일러주어 알게 되었다.

그녀가 빚어내는 오러가 파도를 닮아 흐르고, 이어지고, 몰아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다시 뺨에 닿아오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이제 조금 가까워진 탓인지, 루베르가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내 쪽을 바라보는 것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져 잔소리를 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흘긋 보아 눈이 마주쳤을 때 녀석이 벙긋 웃기에 따라 웃었다. 입술 새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대련장 위로 시선을 두었다.

루실라 안티 시어런이 상대의 오금을 걷어차 자빠트리자, 상대가 데구르 굴러 제게 꽂혀 드는 검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련이 멎지 않았다. 몇 번이고 바닥을 구르던 상대가 한쪽 팔을 바닥에 온전히 닿게 하여 그 힘으로 벌떡 일어났다.

서로의 검이 다시 세차게 부딪치며 검신을 따라 기어가듯 흘렀다.

중원에서는 나려타곤(*바닥을 굴러 회피하는 모습을 게으른 당나귀에 비유한 초식 명)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상대와 격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바닥을 뒹구는 것이 체면을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어런의 무인들은 번데기는 껍질을 뒤집어쓰는 것이 당연하다 말했다. 저들이 언젠가는 나비로 피어날 것이라 여겼다. 당장의 굴욕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 태도는 과연 배울만했다.

채앵ㅡ!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결국 상대의 검을 걷어내는 데 성공한 루실라가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맑게 웃었다. 검을 빼앗긴 소년은 제 목에 겨눠지는 칼날을 받아들였다. 소년이 양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보이니, 루실라가 손을 잡아 상대를 일으켜 주었다.

자세히 보니 어제 축국에서 골을 넣은 그 소년이 상대였던 모양이다. 그들 사이의 친애가 눈으로 보이는 듯하였다.

“세이렌 검형의 제8식과 9식을 멋들어지게 사용한 대련, 잘 봤다. 대련이 일찍 끝났으니 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는 건 어때, 루실라.”

“8식과 9식만요?”

“그래,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수준을 뛰어넘는 기예였으니 자랑 한번 해 줘야지. 간간이 파도 속에 섞여 든 기운이 강맹하여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았다. 힘의 40%를 아끼고 있던 것도 괜찮았고.”

“오늘따라 칭찬이 후하세요, 샌슨 교수님. 괜히 사람 민망하게.”

“맷 니코. 너도 들어가지 말고 거기 서서 봐.”

새침하게 말한 황녀가 검을 바로 세우고 섰다. 대련 상대였던 소년이 일곱 걸음 뒤로 물러났다. 검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맷 니코라 불린 소년 대신에 마엘로 샌슨이 대련장 위에 자리를 잡고 섰다.

루실라는 이전의 대련과 동일한 속도로 검식을 전개하였으나, 마엘로 샌슨 교수는 여유롭게 설명하며 그 검을 걷어냈다.

단단한 팔이 품고 있는 완력 자체가 달라 쉽게 검을 내치지 못하는 루실라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교수는 맷 니코의 자세를 그대로 흉내 내었으나 간간이 손목을 약간 비틀어 힘을 흘려내는 법을 보여 주었다.

또다시 개안하여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창, 채앵, 칭, 검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모든 힘에 힘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법칙이겠지만, 실전에서 써먹기는 힘들지. 검과 검을 부딪칠 때 이렇게, 이런, 식으로, 손목을 쓰는 연습을 한다면 상대의 힘이 놀랄 만큼 강할 때도 한 번 더 검을 긋거나 뻗을 수 있는 찬스를 만들 수 있다.”

뒷말은 생략되어 있지만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아해들의 목숨을 살릴 최후의 비기가 될 터였다.

잠시 뒤 서로의 검이 멎었을 때, 마엘로 샌슨은 아이들이 대련 후에 늘 그러하듯 악수를 청했다. 윽, 큿, 거친 탄성을 흘리며 샌슨을 상대하던 루실라는 숨이 턱 끝까지 들어찬 채로 그 손을 맞잡으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마엘로 샌슨의 단단한 손을 놓으며 이쪽을 휙 돌아보는 눈에 잠시 놀랐으나, 입가의 웃음을 지우지는 않았다. 아카데미 내의 모든 인물이 대부분 보였던 호의를 기억하고 있었다.

저 유쾌한 소녀가 이런 일로 나를 나무랄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베르를 닮은 선명한 까만 눈이 가늘어져서는 이쪽을 바라보다가 말았다.

다른 동기와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수업이 끝나면 말을 걸어오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무인과 가까워지는 일은 늘 반가웠다.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기분이 들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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