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금주 제국의 계보 시간에는 황족에 대한 것을 배웠다.
첫 수업을 낮은 작위의 인물들로 시작하여 점점 작위를 높여가며 학습하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첫째로 가까운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수업에 대한 흥미도와 몰입도를 높일 수 있었고, 둘째로 어느 정보를 더 중요시해야 하는지를 훈련하게 되어 고위 귀족에 관해 배울 때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로 귀족들에 대하여 배우며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니게 되는 덕에 가장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황실의 족보에 대하여 반쯤은 알고 배움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현 황제, 베네토 로키 시어런은 슬하에 자녀를 셋 두었습니다. 베네토는 열아홉에 플로이드 3왕녀 멜라티아 플로이드와 첫 번째 혼인을 하여 1황자 리차드 플로 시어런을 보았습니다.”
현 황제의 이름을 옆집 아이 이름 부르듯 하는 것이 퍽 대단했다.
“베네토는 멜라티아가 리차드의 첫 돌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죽자, 이듬해 새로 안티네스 후작가의 차녀 케이트 안티네스를 황비로 맞게 됩니다. 그리하여 태어난 것이 여러분도 종종 아카데미 교정에서 마주치는 쌍둥이 황자와 황녀, 루베르 안티 시어런과 루실라 안티 시어런입니다.”
바로 이날 오전 중에도 보았던 얼굴들을 떠올렸다.
시어런의 귀족들은 그 이름이 앞에 오고 성씨가 뒤에 붙는데, 아이의 성씨는 부모 중 누구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어미의 작위를 계승할 수 있다면 어미의 성씨를, 아비의 작위를 계승할 수 있으면 아비의 성씨를 따르는 식이었다.
어미와 아비의 이름자를 둘 다 쓰는 것은 황제의 직계 혈족뿐이었다. 나라의 이름자를 성씨로 쓰고 그 어미의 이름자를 미들 네임이라 하여 이름과 성씨 사이에 끼워 붙였다.
그러니 1황자는 플로이드의 성씨를 두 글자 따서 리차드 플로 시어런이고, 2황자와 3황녀는 안티네스 후작가의 성에서 두 글자를 따 와서 루베르 안티 시어런, 루실라 안티 시어런이라 불렀다.
귀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일부일처를 당연시하였는데, 가끔 정부를 두는 일도 있었다.
키아드리스 가의 현 공작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녀는 후계를 정할 수 있기에 가문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작 부군의 신분이 낮아 그를 막 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여인의 몸으로 한 가문의 수장을 맡아 첩실을 두고 산다는 것에 잠시 놀랐으나, 중원에서 별별 여인들을 다 겪은 통에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중원에서도 데릴사위를 두고 사는 인물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특히나 독물과 암기를 주 무기로 삼는 사천당가에서는 그 혈족을 절대로 외부로 돌리지 않고, 쓸 만한 몸을 가진 사내들을 데릴사위 삼는 일이 자주 있었다.
나 또한 객잔에서 잠을 자다 산공독을 주워 먹고 자루에 담겨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었으니 말해 무엇할까.
먹고살 길 막막한 민초들이야 그렇게 부유한 부인을 맞게 되는 일을 행운으로 여겼겠으나, 내겐 그런 날벼락이 또 없었다.
내가 남궁의 이름을 달고 있어 웃어른의 허락 없이 혼인하면 사지 근맥을 폐하여만 한다고 간절히 빌지 않았더라면 당가의 성씨를 물려받은 여인과 혼인하여 데릴사위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 터였다.
“⋯멜라티아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플로이드 왕국에서는 7왕녀 아멜리아 플로이드를 시어런의 황비로 맞이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베네토 로키 시어런은 자매를 연이어 비로 맞이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다며 거절하였습니다. 플로이드 왕국은 이를 이유로 들어 관세를 2% 올렸고, 이에 시어런도 동의하여⋯.”
줄줄이 이어지는 설명은 유난히 상세한 구석이 있었다. 이 수업을 그 당사자인 쌍둥이 황족도 들었을 것을 생각하면 어쩐지 본인도 아닌 내가 민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도 배다른 형제와 사이가 나쁜 이들이 한둘이 아닐진대 권력 승계 구도와 이어져 있다 보니 1황자와 2황자의 관계에 대한 묘사들이 평생의 적이라 하여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현 1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외교란 이름의 땅 넓히기를 중점으로 하는 이들이고, 2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은 시어런 제국의 천 년의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안정을 원하는 이들이라 하였다.
이렇게 안온한 땅에도 소규모 국지전은 종종 벌어진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잠시 놀라 긴장하였으나, 지도를 펼치고 확인해보니 에른하르트 백작령과는 말을 타고 달려도 쉬이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에서 간간이 벌어지고 있는 국지전이라 당장에 크게 마음 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검을 쓰다 보면 언젠가는 그런 전쟁에도 참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 땅의 검은 사람을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다들 말하지만, 무력은 주머니 속 송곳과 같아 감출 수 없는 성질의 힘이었다. 당장 이 시어런 제국의 평화만 해도 고만고만한 다른 왕국들보다 몇 곱절은 커다란 땅덩어리와 힘 덕분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니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의 목을 쳐야 할 때가 분명히 올 터인데, 그때 내가 너무 익숙한 모습을 보여 의심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 죽을 것보다, 지금의 평화를 잃을 것이 더욱 두려운 까닭이었다.
이 넓은 천지에 나와 같이 해괴한 일을 겪은 이가 더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때에도 양친이 나를 그들의 자식으로 생각하고, 이 어린 아해들이 나를 그들의 동무라 여길 것인가.
태어나는 모습부터 차근차근 지켜본 이들이 많아 의심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쉬이 놓을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하면 할수록 어린 몸을 뒤집어쓴 내가 징그럽다는 생각만 들어 한숨을 삼켰다.
이날에는 저녁 훈련 시간에 검형 수련을 하였다.
새로운 검식이 어서 빨리 손에 익었으면 좋겠다는 조급증이 일었으나, 이제는 정해진 시간 외의 수련을 계획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 땅의 법칙에 익숙해지고 싶다 여기는 탓이었다. 오후 여덟 시까지 연무장을 사용하고 방으로 들어가 과제를 하다 잠이 들었다.
* * *
운기조식을 하고, 검을 수련하고, 정해진 수업을 듣고, 또래의 동무들과 대화를 하고 식사를 했다.
아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크게 웃는 날도 종종 있었다.
매번 바뀌는 화두와 관심사를 곧장 따라가기는 어려웠으나 맘 넓은 아해들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것을 듣다 보면 절반가량 이해하여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부유한 아해들을 모아두고 알아서 가방을 꾸리라 하였으니, 수렵과 야영 시간의 배낭이 점점 더 부풀어 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이번 수요일의 수렵과 야영 시간에는 마시멜로를 구웠다. 마시멜로라 함은 동그랗고 푹신하게 생긴 떡과 빵 사이의 물건인데, 에른하르트 가에서도 종종 뜨거운 초콜릿에 넣어 먹는 것이었다.
노지에 직접 불을 피워 본 적이 없다 보니 마시멜로의 겉면만 구워 살살 껍데기를 벗겨 먹는 일이 제법 재미있었다.
중원에서 단 음식이라고 하면 팥소를 빵에 넣어 보들보들하게 찐 당과나, 설탕 따위를 과실에 얇게 묻혀 파는 사탕 같은 것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설탕과 초콜렛 따위가 흠씬 들어간 단 음식은 몇 번을 먹어도 늘 입에 잘 맞았다.
나이가 들수록 단 것을 찾는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정말인가 하는 말을 하였더니, 또래 아해들이 내가 어린 까닭에 단 것을 찾는 것이라 지적하였다.
내심 기가 찼으나 군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식을 찾아 먹는 재미를 제외하고서도, 세드릭 교수가 아카데미의 도움을 받아 꾸렸다는 약초밭에서 직접 약초를 채취하는 일 또한 흥미로웠다.
거대한 온실은 총 다섯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유난히 습하고 하나는 유난히 건조한 등 구획마다 마법을 사용하여 환경을 달리 조성해 둔 것이 인상 깊었다.
각 구역에서 외상을 돌보는 약초, 내상을 돌보는 약초, 해독에 도움이 되는 약초, 배탈에 도움이 되는 약초 등을 구별하고 살피는 법을 배웠다.
약재들 사이 사이에 있는 버섯 중에서 어느 것을 먹어도 되고, 어떤 것에는 손도 대지 말아야 하는지 따위를 배웠다.
이후 어떤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질긴 생을 이어갈 수 있는 방도라 하여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단단히 애를 썼다.
그렇게 별일 없이 금요일을 맞이했다.
쉐이든은 나와 벤자민이 2황자와 함께 단검술을 연습할 거라고 이야기했을 적부터 어안이 벙벙해 하더니, 한참을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딱히 쉐이든과 훈련을 함께하고자 말을 꺼낸 것은 아니기에, 단검술을 익히고 싶지 않으면 굳이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 너는 다른 동무도 많지 않으냐 말하니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물론 너는 어린애가 아니고, 나는 네가 가는 곳에 언제나 따라가야 할 부속품이 아니기는 해. 지금 나는 그냥⋯ 네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널 따라다니고 싶은 게 아니야.”
“음.”
“지금 내가 고민하는 건⋯ 2황자가 2황자이기 때문이야. 우리 로제 가문은 대대로 황위 계승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생존해 온 가문이거든.”
나는 이때, 아카데미에 처음 도착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나를 앉혀두고 훈계하던 그를 떠올렸다. 이런 때에는 얌전히 듣는 것이 도움이 되어 좋았다.
내가 응접실 소파에 앉자 방의 이켠과 저켠을 왔다 갔다 거닐던 쉐이든도 맞은편 자리에 앉아 말을 이었다.
“중립을 지킨다는 건 최소한의 피해를 본다는 거야.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피를 볼 일이 적어. 특히나 우리 로제 가문은 백장미 기사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혹여나 무력 항쟁이 벌어진다면 최전선에 설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일전에 쉐이든이 제 가문의 기사단을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 머릿수만 헤아려도 삼백이 넘는다던 무력 집단은 과연 어디에 붙여도 큰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아이의 녹안이 반짝 빛났다.
“그래서 고조부 때부터 로제 가는 우리의 무력을 안전과 정의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맹세했어. 후계 싸움이 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치안 공백을 우리가 메우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그 이후에도 단단한 계승 작위를 이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음.”
“그런데, 난 거기에 대해 조금 회의적이야.”
“왜?”
“지금 1황자로 있는 리차드는 첫 번째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큰 장점이 없거든. 거기다 플로이드 왕국은 시어런 제국에 비할 수 없는 작은 나라고, 안티네스 후작은 현재 새로운 광산 개발에 몰두하고 있어 꽤 부유한 편이야.”
“허어.”
“나는 2황자가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
“⋯.”
“그러니 내가 좀 더 빨리 2황자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거나 활동을 하면 이후 2황자가 황제가 되고 내가 백작위를 계승할 때에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람은 자기편을 들어 준 사람의 손을 들게 되어 있고, 2황자는 네게 충분히 호감이 있으니, 그 친구인 내게도 잘 대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내가 루베르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여러 생각을 했을 쉐이든과 달리, 그러한 일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못했던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쉐이든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난, 나의 고조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선조의 뜻을 창고에 밀어 넣은 대가로 나를 믿고 따르는 기사들의 목숨을 잃어야만 하겠지.”
나는 겨우 친우 사이의 관계로 마음이 상하여 울먹이며 울음을 삼키던 붉은 여우 같은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놀랍도록 단단한 표정을 하고 상황을 차분히 헤아리는 것이 대단해 보였다.
새로운 무술을 배운다 하여 신이 난 나와 다르게, 그에게는 여유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이미 정치이고 싸움이었다. 그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아 아교를 바른 듯 입이 딱 붙었다.
에른하르트 가의 선인인 부친과 조부는 이러한 이야기를 입에 담은 일이 없었다.
내가 몰라도 되는 일이어서는 아닐 터였다. 흥미가 없어 보이니 당장은 어린 내게 설명을 아꼈을 뿐, 그들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겠다 마음먹은 부분이 분명 있을 테지.
이제는 이러한 이야기를 코앞에 두고서도 이전처럼 막막하고 아득하여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나는 에른하르트 가의 입장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는데, 나 또한 루베르 선배를 만날 때에 그런 것을 신경 써야 하나?”
“으음, 너는 조금⋯ 다르지.”
“왜?”
“일단 상황을 들어보니 2황자가 먼저 네게 호의를 베푼 거잖아. 이런 때에 네가 거절하는 것도 일종의 무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 그냥 도와주는 걸 받겠다고 하는 건 어느 한 편을 드는 것과 달라. 네가 황위 계승자 선택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오히려⋯.”
“오히려?”
“네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해서,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는 2황자가 널 영입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잘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걸?”
“아.”
“어쨌든, 그래서 고민이야. 내가 지금 고급 검술 수업을 들을 자격은 안 되니까, 이번에 단검 연습을 할 때 네가 끼워주면 2황자와 안면은 익힐 수 있을 텐데⋯. 그게 또 가문의 뜻과 어긋날 수 있으니까.”
“그럼, 식사 자리 정도는 괜찮나?”
“뭐, 때가 된다면?”
“그럼 다음번에 여유가 될 때 함께 식사하자. 기숙사 식당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을 테지.”
“아, 음⋯. 그도 그렇겠네. 그래, 대신에 미리 말해 줘.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 있어야겠다.”
쉐이든과 미리 훈련과 관련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긴 것에 안심했다. 그가 황자를 유난히 대하는 것을 보고 심약할 것이라 지레 판단하였던 것이 적잖이 미안하였다.
벗이 현명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은 일이라, 마음 한켠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