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44화 (44/176)

44.

나와 벤자민, 루베르는 교대로 틈을 두고 비도를 던지는 연습을 하였다. 함께 자리한 셋이 모두 다 일류무인이고 배움에 열의를 보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어깨와 팔뚝이 얼얼하였다.

한 시진 남짓한 시간이 지나자 벤자민은 짧은 거리에서는 제법 괜찮게 표적의 중앙을 맞힐 수 있게 되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 미숙하여 표적의 귀퉁이나마 용케 맞히면 다행이었다.

그 오랜 시간 비도를 품에 담고 다녔음에도 집어던질 생각을 해 보지 못한 것을 탓해야 했다. 분명 중원에 비도를 던지는 데에 쓰기 적합한 무공 구절이 수없이 많았을 텐데, 남궁세가의 기상에 맞지 않는다 하여 대강이라도 훑어보지 않았던 것이 새삼 아쉬웠다.

시어런의 무공은 대개 구결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한 동작 한 동작에 진득한 뜻을 실어 두고 그 형태와 의미를 깊게 해석하여 몸을 움직일 적마다 어느 혈자리로 내공을 옮겨야 하는지를 모조리 궁리하여 후대에 전하고, 또 그렇게 받은 것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중원의 방식과 달리, 시어런의 이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몸 자체에 각자의 방법을 새겼다.

여러 차례 바른 자세로 임하다 보면 자연히 학습하게 된다니, 외공을 익히는 이나 할 법한 말이 아닌가.

자연에서 끌어온 마나를 신체에 쌓아 퍼트리는 것은 세맥을 강화하는 것과 비슷한 듯 달랐다. 큰 줄기를 사용하는 법을 몰라 혼자 궁리해야 했기에 새로이 배우는 일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외공의 고수였다면 또 모를 일이겠으나, 남궁의 무공은 첨예하게 내공의 결을 다루는 것이었다. 시어런의 무공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여 편리하겠으나, 내게는 영 어색하였다.

내내 오른손잡이로 살다가 왼손으로 검을 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응, 다음 주 금요일에도 같은 시간에 만날까?”

“바쁘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괜찮아. 그, 혹시 클라우디안 영식은?”

“저도 좋습니다. 선배님의 배려, 감사히 받아 잊지 않겠습니다.”

루베르는 또 활짝 웃었다.

그 낯이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것이 신기하였다. 서로 몸을 맞추어 땀이 나도록 놀고 나서 생각해보니, 소년의 태생이 고귀하여 편하게 지낼 친우가 동기 중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본디 묵묵하고 사람을 사귐에 고하를 막론하고 거리낌이 없는 벤자민이나, 상대하는 이들이 전부 어린 아해로만 보여 깍듯하게 대하는 것에 서툰 내가 황자에게는 꽤 좋은 동무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쁠 게 없었다. 금요일 오후마다 마엘로 샌슨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 반쯤은 대견하고, 반쯤은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쉐이든의 지속적인 충고로 알게 된 후였다. 비도술을 배우는 데에 시간을 쏟는 것이 더욱 좋게 생각되었다.

금요일 오후니 기숙사 식당이 아니라 좋은 식당을 찾아 나가자 하여 땀을 씻고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루베르를 따라 저잣거리로 나갔다. 한 음식 한 음식이 정갈하게 차례대로 나오는 식당에서 오늘 배운 것들에 대한 이야기와 지난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 따위를 나누다가 나와 에드윈과 대련을 했던 이야기까지 말이 닿았다.

루베르가 마리앤과 꼭 같은 것을 묻기에 똑같이 대답하였더니 소년이 인자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선배가 키아드리스 영식과 사이가 안 좋을 일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원래 동년배의 마법사와 검사는 서로에 대해, 그, 라이벌 의식 같은 걸 가지고 있는 법이잖아. 다들 사이좋은 게 좋지. 내가 그를 싫어한다는 건 아니야.”

아이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루베르 안티 시어런과 에드윈 키아드리스는 같은 2학년, 16살 동년배였다.

아카데미 부지가 무척 거대한 편이고, 학문 연구를 위하여 졸업생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사람이 많게 느껴지기는 하였으나, 잘 따져 보면 한 학년의 정원이 겨우 백 명에서 삼백 명 남짓했다.

중원에서 남아도는 것은 사람뿐이라, 나는 다수의 인물을 대하는 것에 익숙했다. 남궁의 성씨를 가진 무인만 삼사백이고 무림맹의 무인을 헤아리자면 수천이 훌쩍 넘었다.

내 휘하에 있던 이들의 면면을 어찌 익히지 못했겠는가.

루베르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제가 다스리고자 마음먹은 나라의 또래 귀족이었다. 학부가 다르다고 하여도 서로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인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한 놈은 이 나라의 황자요, 다른 한 놈은 큰 가문의 재주 많은 직계손이니 과연 그 만남이 한두 차례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여기저기 성격이 안 좋기로 소문난 에드윈과 달리 유순하고 얌전한 구석이 있는 루베르는 서로 얽힐 만한 일이 없어 보였지만, 도리어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둘이 싸운 적이 있느냐 묻는 것도 저어한 일이라, 다른 이야기를 꺼내어 말을 돌렸다.

“루실라 선배님과 식사를 같이 하시진 않으십니까?”

“어? 루실?”

“예. 수업도 같이 들으시기에 여가 시간도 함께 보내실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 우리가 친한 건 맞는데, 태어날 때부터 같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까지 같이 다니는 건 좀 질리지 않겠어? 녀석도 나랑 노는 것보다 자기 친구들이랑 노는 걸 더 좋아할걸. 고급 검술 수업 말고는 같이 듣는 수업도 없어.”

루실라 안티 시어런은 루베르 안티 시어런의 쌍둥이 여동생으로, 갈색 머리칼을 높이 하나로 올려 묶고 다니는 인물이었다.

그 둘은 나이는 같으나 외양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헷갈리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서로의 성별이 다르기도 하지만, 루베르는 혈색이 좋고 밝은 피부색인 반면에 루실라는 잘 익은 빵처럼 윤기 나는 짙은 피부를 가졌다.

성격 또한 음전한 루베르와 달리, 루실라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아카데미 부지 안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어 눈에 띄었다.

도서관에서 루베르와 자주 얼굴을 맞댄 것과 다르게, 루실라는 도서관에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여유 시간을 어찌 보내는지에 대해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벤자민도 평소보다 재치 있게 말을 꺼내어 붙였다.

“선배님께서는 어떤 수업을 들으시는지 여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응, 물론이지. 지금 듣는 건 고급 검술, 단검술의 활용 실습, 제왕학, 바른 외교와 실전 사례 비교, 경영학 입문, 수역학과 물리학 연계, 제국의 지형과 기후. 이렇게 일곱 정도. 루실은 제국기사단 단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서 나보다 생존 수업을 더 많이 듣는 편이고.”

쉐이든은 2황자가 황위를 노릴 거라 말했다. 당연하다는 듯 제왕학과 외교 경영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아하니 본인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닌 듯했다.

쌍둥이인 루실라가 무력의 상징인 제국기사단 단장을 위임한다면 그가 지지 세력을 얻는 데에 더욱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앞의 음식을 적절한 크기로 잘라 입 안에 넣었다.

그러는 동안 벤자민이 예의 있는 태도로 몇 가지 질문을 더 꺼내거나 답하였다.

식사 자리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2황자가 황제가 되는 것을 미래의 한 갈래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젊은 시절에는 충분히 제국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모든 땅을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어릴 적에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역사학자를 꿈꿨던 소년이라.

이런 것을 아이답게 성장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하며 먹던 것을 잠시 멈추었다. 빤히 바라보니 설명을 바라는 것으로 보였는지, 루베르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거든. 어린아이들이 보통 드래곤이나 마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는 옛날이야기라면 뭐든 다 좋았어. 그래서 역사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는 했지.”

“예를 들면 어떤 상상을 하셨습니까?”

“글쎄, 내가 역사 속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같은 거?”

루베르가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열하였으나, 나와 벤자민이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이자 그만두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어려운 일은 없느냐, 도와줄 것은 없느냐 묻는 것에는 딱히 고민하지도 않고 없다고 답하였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없을 터였다.

고민이라고 해봤자 다음 시험 일자를 떠올리면 가슴이 갑갑해지는 것 외에는 없었다.

또 그는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온화하고 다정한 에른하르트가의 가풍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동생 자랑을 조금 했다.

벤자민은 자신의 가족들은 다들 무뚝뚝하지만 먹을 것 하나는 야무지게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황제와 3황녀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를 조금 듣기도 하였다. 듣기로는 마냥 다정하고 속 넓은 아비와 말괄량이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져 나쁘지 않았다.

다만 루베르는 제 어미인 황비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깝지 않은 사이에 멋대로 지적할 일도 아닌 것 같고, 아마 다음 수업 시간에는 들을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구태여 입에 올리지 않고 자리를 정리하였다.

* * *

주말에는 이전처럼 이름자를 외워야 하는 수업에 골몰하였다.

4월이 시작되었다.

예년보다 기후가 온화하여 초급 검술을 수업하는 너른 땅 저켠에 길게 늘어선 등나무꽃 덩굴이 하나둘씩 때 이른 보랏빛 꽃망울을 달고 나왔다. 그 향이 짙고 그윽하여 수업 중에도 코끝이 간질간질하였다.

몇몇이 엣취, 재채기를 하는 것이 우습다.

그 꽃을 똑똑 따다가 기름 낙낙하게 부어 향신채 몇 가지와 잘 볶아 먹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을 터인데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였다.

그 생각이 나 쉐이든에게 슬쩍 물어보았더니 이곳에는 꽃을 누지게 볶아 먹는 풍습이 없고, 대신에 예쁘장하게 구운 단 빵 위에 생화를 장식으로 얹어 둔다 하였다.

등나무꽃은 충분히 볶거나 익히지 않으면 배탈이 나기 때문에, 등나무꽃을 생으로 먹지 않는다는 말도 곁들였다. 내 평생 요리에 재미를 붙여본 일이 없어 모르던 사실이었다.

탐스러운 꽃을 보고 어여쁘다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먹고 싶어 하는 모습이 우습다는 이야기가 덤으로 붙었다.

먹을 것이 궁해 풀뿌리까지 캐어다 먹고 사는 민초들을 어르고 달래던 시절에는 덩굴 꽃도 덩굴 열매도 귀한 식재였다 하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대신에 다른 말을 하였다.

“이 뿌리를 잘 씻어 덖어 말리면 약으로도 쓸 수 있다고 책에서 읽은 바가 있어. 관절이 안 좋은 노인들에게 좋다고 하여 차로 마시는 이들도 종종 있다고 하더라.”

“그래? 오웬 쪽 문화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곰곰 생각해 보니 이 땅의 등나무와 중원의 등나무가 완전히 같은 종인지 아득하여 어물어물 말을 끝마쳤다.

식생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에는 늘 그랬다. 중원과 시어런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 힘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손과 발이 창천의 뜻을 담는 것과 엇비슷한 일이다.

내 뿌리가 여즉 그곳에 남아 있었다.

“아니, 아닌 것도 같다. 아무거나 막 주워 먹고 그러지 말아라.”

“안 먹을 거거든? 아니, 그보다 저 꽃은 관상수잖아. 먹을 게 아니라 눈으로 즐기라고.”

“그래, 그렇게 하자.”

꼭 제가 먼저 꽃을 따 먹자고 한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하다 칭얼거리는 것을 옆에 달고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꽃 넝쿨을 올려다보았다.

등꽃은 낮에 보아도 어여쁘지만, 밤에 보는 것이 더욱더 아련하니 어여뻤다.

그 색과 빛이 이 땅의 모친을 닮은 것도 같고, 막냇동생의 머리칼을 닮은 것도 같았다.

그리 어여쁜 것을 눈에 담고 달큰한 향을 코에 담고 있으니 다른 또래 동무들도 꽃 구경을 하러 몰려들었다.

다음번 수업에는 과자나 주전부리를 갖고 와, 수업이 끝난 점심시간에 간식을 함께 들자 하여 기꺼이 그러마 대답하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