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에른하르트 소백작가 인원들과 다니는 나들이에는 늘 따라붙는 인원이 많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홀로 걷는 것에 익숙해져 아득하니 잊고 있던 것들을 도로 떠올렸다.
부모와 자식의 수만 해도 다섯이었다. 거기다 아이들의 나이가 어리니 유모와 시녀가 따라붙고, 우리를 호위하는 기사가 또 넷이 붙었다.
거기에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는 시종 하나가 앞에 서니 안휘(*남궁세가의 본거지. 중원 동쪽 방향)에서 사천(*중원 내에서 안휘와 서쪽 방향으로 가장 먼 더운 지방) 가는 표국의 행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예약해 두었다는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내 왼팔에 미하엘을 걸쳐 앉히고 오른손으로 볼과 코를 훑으며 아이를 어르니, 까르르 숨넘어가게 웃다가도 단풍잎 같은 손으로 목을 꼭 안아 오는 것이 애틋하여 자꾸만 손이 갔다.
마냥 어여뻐 말랑한 뺨을 한 번 깨물었다 놓았을 적에는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은 양 뿌듯하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부친이 슬쩍 말을 붙여왔다.
서먹할 것 없는 사이였으나, 워낙 미하엘이 신이 나 조잘거리며 수선을 부리는 통에 인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 얼굴 마주 보고 웃는 것으로 인사를 갈음한 채였다.
“원래는 학기 중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구나.”
“저도 양친을 이리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래, 아카데미 공부는 할 만하니?”
“예, 어머니.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요.”
시종과 기사들은 옆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고, 다섯 가족이 둥그런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떨어져 있던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이 몸의 동생인 미하엘과 아스델의 학업에 대한 것들이었다.
어린 아해들도 제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 재잘대며 떠들어 대고 자신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것이 무척 귀엽고 어여뻤다.
미하엘이 새로이 배우고 있다는 가문의 일을 조잘대는데, 포도밭에 놀러 가 여러 품종의 포도들을 만져보고 먹어 보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이때 부친이 내 눈치를 보는 것을 느꼈으나 웃으며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내었다.
“내게는 무척 어려워 잘하지 못하였는데, 네가 재미있게 생각해 주어 다행이다.”
“형은 어려웠어?”
“그럼. 그 많은 숫자를 헤아리고 주스의 맛을 구분하는 것은 내 미각이 둔해 무척 어려웠단다. 네가 나보다 잘하니 그 부분에서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날 도와주면 되겠구나.”
“음! 맞아. 내가 형보다 더 잘하니까 도와줄게.”
“네가 있어 다행이다, 미하엘. 정말로 그래.”
“나도! 나도 숫자 잘 세는데. 이제 스물까지도 세는데!”
“아스델도 이 오라비를 도와줄 거야?”
“그럼! 그래야 옳지!”
두 꼬마 녀석의 말투가 묘하게 나를 닮았다. 그것이 문득 우스워 크게 웃으며 자른 고기를 하나씩 입에 넣어 먹여주었다.
녀석들이 몇 번이고, 자신들이 나보다 숫자를 더 잘 센다 우쭐하며 좋아했다.
내가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땅에 대한 일이라 저어하는 기색이던 부친도 편안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린 아해들이 쪼르르 입을 모아, 포도주 대신에 맛본 포도 주스가 무척 맛있었으니 다음에 내게도 맛보여주겠다 선언하는 것에 감사 인사를 하며 녀석들의 식사를 챙겼다.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시작할 무렵 어린 아해들이 노곤해하더니 유모의 손에 잠들어 수도의 발렌티아가 타운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는 들었으되 내 훈련에 바빠 방문해 본 일이 없던 곳이다.
시종들도 물리고 세 가족이 응접실에 편안히 둘러앉았다. 그제야 나는 아카데미에서 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동무를 많이 사귀었고, 교수들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이야기는 편지로도 한 차례 알린 이야기였으나 부친과 모친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흥미를 보였다.
특히나 마법 수업을 들었으나 알고 있는 술식 중 어느 것도 사용하지 못한다 할 적에는 모친이 웃음소리를 크게 내었다.
“나도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는 그랬어. 수업만 들으면 마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어머니께서는 어떤 수업을 들으셨습니까?”
“그때⋯. 뭐였더라. 실생활에 사용되는 마법 설계⋯? 였던 것 같은데. 마법진을 그릴 때 모양 자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큰 충격에 빠졌었단다.”
“아버지는 어떠셨습니까?”
“으음⋯. 나는 조기졸업을 해야만 했기에⋯. 그 당시 경영부 수업만 들었지, 마법 수업을 들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단다.”
잠시 뜸을 들인 부친이 말을 이었다.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아티팩트 제작과 관련된 수업을 들을 자격이 되지 않더구나. 경영부에서 마탑과 거래하는 법 정도만 익혔어.”
“검술부는요?”
“검술부 수업은 듣긴 했지만⋯. 그래, 검을 잡아보기는 했지. 재능이 없어 소드 익스퍼트 하급 수준에서 멈추어서, 그냥 체력 단련 한 수준에 그쳤지만 말이야.”
“네 엄마는 사실 네 아빠를 처음 봤을 때 오빠가 아주 잘생긴 기사님을 골라 온 줄로만 알았단다.”
꿈결처럼 달콤한 목소리에 아비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미카엘 네가 어릴 때부터 기사가 되고 싶어 하기에, 너도 날 똑 닮아 기사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뭐니.”
“⋯좀 더 검을 수련해 볼 걸 그랬나 봅니다.”
“당신은 지금도 제겐 멋진 기사님인걸요.”
모친이 간지럽게 말을 이었다. 그 만면에 웃음이 흠뻑 스몄다. 부친이 흠, 헛기침할 적에 나는 문득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제 나도 어느 정도 아는 것이 있어 짓궂은 마음이 일었다.
“수업 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머. ⋯제국의 계보 수업이었겠구나. 뭐라고 하든?”
“공작가의 금지옥엽인 어머니는 결혼식 날에 처음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고, 그 중매를 외숙부님께서 서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더 말을 붙이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려는 양 모친의 눈이 가느스름하였다.
그 눈가에 맺힌 새초롬한 웃음은 내가 처음 이 땅에 태어났을 적에는 없었던 것이라, 또다시 뿌듯한 마음이 일었다.
부친은 이야기가 나올 적부터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간간이 흠, 흠,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아, 아버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흠, 흐음. 그, 무슨⋯ 어떤 것이 궁금했기에?”
“외숙부님께서 처음 아버지를 무도회에서 보자마자 곧장 공작저로 끌고 갔다고 하였는데, 그 방식이 난폭했다고 하여 상상이 잘 가지 않습니다.”
“난폭했다고? 나는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랬어요, 당신?”
“아니, 으으음⋯. 그냥 좀 놀라긴 하였는데⋯.”
“어떻게 했기에?”
부친은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말해도 되는 이야기인지를 가늠하려는 것 같았으나, 그간 부친에게 모친을 대하는 법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여 내 성숙함을 알았기 때문인지 결국에는 꾹 다물렸던 입이 열렸다.
“날 보자마자 첫인사도 하기 전에 멱살을 잡아 흔드셔서는⋯.”
“뭐어? 그랬어요?”
나보다 모친이 더 놀란 소리를 내며 펄쩍 뛰었다. 당황한 모친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부채를 잡아채 살랑살랑 얼굴에 바람을 부쳐 주었다.
이어서 대답하는 부친의 목소리는 민망한 소리를 겨우겨우 꺼내는 양 평소보다 얇았다.
“나중에 까닭을 물으니, 발렌티아 소공작께서는 내 성격이 친절하고 얌전한지를 알고 싶었다고 하시더구나. 어찌어찌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았지.”
“아니, 어떻게 그런⋯, 제게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때는 무어라 입을 열면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여서⋯. 다시 생각하면 재미있는 추억이니 화낼 것 없습니다. 그냥 발렌티아 소공작께서 저를 놀라게 하여 반응을 보았을 뿐이에요. 곧장 사과도 받았습니다.”
“오빠가 뭐라고⋯ 사과했나요⋯?”
“본인이 잘못하였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맙소사! 하지만 우린 소개받은 기억이 없는걸요!”
“그날 바로 혼인 신고서를 작성하여야 했기에 발렌티아 공작님을 먼저 뵈어서⋯.”
모친은 잠시 현기증이 일었는지 손등으로 제 이마를 쓸었으나, 곧 부친이 달짝지근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기에 곧 수줍은 웃음을 유리 상자에 담아 둔 알사탕처럼 색색이 쏟아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진중한 척 구는 외숙부가 그런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아 마냥 혼란스러웠으나 눈앞의 둘이 하는 행태가 우습고 귀여워 따라 웃고 말았다.
부친과 모친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게 된 지 햇수로 십 년이 넘었는데도 사이좋은 모습을 볼 적에는 여전히 흐뭇하였다.
부부가 서로 아끼어 기대는 모습이 참 어여뻤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정인 한 번 가져보지 못한 몸이라 일순 부러운 마음이 일었으나, 영 주책이다 싶어 생각을 떨쳐냈다.
시어런에 갓 태어났을 적에는 나이가 차면 이 몸과 또래의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려 자식을 볼 생각도 하였으나 지금은 영 마뜩잖았다.
어느 소녀를 보아도 너무 어려 보이는 탓이었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불안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마냥 바뀔까,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다가도 모친의 앳된 얼굴에 해맑은 기쁨이 서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떤 여인을 상대로 저렇게 웃게 만들 수 있겠나 하여 꺼리게 되었다.
여인의 마음속이란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한 황궁의 내부 정원처럼 아득하니 멀고 어려웠다.
부친과 모친의 옛날이야기를 밤늦게까지 나누다가 방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에는 온 가족이 함께 무기 상점을 구경하였다.
내가 수도에서 가장 신기하고 즐겁게 보았던 곳이기에 함께 하였는데, 과연 미하엘이 신기해하며 기뻐하기에 위험한 검 대신에 화려한 방패 몇 개를 만져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후에 모친과 부친의 권유로 아해들을 데리고 장난감 상점에 갔을 때 아해들이 무기 상점보다 더 기뻐하고 좋아하여 조금 머쓱하였다.
모친이 수도에서 살 적에 자주 들렀다던 식당이나 카페, 꽃집 따위도 구경하였다. 온 가족의 손수건이며 스카프 따위를 색을 맞추어 구매하기도 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광장의 분수를 구경했다. 발렌티아 가의 타운하우스에서 둘러앉아 옛 초상화들을 구경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이리 아까운 일은 오랜만이었다.
일요일 저녁이 되어 내가 아카데미로 들어가야 할 적에, 미하엘이 눈물을 꾹 참고 꿋꿋하게 인사하며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랫배가 보드라운 머리털로 간질간질하였다.
“형, 공부 열심히 잘해. 내가 얼른 아카데미 가서 형이랑 같이 공부해 줄게.”
“그래, 미하엘. 꼬박꼬박 편지할 테니 답장해 주겠니.”
“응! 내가 아스델 편지 쓰는 것도 도와줄 테니까.”
“맞아, 이미 보았다. 씩씩하고 멋진 내 동생.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도!”
“그래, 우리 막내도. 편지 기다릴게.”
옆에서 샘이 난 막내 아스델이 함께 뛰어들기에, 어린 두 몸을 한 번에 끌어안아 번쩍 들어 올렸다.
아카데미 입학식 이전에 이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만은 지켜 주리라 비장하게 다짐한 일이 있었다.
이제는 그저 헤어짐이 아쉽고 다시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즐겁고 유쾌하여 자꾸 웃음이 나왔다.
보들보들한 아이들의 양 뺨에 몇 번씩이나 입술을 누르고 나서야 아이들을 두고 아카데미로 향하는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땅에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 한켠이 포슬포슬하니 부풀어 올랐다.