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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43화 (43/176)

43.

아침 일찍 쉐이든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점심 식사 후 정해진 시간이 되어 루베르 황자를 만나러 나갔을 때는 이전보다 마음이 불편하였다.

황위 계승 문제라니,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라 여즉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황실의 일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가 뿌린 수십의 씨앗들 중 하나라는 무슨 왕 무슨 왕 하는 것들도 수천의 징집병을 거느리고 위세를 부렸다.

그런 황실에서 손을 대지 못하는 곳마다 자리 잡은 것이 무림이었다.

구역과 구역들 사이, 관군의 손이 닿지 않아 무뢰배들이 번성하여 민초를 괴롭히는 곳에 협객들이 터를 잡았다. 지역의 상인을 부리고 부를 끌어모아서 방파와 세가를 세워 자리 잡았다. 치안을 다잡아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무림 중의 무림, 무림맹의 일원이자 남궁세가의 무인인 나는 황제나 황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관무불가침, 그 다섯 글자가 내 사고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시어런은 그 넓이는 중원에 필적하는 거대한 제국이면서, 황권은 중원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드높았다. 문인과 무인, 상인과 도적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황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수천만 인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며 황제를 섬겼다. 관군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인세에 없는 듯했다.

지금의 나는 고위 세가의 장손으로 태어나 언젠가 황제의 곁에서 일할 것을 천명으로 받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처럼, 황제가 태어나면 그를 모셔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황제는 해와 달처럼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나 또한 산과 들처럼 그 자리에서 할 일을 하면 족하다 여겼다.

황제를 내 손으로 빚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중원에서의 삶이 그러했기에.

벤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일류무사는 제 검이 뻗어지는 거리의 다섯 배 남짓한 공간을 권역으로 삼았다. 루베르 또한 그랬다. 멀찍이서부터 나와 벤자민이 다가서는 걸 알고 있었던 까만 시선이 올곧았다.

“아, 왔어?”

“일찍 나오셨네요.”

“으음, 응. 그냥 시간이 좀 남아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렇게 허허실실한 앳된 소년이어서야 더욱 실감이 안 나는 것이 당연했다. 까맣다 못해 반드르르한 시선을 들여다보았다.

내 시선을 피한 소년이 머쓱하게 웃음을 흘리며 길을 인도했다.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쉐이든이 말한 것처럼, 루베르 황자가 나를 자신의 무리에 영입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일까? 궁리해 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황자의 권위 같은 것을 세울 생각 없이 이렇게 가엾고 귀엽게 구는 것이 지고한 황제가 되는 길에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연습장의 문 걸쇠에 열쇠를 밀어 넣어 달각거리는 황자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일전에 이미 소년이 건네는 것들, 예를 들면 노트니 조언이니 하는 것을 꿀꺽꿀꺽 잘도 받아먹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이번의 비도 자습은 당장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 학기에도 다음 해에도 비도술을 위한 강의를 수강할 수 있었다.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따져 물어야 할 것만 같아 불쑥 물었다.

“일전에 제게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었지요.”

“어? 어어. 그⋯ 랬지?”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세계사 노트를 받은 뒤에 했던 물음을 이 자리에 다시 한번 꺼내왔다.

왼손에는 묵직한 자물쇠를 들고, 오른손에는 그 자물쇠에 꼭 맞는 열쇠를 손에 든 채로 루베르가 뒤를 돌았다.

소년은 당혹한 기색이었다. 그림자를 뒤집어써 이전보다 더 검게 보이는 눈이 깜박거렸다.

벤자민과 루베르는 둘 다 검은색 머리지만, 벤자민의 것은 빛을 받으면 희게 빛나는 흐릿한 색이고, 루베르의 것은 빛을 받으면 파르스름하니 윤기가 도는 까마귀 터럭 같은 색이었다.

소년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기에 나는 그 앞머리가 갈라진 모양새와 검고 곧은 눈썹 위를 긁듯이 흔들리는 것에 시선을 두었다.

루베르는 손에 든 것을 한 손에 모아쥐고, 다른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이가 하였다면 사납게 느껴졌을 법한 성마른 손동작도 루베르가 하니 느리고 어여쁘게 보였다.

소년이 초조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 역시 좀, 그래 보여? 속셈이 있어 보이고 막⋯.”

“너무 잘해 주려고 하시길래 혹시나 하여. 제가 그런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황위 다툼이나.”

뭐, 그런 거. 하는 뒷말은 내가 말하기에도 멋쩍어 입 안으로 웅얼거렸으나 들어야 할 놈은 이미 다 들었을 것을 알았다.

함께 수련하기 위해 비도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옆에 선 벤자민이 별말 없이 고개나 슬쩍 기울이는 모양새를 보니, 내 못 할 말을 한 것은 아닌 듯하여 어물대던 것을 그만두고 다시 루베르와 눈을 맞췄다.

황자의 흔들리던 시선이 바로 섰다.

“⋯친해지고 싶은 건 맞는데, 그런 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선배를 믿겠습니다.”

“응.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될까?”

“예.”

그 멀끔하고 단단한 표정이 위안이 되었다.

사람을 상대하고 그 사이를 조율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생은 검으로 태어나 검으로 자랐다. 생각할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몇이 죽어 나가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저 높은 곳을 향해 원망을 밀어낼 뿐이었다.

직접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 내가 이제 와 내 혈육들을 전장으로 밀어 넣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이전 생에는 내가 가주가 아니기에 거절하지 못하였지만, 이번 생에서는 장손으로 태어났으니 그 정도의 권한은 있지 않겠는가 여겼다.

그래, 나는 나 홀로 죽는 길로 걸어가는 일이 있어도 내 가족 친지를 다시 세력 싸움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겠다.

가문의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이들이 어찌 말한다 하여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은 그런 정쟁과 싸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잠금쇠가 풀린 비도 연습장으로 들어서자 수런대던 가슴 속이 훅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생각한 것보다 넓고 트여있는 곳이었다. 일전에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대련을 할 적에 들어섰던 마법 강의실과 엇비슷할 만큼 넓었다.

다만 건물의 생김새가 독특하였다.

연습장은 단층 건물로, 절반은 천장이 있으나 저쪽 절반은 탁 트인 공터였다.

벽과 천장이 없고 폭넓은 그물망과 천 조각으로 행인들의 시야만 겨우 가린 탓에 바람과 햇빛이 고스란히 과녁 위를 쓸고 비추고 있었다.

잘 가꾼 풀밭처럼 보이던 깔개는 가까이에서 보니 색이 조금 바랜 녹색 천이었다. 보풀이 일어난 부분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절로 경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과녁은 둥그렇게 생겨 한가운데가 붉게 칠해져 있고 일정한 간격마다 바른 선으로 표식이 되어 있었다. 일전에 들었던 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과녁의 거리가 다르게 놓여 있었다.

벤자민이 허리 높이의 선반 위에 제 단도 꾸러미를 내려놓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 챙겨 온 꾸러미를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루베르 황자도 한켠에 놓인 선반 중에 하나를 열어 제 가방을 꺼내 왔다.

세 개의 선반 위에 세 개의 가방이 놓였다.

황자가 먼저 가방을 열어 균일한 크기의 바르게 생긴 단도 십여 개를 꺼내어 선보였다.

“우리 후배님들은, 비도술을 연습해 본 적이 있어?”

“저는 몇 번 던져봤습니다.”

“음, 전혀. 역수로 쥐어 짧은 간격의 싸움에서만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럼 클라우디안 영식이 던지는 폼을 먼저 보는 게 낫겠다. 에른하르트 영식도 눈썰미가 있는 편이니까,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쪽이 더 편할 것 같아. 괜찮지? 자세나 다른 건 내가 좀 봐줄게.”

“예.”

벤자민이 자신의 가방을 열어 사용감이 보이는 단검 일체를 꺼냈을 때, 나는 적잖이 감탄하였다. 놀랍도록 길이 잘 들어있는 단검들이었다. 무예를 단련함에 있어 다방면으로 꽤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 기특하다 못해 대견하였다.

벤자민 클라우디안은 이러한 장소에 익숙한 것처럼, 선반 한켠에 놓여 있던 백묵 가루를 손에 문질러 바르고 탁탁 털었다.

흰 가루가 햇살 아래에 반짝이며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충분히 손에 묻은 것을 털어낸 벤자민이 하얗게 건조해진 손으로 단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두 다리를 비스듬하게 벌리고 서서, 오른 어깨를 뒤쪽으로 두었다.

활을 당기듯 팔꿈치를 뒤로 길게 빼는 것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휙, 하고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그 손이 앞을 향해 멀리 뻗어진 것을 알았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버티고 서 있던 과녁의 정 가운데에서 한 뼘 높이 위쪽에 꽂힌 단도를 보며 작게 감탄하였다.

루베르 황자도 두어 차례 손을 맞부딪쳐 녀석을 칭찬했다.

“자세는 아주 좋아. 다만 단검을 던질 때 팔꿈치가 완전히 펼쳐지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데⋯. 그 부분만 고치면 좀 더 정확도가 올라갈 것 같네. 혹시 오러를 실어본 적은 있어?”

“아직 제 손에서 떨어진 물체에 오러를 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건 나도 그렇지만⋯. 손에서 단도를 놓기 직전까지 오러를 실으면, 좀 더 빠르고 강하게 던질 수 있거든. 한번 보여 줄게.”

루베르가 자신의 단검을 꺼냈다.

손잡이의 중간을 가죽끈으로 한 번 휘감아 매어 둔 단검이었다. 손잡이 끝부분이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어 수십 차례 사용한 것이 티가 났다. 그런데도 새것처럼 날이 잘 서 있었는데, 이는 단검을 기름으로 꾸준히 닦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은 모습이다.

과연, 그가 손에 검을 쥐고 집중하자 검신의 위로 희뿌연 오러가 일었다. 절정의 경지에 이르기 전의 오러였으나, 그 재주가 뛰어난 것은 선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와 벤자민이 살펴보기 편하도록 양발을 적당한 너비를 두고 섰다.

나는 그때 늘 조심스럽고 얌전하기만 하던 루베르가 어깨를 딱 벌리고 선 것을 처음 보았다. 아직 청년이 되지 못한 소년에게서 사내의 내음이 났다.

루베르가 어깨를 넓게 펴고 가슴을 연 채로 오른팔을 어깨와 직선을 그리며 뒤로 당겼다.

어깨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선이 얇은 셔츠로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불룩하고 탄탄하였다.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하여 앞쪽으로 떨어트린 왼팔의 너비와 폭이 적절했다. 그를 보며 자세를 대강 흉내 내어 보았다.

휙, 가벼운 소리와 함께 날아간 단검이 과녁의 정 가운데에 꽂혔다.

루베르는 나를 돌아보며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봉긋하니 올라간 양 뺨이나 반짝이는 눈매 따위가, 꼭 그 또래의 보통 소년들처럼 맑고 어여뻤다.

루베르가 벤자민의 시범을 볼 때 그랬던 것처럼 손을 맞부딪혀 짝짝 소리를 내주었더니, 녀석이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얕게 들썩였다.

“팔꿈치를 뒤로 당겼다가 앞으로 뺄 때, 이렇게 직선으로 움직여야 하는 거야. 다만 여기 이 연습장은 트여있잖아? 바람이 일거나 비가 오거나 할 때는 좀 더 높은 곳을 겨냥해서 던져야 해. 그, 러니까⋯.”

잘 설명하다가 주춤하기에 빤히 보았더니, 슬쩍 시선을 피한 루베르가 쥐어짜 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에른하르트 영식의 자세를 보아주어도 될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내끼리 내외하는 것도 우스웠다. 내 손목을 감싸 쥐는 손이 가늘게 떨려 왔다.

마법부의 야단법석을 떠맡고 있는 마리앤 필로덴도르도 내 손목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붙잡지는 않았다. 부친과 모친 또한 가족끼리는 간단한 접촉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저 황가의 가풍이 사내와 여인을 막론하고 혈육이 아닌 자들끼리의 접촉에 엄격한 모양인가 보다 하였다.

루베르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그가 이끄는 대로 어깨를 넓게 펼치고 팔꿈치를 높이 하였다. 단도를 던진다기보다는 활이라도 쥔 모양새였다.

왼손을 잡아 적당한 위치로 둘 적에 손가락이 서로 얽혔다. 미끄러진 것인지, 손 모양을 섬세히 조정하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의아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쑥스러워하는지 소년의 목덜미가 한참 붉어져 있었다.

잠시간 내 손의 각도를 만져주던 루베르의 손끝이 느리게 떨어졌다. 별일 아닌 듯싶어 금방 시선을 뗐다.

“⋯됐어. 이대로 해서, 한번 던져 보자.”

“예.”

루베르가 했던 것을 상기하며 팔을 움직였다.

첫 번에는 오러를 실을 욕심을 버렸다. 자세에 너무 신경을 쓴 탓인지, 혹은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팔꿈치를 뒤로 길게 뺀 탓인지. 내가 던진 비도는 가까운 표적에도 맞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기가 일어 곧장 다음 비도를 집어 들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해 보겠습니다. 방금 혹시 자세가 흐트러진 곳이⋯.”

“아, 음. 허리가⋯ 손을 좀 대도 괜찮을까?”

“그러세요.”

선배로서 후배를 가르치는 일이 꽤 기꺼운 모양이지. 반색하는 소년을 보고 있자니 아침의 고민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녀석이 좀처럼 황위 계승이고 뭐고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에 나 또한 배울 것에나 신경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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