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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세가 무사님은 로판에서 환생했다-41화 (41/176)

41.

중간고사를 무사히 치른 이후의 아카데미 일정은 이전과 동일했다.

아침 이슬이 미처 마르지 않은 시간에 연무장에 나가 몸에 열을 내는 것도, 씻고 운기조식하여 하루를 단장하는 것도, 또래와 식사를 마치고 오전 검술 수업에 나가는 것도 시험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일전에 에드윈 키아드리스와 대련한 이후로 잠시 잠깐 검술부에 마법 수식 외우기 유행이 돌기도 하였으나 그 유행은 시험 기간에만 재미있는 딴짓 취급을 받고는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놀이 삼아 외우기에는 마법 수식들의 모양과 발음이 지나치게 해괴한 탓이었다.

그리하여 요사이 초급 검술 시간에는 각종 검식을 수련하느라 미진하였던 기초를 다잡는 중이었다.

나를 따라 한다며 이런저런 검식을 외우고 펼치느라 자세가 망가진 동기들이 몇 있었기에, 나 또한 삼재로 돌아가 기본 검식을 연마하였다.

연무장에 나란히 오와 열을 맞추어 서서 동시에 가로 베고, 동시에 내려치고, 동시에 찌르니 그 맛이 뛰어났다. 홀로 하는 수련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마엘로 샌슨이 나를 조교 삼아 앞에 세워 두었다. 동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직접 내 눈으로 마주 보면서 연습할 수 있어 좋았다.

한편 마법과 수식 원리 기초 시간은 대련 이전과 이후가 판이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평소처럼 수업 시간 조금 전에 교실에 들어섰을 뿐인데, 여기저기에서 작은 인사말이 들렸다.

이전이라면 눈짓 한 번 손짓 한 번을 신경 쓰며 걱정하였을 마리앤 필로덴도르 역시 맑게 웃는 얼굴로 크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미카엘!”

“예. 주말 잘 보냈습니까? 야영 수업 동기들이랑 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아, 글쎄. 들어봐요. 이번에 이반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친구를 만났는데⋯.”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확연히 들떠 있었다.

앤젤라 스팅 교수가 들어오기 전 십여 분간 마리앤은 지난 주말에 동기들과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아침 식사를 함께 했던 쉐이든은 제 동무들이랑 놀았기 때문에 모르고 있던 이야기였다.

문득 생각해 보니, 내가 없을 적에는 야영 수업 동기들과 쉐이든을 이어줄 고리가 없는 것 같기도 하여 걱정이 일었다.

내가 있을 적에만 친하게 섞여 드는 소년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였으나, 영 해맑은 마리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별생각 없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앤젤라 스팅 교수는 이번 시간에 마법 수식을 방어하는 방법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대련 날 내가 했던 것처럼, 무턱대고 술식과 술식 사이의 연계를 오러로 자르거나, 알고 있는 일정 술식을 해치는 것만으로 깨어지는 술식을 방어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한 수업이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 내에 방어법을 세 가지나 찾아온 스팅 교수의 재지에 감탄하였다.

이번 수업은 마법사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류무사, 그러니까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서 최상급까지의,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검수들은 오러를 볼 수 있는 것처럼 마나의 흐름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상대가 어떤 수를 놓을지 알고 있으면 나 또한 그다음에 말을 놓을 자리를 결정할 수 있었다.

바둑이나 체스를 두는 것과 꼭 같은 일이었다.

앤젤라 스팅은 에드윈의 마법을 상대로 내가 놓은 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중이었고, 나는 다른 마법사들이 내 수에 응대할 방법을 알게 되어, 다음 수를 놓을 방안을 구상하였다.

사용하지도 못할 서클을 만드는 연습을 하는 것보다 흥미롭고 즐거워 내내 기뻤다.

수업이 끝나 돌아갈 적에는 에드윈 키아드리스도 눈이 마주쳐 간단히 눈인사를 하였다.

여전히 아해는 묘하게 부루퉁한 기색이었으나, 한 풀 기세가 꺾여 있었다. 어린 아해가 뻗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았다.

* * *

홍역처럼 시험을 한 차례 치러낸 뒤, 이전에 샀던 단도 꾸러미를 풀어 볼 수 있었다.

내 방의 응접실에 벤자민을 초대하여 산 것들을 선보이는 시간을 두었다. 쉐이든이 냉큼 따라붙어 이번에도 셋이 함께 자리하였다.

넓은 테이블을 빼곡히 채운 단검은 반 뼘을 조금 넘는 것에서부터 두 뼘 남짓한 것까지 그 크기나 모양이 다양했는데, 손잡이의 모양이나 검신의 굴곡 따위가 전등 빛에 반짝거리는 게 퍽 보기 좋았다.

벤자민과 쉐이든도 검사는 검사여서, 단검을 들어 살피고 무게를 재거나 만지작거리는 태가 오히려 중원인들보다 나았다.

이야기를 물어보니 시어런의 기사들은 단검을 특별히 꺼리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단검이라고 하면 사랑의 증표 같은 취급을 받지 않나?”

“증표? 정인에게 주는?”

“어어. 뭐, 그렇지. 보통 장검은 허리에 차지만, 단검은 가슴팍에 홀스터를 해서 매어 두거나, 아니면 그냥 재킷 안주머니에 넣는 일이 많으니까. 심장이랑 좀 더 가까운 곳에 자리해서 낭만적이라는 말이 많아.”

이곳 시어런은 중단전에 퍽 많은 의미를 담는다 싶어 신기하였다. 마나도 중단전으로 이끌어 서클을 만들더니, 이런 것도 심장에 가까이 두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그 말을 듣고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 단검을 넣어 보았다. 안 그래도 빠듯한 재킷이 불룩 튀어나오는 몰골이 영 어색하였다.

게다가 나는 재킷을 자주 입지 않으니 홀스터라 불리는 단검 띠를 매어야 하겠다 생각했다.

남궁의 도포가 아쉬워졌다. 중원에서는 넉넉한 소맷자락에 비수를 담아 다니는 일이 잦았다. 가슴팍에서 꺼내어 쓰는 것보다, 손목이나 소매에 달아 둔 것을 쓰는 것이 더 편리할 터였다.

“크기가 작다 보니 귀엽기도 하고요. 일반 가죽 검집을 좀 더 화려하게 수실이나 자수로 장식해서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기사가 아니라도 어디 먼 길 나갈 때는 챙겨 다니는 게 일반적인 편이지.”

“아직까지 단검 하나 없었다는 게 특이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게. 단검이 없으면 갑자기 과일이 먹고 싶을 때 어떻게 해?”

“과일?”

“뭐, 그냥 돌아다니다가 오렌지나 사과 한두 개만 먹고 싶어지면 그 자리에서 사서 깎아 먹고⋯. 아, 하긴. 넌 원래 밖에 잘 안 나왔지.”

이곳 시어런의 치안이 좋다 보니 어린 아해들이 단검을 품에 넣고 다닐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생각 외의 용도에 픽 웃음이 샜다.

늘어놓은 단검 중 어느 것을 품에 넣고 다닐지를 곰곰 고민하다가, 푸르스름하게 날에 빛이 도는 것을 짚었다.

“그럼 난 이걸 들고 다녀야겠다. 나머지로는 단도 던지는 연습을 하고.”

“보통 단도 던지는 연습은 한 가지 단도로 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그래야 빨리 는다고. 일단 하나에 익숙해진 뒤로 휜 것도 쓰고, 긴 것도 쓰면서 변주를 더해 가야지.”

“으음⋯. 그럼, 이것과 이것으로 먼저 시작하면 좋을까.”

“교수님의 조언을 듣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벤자민이 일전에 말했던 단도술 교양 수업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카데미 수첩을 펼쳐 마지막 장을 살펴보니 과연 비도술을 전문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수가 있었다.

교수의 수업 시간을 따로 알지 못하니, 이후 마엘로 샌슨 교수에게 부탁하여 비도술 연습을 위한 공간을 빌릴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을 다짐하였다.

다음 날 오전, 고급 검술 수업을 끝마치고 마엘로 샌슨에게 단도술을 강의하는 교수에 대한 것을 물었다.

비도술을 가르치는 윌턴 로버츠 교수는 마땅히 해야만 하는 수업을 제외한 시간에는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겠는 신출귀몰한 이라고 했다.

고민하던 중에, 옆을 기웃거리던 소년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또 루베르였다.

“교수님만큼 잘 가르치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좀 도와줄까? 비도술 연습장 열쇠 정도는 내가 빌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배가요?”

“응. 이번 학기에 비도술 수업을 듣고 있는데, 내가 성적이 좋은 편이거든. 도와줄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네. 내가 다른 교수가 사용하는 교실을 열어 주는 건 월권이라 어렵거든. 하지만 교수 허락하에 해당 수업을 듣는 학생을 동반해서 다닌다면야 별문제 없겠지. 단검과 비도 수업에 사용하는 과녁이 몇 미터 거리였지? 안전망은 되어 있나?”

“5m, 10m, 20m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안전망도 있고, 안전선도 있어요.”

“수업은 무슨 요일이고?”

“매주 수요일 오후에 수업하니까⋯ 내일이면 허락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때, 후배님. 나랑 시간 맞춰 보는 건.”

매번 비실비실하던 루베르 황자가 까만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아하니, 단도술 성적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린 아해가 얼마나 자랑하고 싶으면 그럴까 싶어, 우습고 귀여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는 매주 금요일 오후에 시간이 비는데, 선배는요.”

“음, 나도 괜찮아. 그럼 금요일에 같이 점심 먹을까?”

“아, 그건 좀.”

“⋯아. 아,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지.”

“예, 같이 식사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불편해할 것 같습니다.”

“⋯그으, 래⋯? 많이 불편할까?”

잠시 고민했다.

벤자민은 크게 불편해하지 않을 놈이지만, 쉐이든은 분명 긴장해서 숟가락을 새끼손가락으로 쥐고 덜덜 떨어 멀건 고깃국 한 스푼도 제대로 먹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고개를 내젓자 소년이 마른세수를 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권위를 세우는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쉐이든은 이 소년을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냥 어리고 서툰 아해로만 보이는 에드윈을 무서워하던 마리앤을 떠올리면, 이 땅의 신분제는 허술한 구석과 견고한 구석이 함께 있어 나름의 먹이사슬이 있으리라 싶기도 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 이 또한 알게 되리라. 내가 손을 쓸 일이 있을 적에나 끼어들면 될 일이다. 내 동무들이라고 하여 둘이 꼭 가까워야 하는 것도 아니라 여겨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 그건 괜찮아?”

“예. 클라우디안 영식은 다른 친구들보다 낯을 안 가리는 편이라서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 있던 벤자민 클라우디안이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였다.

루베르 황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간 시들시들하고, 또 어느 정도는 처량하게 웃는 낯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러자. 곱게 대답하는 상대를 보며 기분이 들떴다.

무엇을 하고자 할 적마다 자연스럽게 뻗어지는 도움의 손길들은 중원에서는 미처 겪어 보지 못한 편의였다.

일전에 세계사 노트를 빌려준 것도 그렇고, 꾸준히 소소한 것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퍽 세심한 놈이라 생각하여 새삼스럽게 바라보자 멋쩍게 웃는 모습이 쑥스러운 것도 같았다.

자연스레 나중에 일이 있다면 잘 챙겨줘야겠다 속으로 다짐하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그래. 그럼⋯, 클라우디안 영식도 같이 해서, 금요일에 식사하고⋯. 제1 연무장 근처에서 볼까. 비도 연습장이 거기에서 가까워.”

“예.”

“네, 감사합니다.”

벤자민과 둘이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그럼 해결된 것이니 잘해 보라며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고 가는 마엘로의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루베르의 낯을 보았다.

웃고 있는 낯짝이 불을 켠 듯 훤한 것이 헌헌장부로 자랄 상이었다. 보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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